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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Nov 14. 2024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은

싸이월드 일기장과 함께

꽤 오랫동안 싸이월드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미니홈이 백업조차 불가능하다고 원망도 많이 했는데, 간신히 로그인을 한 끝에 과거 사진과 글들을 ebook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없이 오류를 내면서 인고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과거의 ‘나’를 PDF파일 4개로 다운로드 완료하였다.


그 순간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 볼품없는 파일들을 행여 열어보기라도 하면 몇 시간, 아니 며칠 동안은 시간여행을 하느라 허우적거릴 게 뻔했다. 미루고 미루다 지난 주말에 드디어 ‘싸이월드_일기장’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몹시 눈이 불편한 레이아웃 속에서, 무려 지금의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내가 타박 타박 걸어나왔다. 그녀의 일기들을 들추며 나는 존재조차 잊었던 장면과 감정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우습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서글펐다.


쓱쓱 스크롤을 내리던 나의 손가락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먼 기억이지만 또렷하게 남아있던 한 줄의 일기, 그게 바로 여기 끼워져 있던 것이었다니!


“...아, 너무 많이 멀어져 버렸다,
열 살 성원이가 꿈꾸던 서른 살 성원이와는,
스무 살 성원이가 꿈꾸던 서른 살 성원이와는,
그래도 슬퍼하지 말아야지.”


갓 서른이 되었을 때 이 문장을 작은 창에 타이핑하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제목 옆에 적힌 날짜 덕분에 어느 공간에서 이 글자들을 조합하고 있었는지도 같이 보였다. 그런데, 왠지 모를 애틋함이 막 피어오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깨닫고 말았다. 스무살의 나는 서른살을 꿈꾸었고, 저 글을 쓰던 서른살의 나는 분명 마흔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마흔을 갓 넘긴 나는 쉰살의 나를 그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 충격으로 멍했다가,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맞다. 내가 더 이상 ‘청년의 때’처럼 야심차게 10년 후의 나를 두고 계획을 ‘수립’하지 않는 이유는, 지나온 어느 시점부터 알게 되었기 때문일 테다 – 사람의 계획이란 건 언제나 틀어지기 마련이고, 나를 넘어서는 목표는 조급함과 괴로움으로 돌아온다는 걸 말이지.


지금 어디 서 있는지 찬찬히 확인하기보다 어디로 가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앞세울 때마다 늘, 결국, 자책하는 마음만 내게 남았기 때문이다. 나만 그랬을까? 아니, 내가 사랑하는 또는 미워하는 많은 사람들도 내 곁에서 그런 장면들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만 적용되는 무서운 법칙이 아니라서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함도 커서 무력한 상태로 마구 시간을 흘려보냈던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 어른이 되면 무조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탁월해져야 한다는 조건들이 사실은 사회가 내게 심어준 편견일지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 스스로 나에게 그렇게 되라고 혹독하게 다그칠 필요도, 타인에게 비난하듯 강요해서도 안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대신, 쌓이는 경험만큼 나 자신에 대해 점점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왜 주저앉는지 이제는 이해할 때가 되었다는 것, 한쪽은 길고 다른 쪽은 짧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들쑥날쑥한 그 모습을 수용하며 감싸안고 나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촘촘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살면서 평생 해야하는 숙제 같기도 하다. 숙제를 갑자기 몰아서 하면 너무 힘들다. 매일 조금씩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걸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배우지 않았나. 그럼에도 늘 하기 싫은 것이 숙제였지. 나를 대하는 일은 정말이지 숙제와 같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고 외면하려고 해도, ‘해야한다’는 사실만큼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것도 똑같다.


그렇게 꾸역꾸역 숙제를 하다 보면, 그 덕분에 누군가는 넓어질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깊어질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더 좁아질 수도, 누군가는 더 날카로워질 수도 있겠다. 각자의 모습은 그렇게 다 다른 것이다. 나의 울퉁불퉁함을 제대로 알게 될수록 다른 이들의 이런 저런 모습에도 점점 더 그러려니 한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으니까, 누구도 정말로 언행일치를 하고 있지는 못하니까! 


서른 살보다 너그러워진 마흔살의 나는 꽤 인간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웃었다.


과제로 제출했던, 스스로 참 좋아하는 예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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