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나중에 또 와서 자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전월산에서의 첫 백패킹이 즐거웠던 걸까, 아빠와 단둘이 집을 떠난 여행이 좋았던 걸까? 다음 주에는 어디에 가냐는 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SNS를 들춰보며 부지런히 두번째, 세번째 백패킹 장소를 물색했다. 자주 함께 오르던 세종 원수산도 고민해보고 20분 거리의 조치원 오봉산도 고려해봤다. 그러다 문득, 지난 주말 가쁜 숨을 내쉬며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던 아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무거운 배낭이 분명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편안한 섬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 강천섬’
최근 온라인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다.
캠퍼나 백패커라면 아니, 딱히 그것들에 관심이 없더라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유튜브 등 SNS 이용자라면 한 번쯤은 보았을 노란 은행잎이 가득한 드넓은 자연 속에서 호젓하게 캠핑을 즐기는 감성 사진. 바로 강천섬의 가을 풍경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가을날의 추억을 선사해준 그 강천섬이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폐쇄된다거나 없어진다는 게 아니다. 일부 미성숙한 행락객들로 인해 환경오염뿐 아니라 화재 등 안전사고까지 이어진 끝에 결국 지자체에서 강천섬 일대를 낚시, 야영, 취사 금지구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나와 아들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강천섬에서의 하룻밤을 계획하기로 했다. 아들에게 혹여 무단으로 버려진 쓰레기와 훼손된 자연환경 등의 좋지 않은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반대로 LNT를 실천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좋은 배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넓은 잔디와 즐비한 텐풍(텐트가 만들어 낸 풍경) 사진을 찾아 보여주자, “우와! 여기선 축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고 공던지기도 할 수 있겠다!”라며 쾌재를 부른 아들은 벌써 들떴다. 캠핑 왜건을 끌고 진입이 가능한 강천섬은 백패커뿐 아니라 미니멀 오토캠핑 장소로도 유명하다. 주차장에서 강천섬까지는 15분 남짓 거리. 물론 섬 안에서 박지를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시간과 거리는 늘어난다. 이동 거리에 부담이 없으니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여유 있게 준비하고 캐치볼과 원반던지기 등 놀거리도 챙겼다.
집에서 강천섬 주차장까지는 약 130km, 2시간 거리. 아들과 단둘이 이동하는 첫 장거리 여정이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 도움 없이 내가 운전하며 아들의 두 시간을 책임져야 한다. 어쩌면 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든 도전일지도 모른다. 미디어와 태블릿으로 아이의 눈과 귀를 지배한 채 나만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아들이 즐겨듣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와 동요를 모은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 손이 닿는 위치에 아이가 스스로 여닫으며 마실 수 있는 물병과 캔디를 준비해놓기로 했다. 그렇게 왕복 네 시간이 소요될 장거리 드라이브를 위한 환경을 갖춘 뒤 운전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놀거리와 이야깃거리 를 고민했다. 출발해서 한동안은 지난 한주의 이야기, 오늘 가는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거다. 그러다 아들이 “아빠 나 심심해!”를 외치면, 그땐? ‘그래! 끝말잇기를 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다섯 살에게 아직 끝말잇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아이의 눈높이에서 최대한 흥미를 유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분명 오늘 아침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했을 땐 2시간 남짓이었는데, 도착까지 3시간을 가리키는 건 아마도 영동고속도로 호법JC부터 여주IC까지의 교통체증 때문인 듯 싶었다.
약속된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들과 함께 어린이집 생활과 담임 선생님 이야기, 가깝게 지내는 반 친구들과 등하원 셔틀버스를 함께 타는 동네 친구들 이야기도 나누었다.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어느새 잠든 아들은 강천섬 주차장에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눈을 떴다.
길가에 활짝 핀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반겨주는 아름다운 강천리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강천섬에 입도(入島)하게 된다. 그때 아들이 말했다.
“아빠! 그런데 우리 배는 언제 타?”
“배?”
“응! 우리 섬에 간다며! 섬에 가려면 배를 타야 바다를 건너가지!”
지난 수일간 백패킹으로 가기 좋은 섬을 물색하며 찾은 매물도, 굴업도, 덕적도, 죽도, 신수도 등등의 사진을 아들에게 보여주며 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아마도 아들의 머릿속에서 뒤섞인 모양이다. 차근차근 아들에게 설명했다.
“강천섬은 바다가 아닌 강 위에 떠 있는 섬이야. 여긴 다리가 연결되어 배를 탈 필요 없이 걸어 갈 수 있어.”
“그럼 여긴 진짜 섬이 아닌 거잖아? 난 배 타고 가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 아들, 대신 다음 번엔 배 타고 들어가는 섬으로 갈께. 바다 건너 진짜 섬으로! 어때? 약속!”
기대했던 배를 타지 못해 크게 실망한 것 같은 아들은 아빠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받은 후에야 기분이 풀어졌다.
너른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아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는 사실이 미안했던 나는, 마치 ‘오늘 너 하고 싶은 거 다해!’라고 외치는 듯, 준비했던 원반던지기와 캐치볼에 열중하며 해질 녘까지 뛰놀았다.
긴 하루를 보내고 텐트에 누워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의 강천섬은 앞으로 다시 백패킹이나 캠핑을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하룻밤 머물러 갈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설명해주며 전월산에서 알려줬던 LNT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들이 제안했다.
“아빠 그럼 우리 내일 여기 쓰레기 많이 주워 갈까? 그러면 나중에 또 와서 자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쓰레기를 줍는다고 다시 강천섬이 열리진 않을 것 같단 얘기를 해주려다가, 이내 삼켰다. 어쩌면 아들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부터 강천섬을 아껴주기를 실천하다 보면 어느 날 다시 캠퍼와 백패커에게 섬을 개방할지도 모를 일이다. 플로깅을 제안한 기특한 아들과 내일 강천섬을 떠나기 전까지 한 번 더 신나게 잔디밭을 뛰놀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침낭과 한 몸이 되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