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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연 Feb 20. 2021

에라이, 한 눈은 감으렵니다

해도 해도 육아는 어렵습니다.


"조금 더 일찍 오지 그러셨어요......."


 국민학교 2학년 여름. 택시 등받이에 기댄 등이 흥건해질 즈음 도착한 멀고도 큰 병원. 눈에 숟가락을 대고 몇 개의 숫자와 글자를 읊고, 망원경 같은 기계 앞에 앉아 빨간 지붕 집을 노려보고 또 몇 개의 검사를 더 했던가? 병원 복도에 앉아 살이 제법 오르기 시작한 허벅다리를 휘두르며 한참을 기다린 끝에 의사의 입에서 건조하고도 퉁명스럽게 뱉어진 문장.

 그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울었다.


 나는 짝눈이다.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내 오른 눈의 시신경은 어느 순간 자라기를 포기했다. 서너 살 즈음 알아차렸다면 교정의 여지가 있었을 수 있지만 이미 늦었다고 했다. 망막이나 각막의 문제가 아니라 눈과 뇌를 잇는 시신경에서 비롯된 문제라 안경이나 렌즈, 수술로도 시력을 향상할 방법은 없다고 했다. 혹 가까운 미래에 신경을 자라게 하는 기막힌 신약이 발명된다면 모를까 나는 평생 짝눈으로 - 정확히는 거의 왼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며 살아가야 한다.


 보통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너무 크면 좋았던 눈도 급격히 시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기특하게도 나의 왼눈은 잘 버텨주었다. 양쪽의 도수 차이가 많이 나는 안경을 쓰면 한동안 어지럽다던데 그런 부작용도 없이 잘 적응했다. 눈이 좀 쉽게 피로해지긴 하지만 무심한 의사가 우리 엄마 가슴에 선물한 괜한 자책감만 빼곤 큰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다.


 눈이 두 개인 데는 분명 조물주의 의도가 있을 테다. 정상적인 눈이라면 윙크하듯 번갈아 한눈씩 감았다 뜰 때마다 사물의 중심이 이동하는 듯 보인다. 양쪽 눈이 각기 다르게 보는 상을 뇌가 합쳐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여기가 중심이다, 이게 진짜다' 알려주는 것이 양 눈의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엔 왼쪽 눈이 보여주는 상만으로 중심을 잡는다.

조금 어려움이 있다면 운전하면서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살필 때. 남보다 고개를 더 돌려 왼쪽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차에 내장된 내비게이션도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내비를 잘 살펴야 하는 초행길을 갈 때면 상모 돌리기라도 한 냥 한층 피곤하다. 운전 초보때는 오른쪽 거리감이 없어 툭하면 벽에 긁는지라 차가 늘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그 외엔 정말 괜찮다.


 사실 정확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이상적 행위일지 모른다.

 눈으로 보는 중심이란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왕년엔 미대 입시를 치르려면 누구나 석고소묘를 해야 했다. 이 석고상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천재적인 조각가들이 황금비례에 입각하여 어마 무시하게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만든 작품을 복제한 것으로, 한 마디로 그리기 어려우라고 작정하고 가져다 놓은 독한 과제다. 때문에 석고소묘의 성패는 얼마나 정확한 형태를 잡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그림 그리는 사람 하면 딱 떠올리는 짓 - 긴 연필을 꼿꼿이 세워 들고 팔을 쭉 뻗은 채 한 눈을 감고 살포시 고개를 기웃거리는 -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양 눈을 다 뜨고 보면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리므로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한 눈만 택해서 '이게 중심이다' 치고 일관되게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형태를 제대로 옮길 때까지는 앉은 자세와 높이를 크게 바꿔서도 안되고 연필의 각도를 달리 잡아도 안된다. 처음 정한 중심을 믿고 그대로 쭉 가야 한다. 그래서 짝눈인데도, 아니 짝눈이라서 오히려 편했다. 정확하다, 옳다는 기준은 내 눈이 아닌 내 안에서 세우는 것이니까.


나의 중심이란 애당초 한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잡혀있으니까.



  삐딱한 중심이라니 되려 멋지지 아니한가?





 

 며칠 전 둘째에게 크게 마음이 상했다. 고작 열 살짜리에게 당한 기분이 참담하여 방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지난 일 년 간 쌓인 피로와 불안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학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학원은 원래도 보내지 않고 있었던지라 아이들의 학업과 성장의 책임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다. 본래 학업성취를 크게 생각하는 편도 아니고, 되려 지나치게 학업에 치우쳐서 아이들의 놀이 시간이 충분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던 쪽이라 갑자기 많아진 시간 덕에 원 없이 하고픈 것을 하며 자유로운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동안 풍족했다. 그러나 고립의 기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고, 아이들의 친구들이 하나둘 학원 스케줄로 도리어 바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선뜻선뜻 불안감이 스몄다.

 그래도 고학년인 큰아이는 매일매일 온라인 수업과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혼자 공부하는 근육을 붙여가는 것이 보여 다행이었다. 자기만의 루틴을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둘째는 날이 갈수록 헤이함에 가속도가 붙었다. 온라인 수업 땐 지루하다며 연신 딴짓에 의자만 빙글빙글 돌리고 숙제는 안 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둘째는 하고 싶은 것에 있어선 선이 명확했다.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해야 했고, 궁금한 것은 어떻게든  찾고, 만들고, 분해하며 이해했다.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면 밥이고 잠이고 중요치 않았다. 나는 이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속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채 상승하는 곡선을 그려보곤 했다.


그 극단적인 불균형을 사랑하고 자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름답게만 보이던 일그러진 곡선이 위태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잔잔하고 흔들림 없는, 굵게 중심을 채워나가는 다른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듭 아이에게 '균형을 맞추는 것, 비어 있는 다른 쪽을 채우는 것'의 필요를 설명하고 타일렀다. 잔소리가 늘었고 짜증과 화가 되고, 회유와 협박이 되고, 부탁과 약속까지 들먹였다. 그러나 아이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 선이 명확한 아이니까.


 그날도 아이는 내게 철썩 같이 약속했던 완료된 숙제 대신, 밤을 새우며 완성한 무선 조종 자동차를 내밀었다.

 뭐가 잘 못 되었는지는 모르고 그저 칭찬만을 기다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야말로 만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한 사랑이 쏟아졌을 내 눈에선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이씨, 이 와중에 왜 또 잘 만들고 난리야!'




 마음을 다잡는데 며칠이 걸렸다. 툭하면 울고 피로한 탓에 눈이 흐릿해졌다. 그럴 땐 가만히 눈을 감고 가상의 점, 내가 정한 중심을 향해 한껏 눈의 초점을 모아야 한다. 그 막막한 어둠을 한참 노려보고 있노라면 흩어졌던  눈동자가 바로 서고 희끄무레했던 상이 또렷이 떠오른다.


 애초에 나의 시신경이 자라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 나의 중심은 세상의 기준에서 어긋나게 정해졌다. 균형 잡힌 삶이라는 허상을 완성하기 위해 크고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기울어 오르는 아이를 붙들려했다니 어리석었다.


중심을 잡으려면 한쪽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중심은 내가 정하는 대로 보인다.



며칠 만에 아이를 안고 수없이 많은 뽀뽀를 해주었다.

아이는 내게 삐뚤삐뚤 답이 적힌 숙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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