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할 때 엄마가 우리를 못 알아보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다. 동생과 나는 엄마의 그런 증상들이 일회성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치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엄마의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내 삶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되살리고 싶다.
# 일일교사, 하지 뭐!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을까. 아마도 생활기록부였던 것 같은데, 나랑 C에게 교무실에 가서 가져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심부름이란, 한눈팔지 않고 최대한 빨리 가져와서 담임한테 전달하는 거였다. 그런데 C는 되바라진 아이였다. 그 기록들을 들쳐보고 눈에 띄는 누군가의 정보를 알게 된 뒤 소문을 퍼뜨린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억울했다. C가 나랑 같이 봤다고 주장했지만 난 빨리 가자고 재촉했을 뿐이었다.
아무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담임이 극도로 화를 냈다. 엄마에게 이 모든 사태를 말하고 해결책을 찾고 싶었으나,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런 방면엔 무능해 보였다. 어린애가 웬 한숨이냐고 무슨 일 있냐고 엄마가 물었지만, 난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학기 초 엄마가 일일교사로 왔던 그날 기억 때문이다.
내가 반장이었던 6학년 1학기, 아마도 5월이었을 것이다. 담임이 엄마에게 ‘일일교사’로 오실 수 있는지 여쭤보라 했다. 별건 아니고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면 된다고 했다. 나는 과연 엄마가 할 수 있을지 미심쩍었지만 엄마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러마고 수락했다.
엄마와 부반장 엄마가 초빙됐다. 내가 괜히 두근거렸다. 드디어 엄마의 입이 열렸다.
“엄마들은 여러분이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것 외엔 바랄 게 없어요. … ”
엄마가 몇 마디를 덧붙였지만 동어반복으로 들렸다.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렀고 나도 덩달아 식은땀이 났다. 엄마는 대체 왜 잘하지도 못하는데 하겠다고 했는지 원망스러웠고 창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 타자인 부반장 엄마는 아이들을 웃게 만들면서 너무도 재미있게 제한시간 10분을 꽉 채웠기 때문이다. 너무도 선명한 대비에 철없던 난, 그날만큼은 그 엄마의 딸이 되고 싶었다.
다행히 위 사건은 엄마를 호출하는 일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열두 살 인생 최대 고뇌의 순간이었다. 나는 엄마가 내 억울함을 풀어주기엔 역부족이라고 진단했고, 내 의사와 무관하게 담임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 말없이 가방을 들어주며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중학교 2학년, 교정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엄마와 걸어갔던 그날도 그렇다.
학기 초 학부모 면담이 있는 날이었다. 말없이 걷던 엄마가 책가방이 무겁지 않냐며 내 가방을 들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엄마 키를 훌쩍 넘었을 텐데, 나는 그저 담임 선생님이 좋은 얘기를 해줬나 보다 생각하며 가방을 건넸다. 주변에 애들이 없는지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홀가분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그때 엄마가 들어준 건 책가방이 아니라 사춘기를 통과하던 당시의 무거웠던 마음이었다.
‘가세가 기울고 환경이 달라졌는데도 잘하고 있어, 고마워!’ 같은 말을 담고 있는 엄마의 다정한 손길. 한 번도 내게 직접 그런 말을 해준 적은 없지만 엄마의 사랑이 느껴진 날이었다. 힘들 땐 엄마에게 의지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 생각도 바뀐다. 더 이상 열두 살 아이가 아닌 난, 일일교사로 나선 그날의 엄마가 되어본다.
‘반장 엄마라고 해달라는데 딸을 생각해서라도 해야지. 그런데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잠이 다 안 오네….’
엄마는 그렇게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교탁 앞에 섰을 것이다. 140개의 눈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엄마는 저 뒷자리 나만 보였을 것이다.
사형제 여행을 하면서 그때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글쎄 엄마는 무슨 배짱으로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어. 참 대단해!”
“그 옛날 상경하겠다고 결심하신 거 보면 모르니?”
“맞다. 우리 엄만 그런 사람이지.”
엄마는 용감한 사람, 못 하겠다고 물러나지 않는 사람,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사람.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계시다.
병원에서 투석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할 때도 당신은 포기하지 않았고, 불치병이라는 욕창도 끝내 이겨내셨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을 관통할 때도 자식들에게 아프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우린 그저 당신의 신음소리로, 불안한 눈빛으로 당신의 상태를 진단해야 했다. 치매가 당신을 엄습해도 엄마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지난주, 요양원에서 엄마가 윙크하는 사진을 보내줬다. 시크한 엄마가 윙크를 다 하시다니, 역시 요양원 식구들의 기술은 뛰어나다. 사진 속 엄마가 웃는다. 한쪽 눈만 감아 보려 하지만 어느새 양쪽 눈이 다 감긴다. 원장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는지 한바탕 웃으시는 사진도 보인다. 엄마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셔서 다행이다. 이번 주에 만날 땐 잊지 말고 엄마에게 윙크해 달라고 졸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