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 스케치

아듀 2024!

by 데이지

파리에 다녀왔다, 이 시국에

출발을 앞둔 며칠 전, 갑작스러운 계엄령 선포 뉴스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통행금지, 유언비어 엄단, 불법 연행, 체포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혹시, 우리 여행 못 가는 것 아냐? 남들이 들을까 부끄러운 속엣말이 튀어나온 건 언론조차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잠시 후 관련 소식을 전해주겠다는 말만 거듭할 때였다. 머릿속으론 몇 달 전에 예약한 항공권과 취소 불가 숙박비 따위를 계산하고 있었다. 다행히 국회의 발 빠른 대처로 계엄령은 철회되었지만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는 현장을 파리에서 유튜브로 지켜봤다. 그리고 8년 전 12월 광화문 거리를 떠올렸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주변 호텔의 휘황한 불빛, 거리 행진에서 만난 겨울나무들…. 마치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나만 그 현장을 빠져나온 듯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남편 J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딸 S가 제안한 대로 회갑 기념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파리에 다녀온다고 했더니 시누이가, 오빠가 좋아하는 도시에 드디어 가느냐고 했단다. 내가 언제 얘기했던가? J의 반응에 시누이가 말해 주더란다. 고등학생 때 J가 장학퀴즈에 나간 적이 있는데, 인터뷰 중에 프랑스를 좋아한다고 파리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단다. J도 잊어버렸던 이야기를 시누이 덕에 알게 됐다. 본인이 기억하든 못하든, 사람의 말은 이토록 힘이 세다.


12월 파리는 춥다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진다. 8시 반쯤에 해가 뜨고 오후 4시가 넘으면 어둑해지므로 하루를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건 여행 가기 전에 숙지했다. 기온은 우리나라보다 높고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추웠다. 바람이 세찼고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거의 매일 비가 왔다. 그래도 가볍게 입을 날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챙긴 옷은 캐리어에 묻혔다. 여행 내내 후드티에 롱파카를 겹 입어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햇빛.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는 그 어느 것도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센강의 색깔이 이렇던가. 내가 본 모든 파리 이미지는 파란 하늘이 배경인데 이럴 수가 없었다. 왜 유럽 사람들이 여름이면 그리 일광욕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매치기가 제일 두려웠다

파리에 가기 전 소매치기 방지 크로스백을 살까 말까 고심했다. 칼로 베이지 않는 재질에 안전 잠금 지퍼 기능이 있다는. 파리에서 소매치기당한 블로그 포스팅을 워낙 많이 봐서인지 여느 여행과 달리 그게 제일 불안했다. 그러다 가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건 오버다 싶어 말았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소매치기에 조심하라는 우리나라 말 안내 방송이 나올 만큼 자주 일어나긴 하는 모양이다. 안전을 위해 백을 파카 안에 메기도 했고, 여행 끝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 카페가 그리웠다

파리에서 유서 깊은 카페 두 곳에 다녀왔다. 1686년 세계 최초의 카페로 문을 연 ‘르 프로코프’(Le Procope)와 헤밍웨이와 사르트르 등이 자주 찾았다는 ‘레 드 마고’(Les Deux Magots). 프랑스인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정치적 토론을 즐겨했다는 공간들이다.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카페라기보다는 레스토랑 분위기에 가깝다. 그런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인지 옆 좌석과의 간격이 20cm나 될까. 안쪽 자리에 앉으려면 테이블을 빼고 요령껏 잘 들어가야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안 들리기에 망정이지 프라이버시는 포기해야 한다.


파리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부드러웠지만 입맛이 쉬 변하진 않았다. 우연히 Noire라는 카페에 두 번 갔는데, 익숙한 카푸치노를 만나서 반가웠다. 하지만 의자는 불편했고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비를 피해 들어간 스타벅스는 사람들로 빼곡했고 화장실 줄은 엄청나게 길었다. 커피 맛을 떠나 우리 동네 조용한 카페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잊을 수 없는 바게트 맛

우리나라 빵집 파리바게트가 파리에도 몇 군데 있다. 시테섬 건너편 생 미셸 분수를 보고 골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봤다.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현지에서 꽤 인기 있다고 한다. 내가 처음 맛본 바게트도 아마 파리바게트에서 만든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숙소 근처 빵집에서 산 바게트를 맛보고 그동안 내가 먹은 건 바게트가 아니었다고 단정했다. 이른 저녁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바게트 하나만 달랑 사가는 걸 보고 나도 다음날 아침에 먹을까 싶어 샀는데 뜨끈했다. B랑 숙소로 오면서 뜯어먹는데 세상에 겉바속촉이란 바게트를 두고 한 말이 아니던가. 씹을수록 갓 뽑아낸 가래떡 맛이 나는 게 너무 맛있었다. 아마도 파리를 생각하면 이 바게트를 떠올릴 것 같다.


2024년의 행운

내 인생에 다시 이런 날들을 맞을 수 있을까. 3월에 그리스 여행, 7~8월에 미국/캐나다 여행에 이어 프랑스 파리까지. 작년 말 동네 친구들과 새해 계획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은퇴 후 원 없이 여행 다니고 싶어 했던 갈증이 이제야 좀 해소된 듯하다.


사실 여행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특히나 자유여행을 잘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세 차례 해외여행 모두 11~14시간 이상 비행해야 했으므로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루 몇십 분이라도 아파트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한 보람이 있었다.

은퇴가 준 장점이라면 스트레스에서 놓여나면서 정신 건강이 좋아졌다는 점과, 내 몸을 돌볼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인 것 같다. 먼 여행을 계획한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니는 게 정답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는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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