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다. 영어공책에 잉크를 찍어 펜으로 썼던 알파벳 글씨는 멋졌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영어에 대한 관심이 피어올랐다.
그 무렵이 아마도 우리집 형편이 가장 좋았을 때였을 것이다. 영어 선생님이 영어를 잘하려면 무조건 많이 듣고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 같다.
엄마에게 영어 교과서 본문이 수록된 카세트테이프를 사달라고 했다. 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 공부하겠다니 당연히 들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집을 다 풀거나 말거나 일단 새 학기에 참고서를 사서 모으듯이, 영어공부에도 ‘장비빨’이 중요하므로 그걸 손에 넣고 싶었다. 테이프를 반복해서 들으면 저절로 영어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건 음질이 구린 복사본이었다.
엄마가 외삼촌을 통해 알아보니 테이프 가격이 상상 이상으로 비쌌던 모양이다. 엄마는 “야, 똑같다더라…” 하면서 공테이프 같은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내밀었다.
근사한 박스에 척척 꽂혀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상상했으니 당연히 내 성에 찰 리 없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식 사라져 버렸다.
생각보다 밋밋한 구성이었으니 사실 정품을 사줬어도 아마 몇 번 듣다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핑곗거리가 생겼으므로 나는 영어 성적이 별로인 건 순전히 초반의 기세를 꺾은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저절로 되는 공부가 없을진대 영어 단어를 외우기가 싫었고, 문법을 공부하는 건 백 배쯤 싫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어찌어찌 따라갔지만, 대학교에 가니 형편없는 내 실력이 확연히 드러났다. 전공도서를 원서로 봐야 했는데, 생소한 전문용어들보다 바로바로 해석이 되지 않은 영어 문장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한때 큰 마음을 먹고 토플 강좌도 들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시작했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영어공부는 다른 해야 할 일들에 밀려났다.
몇 년 후 J와 데이트할 때, 대학교 1학년 때 영어 성적이 좋아서 교양영어 수업을 면제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콩깍지도 콩깍지였지만 그에 대해 호감이 더 생긴 건, 순전히 내 영어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도서관 평생학습 프로그램 중에 스페인어 강좌가 있다길래 서둘러 신청했다. 막 넷플릭스에서 <종이의 집>을 완주한 때였을 것이다. 외국어 하나를 배운다면 레벨 테스트가 필요 없는 새로운 언어가 좋겠다 싶던 차에 스페인어가 나타난 것이다.
3개월, 총 12회 수업 중에 여행 가느라 빼먹은 하루를 빼곤 성실하게 출석했다. 교재를 펼치고 복습도 하고, 기분 좋을 땐 예습도 했다. 그러나 책을 덮음과 동시에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문제다. 최소 6개월 과정은 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수강생이 하나둘 사라지고 선생님마저 멀리 이사 가는 바람에 스페인어 강좌는 중단됐다. 그렇게 내 학구열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2025년 올해 다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파리 여행 가기 전에 잠깐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듀오링고’ 앱에 스페인어 과정이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Hola! Yo soy~ 정도는 알고 있으니 가볍게 시작하기로 한다.
듀오링고의 장점은 캐릭터의 반응이다. 다섯 문제를 모두 맞히면 과하게 칭찬해 준다. 귀엽고 쿨하고 점잖은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말을 걸어주고 박수를 쳐준다. 이렇게까지 반복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내겐 안성맞춤이다. 무리하지 않게 매일 공부할 수 있으니 부담도 없다. 아직은 무료체험 중이라 한계가 있지만 지속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이니 큰 문제는 없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특별한 목표가 있나요? 몇 년 전 스페인어 선생님이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었다.
“스페인으로 여행 갔을 때 식당 메뉴판 정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내 목표는 소박하다. 내 회갑 이벤트로 계획하고 있는 스페인 여행 때 도움이 되는 정도면 된다. 그러려면 그때까지 계속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
갑자기 스페인어를 공부한다니 J가 말한다.
“영어 공부나 더 하지?”
그 말의 뉘앙스는 영어도 포기했는데 뭘 또 배우려 하느냐는 게 아닐까. 미처 뱉지 못한 그 말을 이미 눈치챈 나는 다짐한다. 기필코 스페인어를 배우고야 말겠다고.
브런치에도 썼으니 이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부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