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따뜻했던 자그레브 사람들

동유럽 여행기를 마치며

by 데이지

계획대로라면 이 글은 지난 2월 4일에 썼어야 했다. 체코(프라하, 체스키 크룸로프)~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 할슈타트, 빈)~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헝가리(부다페스트)~크로아티아(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자그레브)로 이어지는 동유럽 여행기의 마지막 회. 열여섯 편의 글을 마무리하려는 마음이 조급했을까. 글을 쓰러 카페로 향하던 그날, 눈이 쌓인 빙판길에서 넘어져 손목이 골절되는 바람에 이렇게 마냥 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끝낼 수 있어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아서….


두브로브니크에서 자그레브까지는 비행기로 이동했다. 자그레브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어떤 트램을 타야 하는지 몰라 정거장 앞에서 서성댈 때, 무거운 가방을 들어 올릴 때,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지 먼저 말을 걸어오곤 했다. 오랜만에 환대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진다. 만 이틀 머물 예정인 우리 숙소는 트램 정거장에서도 꽤 걸어 들어가야 했다. 여행 초기엔 부킹닷컴에서 호텔만 검색했는데 빈(Vien)에서 아파트형 숙소를 경험한 뒤부터 가성비 좋은 쪽을 선택하게 됐다. 공원과 학교를 지나 주택가 안쪽에 자리잡은 숙소 앞에서 주인과 만나 간단히 설명을 듣는다. 조용한 곳이라 잘 쉴 수 있을 거라 한다.


비행시간이 짧았는데도 피곤하다. 여행의 막바지인 데다, 두브로브니크 일정이 상대적으로 빡빡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슈퍼에 들러 요깃거리를 사고 내일 자그레브 시내 일정을 위해 쉬기로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김에 산책도 할 겸 빵을 사러 가기로 했다. 버스 종점 근처에 위치한 작은 빵집으로 가는 길. 낯설지 않은 풍경, 고즈넉한 길이 좋다.

J와 살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여행한 적이 있었던가. 둘이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무계획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여행의 맛을 알아갔다. J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그저 조용히 걷는다.


자그레브는 웬만한 곳은 트램으로 이동할 수 있어 편리하다. 제일 먼저 자그레브의 상징,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갔다. 트램에서 내리면 바로 반 요시프 옐라치치 동상이 보인다. 그는 184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당시, 크로아티아 독립을 위해 앞장서서 싸운 인물이라 한다. 수제 먹거리와 가방, 꽃 등을 파는 노점을 지나 광장 뒤편으로 향한다. <꽃보다 누나>에도 나왔던 돌라체 시장이 보인다. 본격 시장 구경을 하기에 앞서 노천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한다. 날씨가 좋아서 맥주도 한 잔 시킨다. 옆 테이블의 인상 좋은 아저씨가 한 잔 하고 계시길래 나도 덩달아 기분을 냈다. J가 한낮부터 술이냐고 한 마디 했지만 여긴 크로아티아가 아닌가. 여행자의 여유로움을 한껏 누려본다.


돌라체 시장은 실내도 꽤 넓다. 다음날 출국 예정이라 무언가를 살 순 없었지만 이곳저곳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느껴진다. 야외 시장은 빨간색 파라솔이 인상적이다. 새벽부터 열기 때문인지 벌써 파장 분위기이다.


자그레브에선 전혀 다른 느낌의 성당 두 곳을 만날 수 있다. 돌라체 시장과 인접한 곳. 시장 구경을 하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놀랍게도 자그레브 대성당과 성모승천상이 세워진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1095년부터 짓기 시작해 120여 년에 걸쳐 건축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차례 재건과 복원을 거치면서 원형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한다.

언덕길에 있는 성마르코 성당은 레고 블록을 연상시키는 지붕으로 유명하다. 거룩한 느낌보다 친근한 이미지여서인지 크로아티아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싶은 장소로 꼽는다고 한다. 성당을 배경으로 비슷비슷한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본다. 다행히 하늘이 푸르러서 좋다. 내부를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그레브에서 뭘 또 볼 수 있을까. 자그레브 출신 수집가 안테 토피치 미마라가 설립한 ‘미마라 박물관’에도 들렀지만 위작 논란이 있는 곳이라 샅샅이 들여다보진 않았다. 자그레브 대성당 등의 시내 전망을 볼 수 있다는 ‘자그레브 아이’도 굳이 들를 곳은 아니었다. 높은 건물에 위치한 카페에서 철망 사이로 보는 뷰는 감동적이지 않았다.


우린 둘라체 시장에서 시작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던 골목길들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 계단길과 햇빛이 머물러 있는 담벼락, 그림 같은 풍경의 레스토랑 마당, 익살스러운 벽화들에 눈길이 갔다.

언제 또 우리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시작할 땐 여행의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컸는데 함께 걸으면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무엇보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우리의 긴 일정이 무사히, 둘 다 아프지 않고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2018년 8월, 그리고 9월로 이어진 날들. 돌아보니 그때 우리는 꽤 젊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