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의 보석, 인정!
두브로브니크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스플리트에서 아침 일찍 페리를 타고 항구에 도착했는데 숙소 주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택시 승강장으로 갔는데 정말 부르는 게 값이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아, 여긴 진짜 관광지구나 생각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숙소 주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공항 갈 땐 자기가 태워 주겠단다. 너스레가 있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스위트 가이였네. 한마디 말에 생각지 못한 호의를 받았다.
두브로브니크에 가는데 성벽 길을 걷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데 우리 부부로 말할 것 같으면 계단이나 오르막 길을 싫어한다. 한때 남한산성 근처에 살았지만 성벽 길을 걷기보다 닭백숙을 먹으러 가곤 했다. 산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설악산도 케이블카 타고 권금성까지 오르는 게 전부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J는 몸이 무겁고 난 폐활량이 부족하다. 그래도 내가 조금 나은 편이라 J를 설득했다. 지금이 가장 젊은 날이다, 언제 다시 와서 여길 걸어 보겠냐, 일단 오르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성벽 위에서 보는 아드리 해의 풍광을 놓칠 순 없지 않냐….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두브로브니크 성벽으로 향했다. 꽤 서둘렀는데도 관광객들이 이미 많다. 필레 문을 출발해 드디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모든 성벽이 그렇듯 두브로브니크 성벽도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천천히 지어졌다 한다. 성벽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저 멀리 스르지산이 보이고, 성벽 안 스트라둔 거리가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남쪽으론 쪽빛 아드리 해가 펼쳐진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성벽은 붉게 타오르기도, 그늘 지기도 한다. 이곳에 오기 위해,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비행기와 페리를 타고 달려왔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르리아해의 보석’이란 수식어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성벽 길을 무사히 완주했으니 오늘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성 안으로 들어와 스트라둔 거리를 둘러보면 된다. 필레 관문 옆엔 14개의 익살스러운 얼굴 부조가 붙어 있는 오노프리오 분수가 있다. 사실 분수라기보다는 수도시설인데, 로마의 건축가 오노프리오가 12km 떨어진 강물을 끌어와 식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이 분수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바로 건너편엔 약국으로 유명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다. 인파를 피해 수도원 정원에 들어가 본다. 난 이런 장소를 참 좋아한다. 정원이 있는 고즈넉한 곳. 그냥 이곳에 머물러만 있어도 힐링이 될 것 같다. 이 수도원은 병을 낫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어쩌면 이 정원 덕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친김에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 전망대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여기에서 보는 뷰는 또 달랐다.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붉은 지붕의 구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젊은 친구들은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 배경 속 인물이 되어 본다. 부럽지만 다리가 덜덜 떨릴 것 같다. 난 스플리트에서 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안 찍던 셀카를 여러 장 찍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한다.
돌아가는 길이 아쉬워 두브로브니크 뷰포인트와 로브리예나츠 요새에도 올라갔다. 뷰 포인트다운 풍광에 감탄하고, 바닷속 깊은 곳까지 비칠 듯한 쪽빛 바다에 넋을 잃는다. 로브리예나츠 요새에서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 축제가 열린다니, 얼마나 환상적일까 싶다.
여행의 막바지에 접어드는데 챙겨 온 수영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자그레브에선 더더욱 힘들 것 같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지 싶었다. 숙소에서 가볍게 걸어갈 만한 곳에 라파드 비치가 있었다. 물은 차가웠지만 아드리아 해에 몸을 담가 본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낙조가 예쁜 곳이라니 가만히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 질 녘 풍경을 기다리기로 한다. 캔맥주를 챙겨 오길 잘했다. 서서히 노을이 진다. 집에 돌아가는 게 아쉬운지 아이들이 한 번 더를 외치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완벽한 하루였다. 아니, 완벽한 두브로브니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