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변경은 자유여행의 묘미
동유럽 3개국, 7박 9일! 시간과 효율을 생각한다면 패키지여행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그런데 우리에겐 24박 26일도 짧았다. 정말 며칠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싶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때문이었다.
프라하 in, 자그레브 out 항공권을 예약할 때만 해도 우리 여행은 체코-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까지였다. 그런데 그럴 때 꼭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언제 또 여길 와 보겠나….
결국 우리는 여행 막판에 두브로브니크에 가기로 일정을 바꿨다. 사실 ‘우리’라기보다는 내가 무척 가고 싶다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한 일정이 추가됐다. 우리가 조금 젊거나 시간이 넉넉했다면 작은 차를 빌려 구불구불한 해안길을 달리거나,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고려했겠지만 10시간 이상 모험을 하는 건 무리였다. 본격 크로아티아 여행을 구상하니 가보고 싶은 곳이 또 얼마나 많던지. 평소 트레킹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플리트비체의 환상적인 호수 빛깔이 아른거렸다.
결국 우리는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를 추가하기로 했다. 자그레브에서 스플리트까지는 비행기,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는 페리, 두브로브니크에서 자그레브까지는 다시 비행기로 이동하기로 최종 확정했다. 자그레브가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마치 맨 마지막 보석 상자가 남아 있는 듯해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부다페스트에서 자그레브까지는 FlixBus로 이동했다. 숙소는 공항 근처 개인 빌라. 버스 정류장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구글에 표시된 대로 버스가 정차하지 않는다. 결국 종점까지 가고 말았다. 다시 또 물어물어 다른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는 길. 불빛이라곤 휑뎅그렁한 대로변 마트에서만 빛나고 골목길엔 어둠이 내려앉았다.
벨을 누르니 주인집 딸이 나와 잠깐만 기다리라고,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총총 사라져 버린다. 잠깐 마주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사실 우린 공항 픽업이 가능한지 여부가 중요한 조건이었으므로 숙소 컨디션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지만 깔끔한 내부와 식탁 위에 놓인 웰컴과일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때론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 오래 남는다. J와 난, 가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두 모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숙소 주인 덕분에 다음날 아침 자그레브 공항까지 편하게 도착했다. 작은 비행기를 타고 스플리트로 향한다. 그야말로 어쩌다 스플리트. 이곳 역시 다음날 아침 일찍 두브로브니크행 페리를 타야 하므로 항구와 가까운 숙소를 선택했다. 거리는 가까운 듯한데 공항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가려니 힘에 부친다.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짐만 던져놓고 올드타운으로 향한다.
멀리에서부터 그레고리우스 닌 주교 동상이 보인다. 크로아티아어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투쟁했던 주교라 크로아티아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라 한다. 골든 게이트를 지나니 식당들이 보인다. 실내 디자인이 예쁜 피자집에 들어갔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는데 그제야 숨을 돌린다. 차양처럼 드리워진 포도 넝쿨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익숙한 듯 그들은 그리 놀라지 않는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겠노라고 마음먹고 10년에 걸쳐 궁전을 짓는다. 생각보다 일찍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6년밖에 누리지 못했다 하나, 자신의 바람대로 건물을 디자인하고, 무엇을 갖다 놓을까 구상하고, 어떤 식물들을 심을까 고심하였을 터이니 누릴 만큼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열주 광장이 맞이하고 황제의 거주 공간이었던 아파트의 천장은 구멍이 뚫려 있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궁전 옆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성 돔니우스를 위해 지은 성당이 있다. 황제의 무덤이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영원할 것 같은 황제의 영화가 한순간이듯, 궁전 외곽은 폐허 같이 쓸쓸하다. 그럼에도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또 그 역사적인 공간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숙소 근처 야시장에서 리본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샀다.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여행지에선 가끔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한다. 여행 막바지이지만 두브로브니크의 강렬한 햇살은 선글라스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J가 골라줬는데 마음에 든다.
저녁은 숙소 근처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먹기로 했다. 옆 테이블엔 노부부가 앉아 있다. 어쩌다 대화 내용이 들렸다. 우리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다이어트를 하는 모양이야, 나눠 먹네…. 그러다 음식이 나오자 너무 맛있다며 온갖 감탄사를 연발한다. 할머니의 저 소녀 감성은 어떻게 장착할 수 있을까. 별개 다 부러워진다.
여행이 뭐 별 거인가 싶다. 이렇게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웃고, 달빛 아래 이야기 나누면 되는 거지. 스플리트에서 만난 노부부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그렇게 여유롭게 늙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