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비로소 행복한 얼굴이 된다
하와이 가서 뭐 하지?
우린 호놀룰루 호텔만 예약했을 뿐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내가 경험한 해외여행은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 관람이 필수 코스 아니던가. 돈 들이는 여행은 뭔가 지적인 것이 충족돼야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심심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떠나기 전에 S에게 얘기했더니 엄마, 치앙마이 갔을 때도 우린 그냥 쉬다 왔는데? 그런다. 아, 그랬나? 생각해 보니 택시로 도이수텝 다녀온 것 말고 우린 주로 시내에서 어슬렁거렸던 것 같다. 퇴직한 이후 꿈에 그리던 첫 해외여행이라 떠나기 전부터 설렜고, 동생이랑 딸이랑 이 조합으론 처음 다녀온 여행이라 색다른 추억으로 남아 있다. 치앙마이 여행처럼 이번 하와이 여행도 힐링이 콘셉트라는 거지? 오케이!!
하와이의 공기
하와이에 관심을 가진 건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은 다음이었던 것 같다. 작품을 끝내고 우연히 갔던 하와이에서 제대로 힐링을 경험했다는데, 대체 어떤 곳이길래 틈만 나면 찾아가고 싶은지 그의 하와이 예찬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가 강조한 건 ‘걷기’였을 텐데 난 ‘하와이’에 꽂혔다.
도착하자마다 걷기만 한다는 하정우를 따라 할 순 없지만 하와이에 도착하면 아침마다 산책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한데 어찌나 잠을 푹 잤는지, 일어나면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강한 햇살을 받으며 걷기는 무리이니 포기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우린 맛집 찾기에 진심인지라 걸어야 할 땐 또 열심히 걸었다. 햇빛은 강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나무 그늘에만 들어서면 신기하게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다. 언젠가부터 내 갤러리 폴더에 나무 사진이 많아졌다. 난 오래오래 뿌리를 내린 나무들을 볼 때마다 그 놀라운 생명력과 하늘 향해 쑥쑥 가지를 뻗어간 그 모습이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다 쑥, 동물원 근처에서 고개를 내민 기린 선생도 만났다.
2주 차에 머문 하얏트 센트릭 와이키키비치는 산책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호텔에서 나와 오른쪽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바닷가와 나란한 길이 나온다. 그 해변 길을 따라 죽 걷기만 하니 길치여도 다녀올 만하다. 어느 날 아침, 큰 맘을 먹고 혼자 산책하러 나왔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후회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이른 아침의 공기는 청량하다.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으니 며칠 전에 갔던 다이아몬드헤드까지도 거뜬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해변엔 서퍼들뿐 아니라 태양이 뜨거워지기 전에 수영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와이 아침 날씨는 변덕스럽다. 비가 내리지만 잠깐 피하고 있으면 곧 그친다. 비 온 뒤의 세상은 더 선명하다. 덤으로 무지개도 한 번씩 나타난다.
혼자 하는 산책은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다. 매일 줄어드는 날짜가 안타깝다. 이런 걸 스며든다고 표현하던가. 어느새 하와이가 좋아졌다.
길어 봐야 40~50분 걸었을 텐데 벌써 출출하다는 신호가 온다. 돌아오는 길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 도넛 집에 가서 기본도넛 몇 개를 샀다. 잉? 유명한 하와이 도넛인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데? 며칠 뒤 우린 제대로 된 하와이 도넛을 만났다. 레오나즈 베이커리의 도넛은 기대했던 맛이었다. 일부러 굳이 찾아갈 만큼.
하와이의 바다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날. 여느 때처럼 해지기 전, 5시 넘어서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한다. 다들 수영복은 챙겨 입었는데 바다엔 안 들어가겠단다.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해변에서 책 읽는 게 더 좋아서, 바닷물이 차서…. 그렇담 나 혼자 간다~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 바다에 안 들어갈 수 있어?
수영도 못 하는데 바다에 몸을 담그고 파도에 이리저리 밀려 떠다니는 게 재밌었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바닷물이 나를 감싸 주는 듯한 기분, 너무도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킥판에 기대어 이번 여행을 돌아본다.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기분이다. 내가 무슨 복을 받아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더 겸손해져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고해성사가 따로 없다.
내 옆엔 서핑을 처음 배우는 딸과,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아빠가 있다. 아이는 여덟살 쯤 됐을까. 꼬마 친구는 몸의 균형을 잃고 자꾸만 물속으로 고꾸라진다. 그래도 아빤 계속해서 응원해 준다. 잘하고 있어, 이번엔 이렇게 해봐.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자세가 점점 균형을 잡아간다.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 서핑 보드에서 잠깐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다리가 덜덜 떨린다. 다시 첨벙. 그래도 감을 잡은 모양이다. 아이가 미소를 짓는다. 그러길 몇 차례. 드디어 짠, 서핑보드에 제대로 섰다. 두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나도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속으로 응원한다. 우린 저맘 때 자전거를 가르치는데 얘는 서핑을 배우네. 저 아이는 아마도 와이키키 해변의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입술이 파래지도록 혼자 놀았다. 바다에서 나오니 다들 수건을 건넨다. 괜찮냐고 묻는다. 그때 내 상태를 뒤늦게 사진을 보고야 알았다. 추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그래도 좋았다. 완벽하리만큼 행복한 마지막 날이었다.
하와이의 하늘
하와이의 하늘은 그냥 파란색이 아니다. 며칠 머물다 보면 알게 된다. 파스텔 톤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같기도 한, 분홍과 하늘색의 컬래버가 기가 막히다. 나는 쨍한 날씨보다 이 하늘이 나타날 때 더 기분이 좋아졌다.
하와이에선 모두 일몰을 기다린다. 해질 무렵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서핑을 하던 사람들도, 마지막까지 수영을 즐기던 이들도 시간이 되면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매일 뜨고 지는 해건만 일몰 즈음의 하늘은 더 없이 강렬하다. 내 옆에 선 동생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S가 그 표정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는다. 우리 자매의 표정이 더없이 밝다.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진 듯한 순수한 모습. 우린 여행지에서 비로소 행복한 얼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