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추억여행(1)

30년 전 그 아파트

by 데이지

“여행 한번 가자.”

국내여행을 선호하는 J는 몇 달 전부터 놀러 가자고 졸랐다. 반면, 수영 강습에 하루도 빠지고 싶지 않은 나는 시큰둥했다.

사실 말을 꺼내는 건 J지만 여행의 성사 여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다. 역할 분담상 숙소 예약 등은 내 몫이기 때문이다. 결혼기념일 즈음해서 가을여행을 다녀오자는데 그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꾀를 좀 냈다. 예전에 가봤던 데로 가볍게 2박 3일 정도 다녀오자, 어차피 엄마 뵈러 올라갈 테니 그때 움직이기로 하자.


우리가 추억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더니, 딸 S도 예전에 살던 동네에 한번 가보고 싶단다. 그래서 지난 주말, 셋이서 N시에 다녀왔다.

S가 두 살 때 이사와서 일곱 살 되던 해까지 머물렀던 공간. 다섯 살 터울 동생이 생기기까지 엄마아빠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시절.


결혼하고 다세대 주택에 살다가 들어간 Y아파트는 꿈의 공간이었다. 둘이서 가진 돈을 다 털고 S 돌잔치 때 들어온 금반지까지 팔아 장만한 전셋집이었다. 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언덕바지에 있던 아파트. 아이 엄마였지만 난 고작 스물여덟 살이었다. 출산 후 아이를 돌보는 일은 처음이라 미숙하기만 했고 집안에 갇혀 있다시피 한 하루는 갑갑했다.


S가 기저귀를 떼고 의사표현을 할 때가 되자 난 놀이방에 아이를 맡기고 학원에라도 나가겠다고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닥쳐올 변화를 감지한다. 출근 시작과 동시에 S가 아팠고, 나는 J와 대판 싸웠다. 이 사람 입에서 “때려치우라!”는 말이 나올 줄 몰랐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을진대 내가 시작한 일을 이렇게 하찮게 생각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구석진 동네에서 버스 타고 40~50분 걸리는 학원까지 일하러 다녔다. 다른 엄마보다 늦게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S가 마음에 걸렸지만 다행히 잘 적응했다.


Y아파트엔 S와의 추억이 가득하다. 덩그러니 아파트만 몇 동 있던 곳이라 소아과라도 가려면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버스에서 조잘조잘 얘기하는 S를 보고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느냐고 칭찬해 줬던 할머니 얘기에 아이보다 더 으쓱했던 기억, 유난히 이야기를 좋아하는 S에게 아파트 뒷산에 호랑이가 산다고 한껏 무서운 목소리로 속삭였던 날들, 기나긴 아파트 복도를 따라 또래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다 우리 집에 와선 거실 가득 레고 블록을 쏟아놓고 놀던 풍경, 아이들 노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늘 호통치던 아래층 할아버지의 대책 없는 푸념, 눈이 펑펑 오던 날 두텁게 쌓인 놀이터 눈밭에 S를 넘어뜨리고 천사 포즈를 하게 했던 날, 비 오는 날 아빠랑 놀이방 가는 길에 미끄러져 울었다던 언덕길, 우리보다 더 높이 있는 아파트에 야채 과일 등을 파는 트럭이 올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 정월 대보름 달을 보며 천사 소녀 네티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아이의 간절한 목소리….


Y아파트로 가는 길. 띄엄띄엄 공장이 있던 공단은 아파트형 공장 같은 거대한 건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래, 여기가 버스 정류장이었어, 진입로가 이렇게 좁았나, 여기서 엄마들이랑 유치원 차를 기다렸지,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아파트 마당에 주차하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바로 옆 아파트는 재건축에 들어가는지 출입금지 바리케이드가 쳐 있고, 버리고 간 세간들이 마당에 잔뜩 쌓여 있다. S가 다녔던 놀이방도 그 아파트 상가 건물인데, 조금 늦게 왔더라면 알아보지도 못할 뻔했다.


Y아파트로 돌아와 우리가 살았던 3층까지 조용히 올라가 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왼쪽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첫 번째 집. 복도 앞에서 S에게 포즈를 취해 보라고 하고 사진을 찍는다. ‘콩이’란 이름을 가진 인형을 안고 있는 어린 S가 겹쳐 보인다. 복도 옆 계단을 지날 땐, 자전거를 더 타겠다는 아이를 기다려주지 못한, 한없이 후회스러운 그날이 떠오른다. 네 맘대로 하라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으앙! 복도 가득 울려 퍼지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가슴 아프게도 S 이마엔 흉터가 생겼고, 미안한 마음은 내내 남았다.


S가 가고픈 또 하나의 추억의 장소는 그 시절 우리가 자주 갔던 호수공원이다. 여긴 S가 동생과 함께 놀던 공간이다. Y아파트에서 주공아파트로 이사 간 뒤 자주 나들이 왔던 곳이다. 번지점프장이 있던 건물은 철거됐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린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그때를 떠올린다. 저쪽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었던 것 같아, 그때도 이렇게 큰 물고기가 있었나, 둘씩 짝을 지어 배드민턴도 쳤어, 동네 친구랑 같이 왔다가 그 애 동생 잃어버릴 뻔했잖아…. 그날의 기억들이 이렇게 생생한데 이십여 년이 훌쩍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바삐 움직였지만 토요일 저녁이라 여기저기 길이 막힌다. 일찌감치 재건축에 들어가 우리가 살던 흔적을 볼 수 없는 옛 주공아파트 부근인가 보다. 너무도 생경한 고층아파트 블록이 저만치 보인다. S가 묻는다. “저기야? 헐!”

모두가 의아했던 선택을 하며 탈수도권을 감행한 우리 부부는 대책 없는 아웃사이더였다. 다시 올라올 수 없다는 현실은 때로 씁쓸하다. 만약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그때도 똑같은 결정을 할까.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추억 여행의 끝에 부질없는 생각들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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