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들어낸 인연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가 이 문장에 공감했다.
그날 그 우연이 없었다면 J와 난 계속 만났을까.
1989년 5월이었던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는 않는다. J와는 C선배 소개로 그냥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정도였다. 진중한 사람이라는 인상, 하지만 너무도 선배 같기에 별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날 헤어지면서 J는 내게 언제 한번 술 한 잔 사라 했다.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그냥 의례적인 말이라고 생각하고 난 잊어버렸다.
그런데 몇 주 후 신촌 버스정류장에서 J와 ‘우연히’ 맞닥뜨렸다. 일본어를 배울 때라 아침 강의 듣고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그날따라 사무실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안 왔나 보다.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렸는데 정류장 앞에 그가 서 있었다. 둘 다 당황했지만 J는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내게 언제 술 살 거냐고 물었다.
“술이요? 아….”
내 의사와 무관하게 술 약속을 잡은 J는 그 우연을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연유가 어찌 됐든 그러마고 한 약속 때문에, 차 한 잔 얻어먹었으니 그러지 뭐 하는 마음으로, 아니 내가 너무 순진해서 또 한 번 만났다. 그리고 그놈의 술 때문인지, 첫인상과 다르게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사실 우연이 그날 단 한 번 뿐이었던 건 아니다. J와 난 둘 다 소개팅 같은 걸 원치 않았다. J와 친구인 C선배로부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굳이,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J가 나타났다. A선배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J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친구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서점에서 우연히 J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날 그가 과외 알바를 취소하면서까지 내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면…. 결국 J한테 연락이 왔고, 여러 차례 우연 끝에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때의 J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 역시 그에게도 같은 느낌이겠지. 서른네 번째를 맞는 결혼기념일에 별다른 감흥이 있을 리 없지만, 핑계 삼아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둘이서요? 아우, 그러고 보니 우린 둘이서 여행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네. 생각만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요.”
동갑내기 수영 친구가 여행 다녀왔다는 말에 고개를 내젓는다. 나도 그랬다. 동유럽 여행을 다녀오기 전만 해도 둘이서 하는 여행은 재미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나름의 편안함이 있다. 물론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딸과 함께 한나절 추억여행을 마친 다음날, 우리를 배웅하며 한마디 한다.
“싸우지 말고, 잘 다녀와!”
이제 아이에게 이런 잔소리를 듣는 나이가 됐다. 반성하지만 우린 여전히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으르렁댄다.
2박 3일 여행이라 가벼운 드라이브 정도이다. 일요일 낮 서울의 복잡한 도심을 통과한다. 내부순환도로를 달린 건 얼마 만일까. 가는 길에 양평 두물머리에 들르기로 했다. 스포티파이에서 J가 좋아하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려준다. 이 가삿말은 언제 들어도 좋다.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J는 친구와 한번 와본 적 있다는데 난 처음이다. 주차가 가능하다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연잎가루가 들어 있다는 핫도그도 사 먹었다. 조금 흐린 날이라 두물머리 풍경이 오히려 더 좋았다. 덩달아 J도 기분 좋아 한다.
숙소인 홍천 비발디파크는 스키시즌이 아니라 조용하다. 우리가 묵은 호텔동도 맘에 든다. 반려 인구가 많아선지 반려견 동반 숙소동도 따로 있다. 저녁에 산책할 때 보니 강아지 운동장에 사람이 가장 많았다.
애들과 함께 콘도로 여행 갔던 시절들을 떠올린다. 평소에 안 가던 노래방도 가고 이웃 가족과 볼링도 쳤던 기억들. 빠지지 않고 먹었던 삼겹살, 저녁의 야식 사발면….
다음날, 수영장 가는 여느 날처럼 일찍 깼다. 조용히 일어나 아침 산책을 한다.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춥지만 이 시간이 참 좋다.
체크아웃하고 양평 용문사에 가기로 했다. 여길 와 봤던가. 양평 콘도에 몇 번 묵었으니 갔을 법한데 기억나지 않는다. 천년 하고도 백 년을 더 살아낸 은행나무의 이파리는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았다. 이거 보러 다들 올라왔을 텐데 어떤 아저씨가 냄새난다고 진저리를 친다. 저 생명력에 찬사를 보낼 것이지, 괜히 은행나무가 저 불평을 들을까 싶다.
주차장 근처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고 스타벅스 더양평 DT점에 갔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입지에 공을 들여 설계한 디자인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월요일 오후라 사람이 많지 않아 좋다. 특히 사일런스 룸은 파격이었다. 멍하니 앉아 음악만 듣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커피를 마시고 각자 책을 읽고. 일상처럼 여유로운 여행이어서 좋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저녁엔 양평해장국을 먹으러 나갔다 왔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가성비 호텔이라서 예약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좀 불편하다. 다음날 아침에도 여지없이 일찍 깼는데 숙소에만 있자니 갑갑하다. 그래도 집밥 같은 조식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체크아웃하고 여주 신륵사로 향했다. 결혼하기 전에 한 번 왔던 곳인데 강월헌에서 본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아쉽게도 그때의 풍광은 찾아보기 힘들다. 반듯하게 정비된 남한강변과 보행자용 출렁다리, 그리고 저 멀리 호텔인 듯한 건물 때문에 아쉽게도 그날 아름답던 노을 풍경이 연상되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시몬스 테라스에 들르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에선가 초록초록한 마당에 띄엄띄엄 놓인 소파 이미지가 인상적이어서 지도맵에 표시해 두었었다. 조금 쌀쌀해도 그 마당에 머무르려 했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느라 들어갈 수 없었다. 브랜드 이미지에 맞게 아메리칸 스타일의 카페와 그로서리 스토어가 있다. 카페인이 필요했던 터라 커피를 마시고 핫도그도 먹었다. 이른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익살스러운 캐릭터들을 보니 다시 아이들 생각이 난다. 한때는 좋은 장소에 가면 애들이랑 오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제 그 아이들이 우리를 챙긴다.
J에겐 다소 싱거운 가을여행이었을 것이다. 뭔가 역사유적이 많은 곳에 가야 여행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느 도시를 가든 박물관부터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카페, 공간들도 불평하지 않고 동행하니 많이 변했다 싶다. 이 글을 보진 않겠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노력하도록! 우린 수많은 우연 끝에 만난 소중한 인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