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파리의 추억
“여보, 요즘 유로화가 얼만지 알아? 지금 보니까 엄청나게 올랐네.”
“그래? 우리 작년에 파리 다녀오길 잘했다.“
“당신 내년에 스페인 여행 가고 싶다면서? 거기도 유로화 쓰잖아.”
“…….”
내년 일은 모르겠고 아무튼 여행은 가고 싶을 때 가는 게 맞다고 늘 생각한다.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중에’라고 미룬 순간 다시 그 주제로 돌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갑자기 파리 여행 이야기를 쓰는 건, 순전히 날씨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 겨울비가 내릴 땐 센강 유람선 바토무슈를 타러 갔던 그날이 생각났고,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질 땐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마셨던 뱅쇼가 생각났다. 파리 여행 내내 날씨가 왜 이러냐고 투덜댔는데 추억이 윤색되니 그게 또 다른 매력으로 남아 있다.
파리 여행을 가기 전에 브런치에 저장한 글이 있었다. 보통 브런치 글 쓸 때처럼 몇 시간씩 집중할 시간이 없을 테니 하루 일정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올려 보자고 마음먹었던 것 같은데, 역시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 매일 한 장면, 파리
프랑스 파리에 가기로 했다. 회갑을 맞은 남편 J와, 그 어려운 효도관광에 동행한 딸 S, 이렇게 셋이 떠난다. 비교적 일찍 항공권을 예약했으나 늘 그렇듯 딱히 여행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 여행의 주인공은 J이므로 난 마음 편히 동행하기만 하면 된다. S는 간단한 대화라도 해보겠다고 듀오링고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난 집에 있는 미술 책을 꺼내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의 주요 소장 작품이 뭔지 다시 한번 뒤적여봤을 뿐이다.
우린 베리사이유 궁전을 다녀오는 것 말고는 2주 내내 파리 시내에만 머물기로 했다. J가 바라는 대로 주요 테마는 아마도 박물관/미술관 투어가 될 것이다. 일정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기다 올 것이다. 사실 S와 난, 아무 계획이 없는 날 실행할 플랜 B를 은근히 기대한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가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이번 여행의 브런치 스토리 계획은 실시간 업데이트이다. 되도록 매일, 그날의 한 장면을 엄선해 짧은 느낌을 남기고 싶다. 매번 지난 여행을 되돌아보며 억지로 기억을 짜내야 했던 고독한 글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찌 보면 세세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왔다 간 흔적 정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볍게, 인상적으로 하루를 기억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터이므로….
지금 다시 옮기고 보니 부끄럽다. 아, 이렇게 생각한 대로 실행했으면 14컷의 사진과 짧은 이야기가 남았을 텐데. 부질없는 후회를 하며 마트에 간 김에 뱅쇼를 만들 와인을 집어든다. 작년에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두어 번 뱅쇼를 만들었다. 말린 과일과 계피, 정향 등이 담긴 뱅쇼 키트를 넣고 끓여주면 되니 아주 간단하다. 설탕량도 조절할 수 있으니 제법 맛도 괜찮다.
올해도 뱅쇼를 마시면 파리의 추억이 생각날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 뛸르히 가든, 노트르담 성당 근처의 크리스마스 마켓들, 페르라세즈 묘지 근처 카페, 그리고 크고 작은 레스토랑에서 맛본 뱅쇼의 맛은 모두 달랐지만 추위를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뜨거웠기에 언제나 좋았다.
여행은 이렇게 툭 일상을 치고 나와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기억은 헷갈릴 만큼 한꺼번에 많이 보았던 예술 작품보다 맛과 향기, 그날의 분위기로 먹었던 음식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음엔 또 어떤 맛이 날 추억 여행으로 이끌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