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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리리산책 Feb 25. 2021

매일 열 자루의 연필을 깎던 시간

완벽하게 깎을 수는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매일 연필 열 자루씩 깎던 때가 있었다. 연필심이 뭉뚝해진 것이 많은 날이면 오늘 우리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다. 밤마다 다음 날 사용할 연필 다섯 자루씩, 두 아이의 연필 열 자루를 직접 손으로 깎는 것은 꽤 시간도 걸리고 성가신 일이기도 하다. 자동 연필깎기에 넣고 드르륵 깎으면 될 것을, 자처한 고생이다.




 
거실에 신문지를 넓게 펴고 카터칼을 드르륵 밀어 올려 칼날을 확인한 다음, 서걱서걱 연필을 깎는다. 40년 전의 우리 집 저녁 풍경이기도 하다. 비록 반자동이었지만 그때도 연필깎기가 있었다. 친구들 집집마다 반짝이는 은색 기차가 한 대씩 있었고, 그 연필깎기는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날렵하게 연필을 깎아내었다. 우리 부모님은 다른 학용품 구입에 대해서는 아낌이 없으셨지만 무슨 이유였는지 연필깎기만은 사주지 않으셨다. 매일 저녁 두 분 중 조금 더 한가로우신 분이 우리 자매들의 연필을 모아 직접 깎아주셨다. 부모님께서 깎아주시는 연필은 은색 기차가 단 몇 초 만에 만들어내는 연필에 비해 투박했다. 깎아진 면적도 넓었고 연필심도 길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세련되고 뾰족하게 깎인 친구들의 연필을 흘끔거리며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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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 새 학기의 3월이 되면 조금 더 특별하게 연필을 떠올린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전 날밤,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했던 것도 바로 연필을 깎는 일이었다. 나도 부모님처럼 손수 연필을 깎아주고 싶었다. 그때는 내 연필이 볼품없다고 느껴졌지만, 결국 부모가 된 나는 내 연필에 담겼던 정성스런 시간들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첫째 아이가 작고 오동통한 손으로 이 연필을 쥐고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생각을 하니 코끝이 시큰해졌던 것도 같다. 그렇게 매일 밤 연필을 깎았다. 오늘은 필기를 유난히 많이 했네, 오늘은 부러진 연필이 많은 걸 보니 책상에서 여러 번 떨어뜨렸나 보네, 수업시간에 산만했었나 등, 보지 못한 아이의 학교 생활을 추측해 보기도 했다.
 


아이도 자신의 연필 모양이 친구들 것과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기한 일은 아이는 내가 직접 깎아주는 연필을 좋아했다. 비슷비슷한 연필들 속에 엄마가 손으로 깎은 연필은 독보적이었고, 잃어버려도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친구들이 우리 아이 연필을 빌려 썼다. 연필심이 길어서 오래 쓸 수 있고 잘 써진다고 했다. 질이 좋지 않은 중국산 연필은 연필깎기로 깎으면 흑심이 골고루 깎이지 않기도 하고, 간혹 안에서 흑심이 부러져있기도 했다. 질이 안 좋은 연필을 손으로 깎다 보면 흑심이 계속 부러져 새 연필이 반 토막 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으니.



손수 깎았던 연필



아이 학교는 입학 후 어문 시간에 쓰기 연습을 많이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바둑판 모양 어문 공책에 마치 인쇄한 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글자를 써야 했다. 획 하나와 점 하나에 따라 글자가 달라지는 중국어는 기본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전학 이야기가 나올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1학년 어문 수업시간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들게 해 온 숙제를 지우개로 다 지우고 있는 학생들이 늘 몇 명은 있었다. 글자를 또박또박 쓰지 않은 학생에게는 그렇게 지우고 다시 쓰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필은 중요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집필량을 그날 사용한 연필 개수로 가늠했다고 한다. 그의 일기에서 “오늘도 연필 여덟 자루를 해치웠다”라는 대목이 있다. 우리 아이들도 매일 다섯 자루의 연필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꼭꼭 눌러쓰며 배움도 단단해지고 성장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학년이 올라가 샤프와 볼펜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연필은 우리 집에서 매우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 감히 연필깎기에게 맡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몇 년 전에 ‘연필 깎기의 정석(저자 데이비드 리스)’ 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연필을 깎는 평범한 행위를 장인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신의 연필을 깎아달라고 35달러를 기꺼이 지불할 정도이다. 그는 연필을 깎는다는 것을 인생과 비유했다.
“연필 깎기가 그렇듯 살다 보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고 그럴 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 깎으면 되며 완벽하게 깎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 집에는 굴러다니는 연필이 몇 자루 있다. 연필을 깎을 수 있는 카터칼도 늘 그 자리에 꽂혀 있다. 뚜껑만 열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의 편리함도 종종 누리지만, 가끔씩 아끼는 책을 읽으며 줄도 긋고 내 생각을 끄적이고 싶을 때는 연필이 제격이다. 연필로 삐뚤삐뚤하게 줄이 그어진 그 문장들은 누추한 내 인생을 위로한다. 완벽하게 깎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지는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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