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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리산책 Oct 23. 2021

엄마 사용법

엄마를 탈탈 터는 것도 요령이 필요해



오랜만에 와이탄에 방문한 날이다. 둘째 아이 중국어 수업 과제를 위해서였다. 상하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관광지 한 곳을 정해 팸플릿을 만드는 숙제였다. 아이는 와이탄에 있는 백 년이 넘었다는 다리인 외백도교外白渡橋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던 터라 따라나서는 나도 절로 관광객 모드가 되었다.


와이탄 북쪽 끝에 있는 짧은 철제 다리였다. 요즘 건설되는 다리에 비해 규모도 초라하고 구조도 투박하지만 백 년 이상을 꿋꿋하게 서 있었던 쨍쨍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안개까지 자욱해서 판타지 영화 속 장면 같기도 했다.



1907년에 지어진 외백도교



“엄마, 이 다리를 보니 무슨 생각이 들어요?”

“철제로 지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튼튼하네.”

“다리를 본 느낌 같은 건요?”

“글쎄... 별 느낌 없는데....”

“엄마 작가였잖아요. 표현을 잘하잖아요. 생각해봐요.”

“(살짝 우쭐모드가 되어) ...... 다리 위에  있으니까    그때에  있는  같고, 다리 너머 보이는 푸동은 미래 도시 모습 같아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타임슬립 느낌?

“와~~ 역시 엄마는 달라~~ 그리고 또 계속 이야기해봐요.”


아이의 손이 바쁘다. 내가 하는 말을 다 적고 있었던 것이다.


“너! 이러려고 나 여기 데리고 온 거지!!!”


낚였다. 느낌이나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둘째 아이는 늘 나를 이렇게 써먹는다. 아이의 우쭈쭈에 정신줄 놓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풀다 보면 아이는 그것을 홀라당 가져가 써먹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아이의 외백도교 설명 팸플릿




최근에도 당했다. 아이는 영어 수업 과제로 공포 소설을 써 가야 한다고 했다. 공포물이나 좀비물은 무조건 패스하고 안 보는 엄마라 아이는 접근법을 좀 더 연구한 것 같다. 사람들의 취향이 있는데 모든 학생에게 공포 소설 창작 숙제를 내 준 것은 너무 하다고 운을 띄웠다. (혹시 학생 취향이 아니라 네 엄마 취향에 안 맞는 건 아니고?)


“그렇지, 그렇지, 나 같아도 공포 소설은 쓰기 싫어. 쓰다가 내가 무서워지잖아. 몇 가지 장르를 주고 그중에서 선택하게 하면 좋을 텐데.”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AI가 주인공이 되었고,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면 좋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하고 있었다.



엄마 작가였잖아, 엄마 기자였잖아, 하면서 아이들이 다가올 때면 긴장을 한다. 내 영혼을 탈탈 털러 오는 것이다. 내 아이디어는 저작권 운운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도용당한다. 착취당하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 이번에는 안 당해야지, 정신줄 꽁꽁 붙들고 있자, 스스로 하라고 할 거야, 하고 방어를 하고 있다가도 “엄마가 하면 뭔가 다르다니까요~~ ", “역시 엄마가 상상력이 풍부해~~”, “이런 생각을 나는 왜 못했지?”, 등등의 우쭈쭈 달달구리 칭찬 폭탄이 쏟아지면 그냥 무너지고 만다. 칭찬은 엄마의 입을 열게 한다.



누굴 탓하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내 글짓기 숙제는 아빠가 다 해주셨다. 나는 글짓기를 너무 싫어해서 글짓기 숙제가 있는 날이면 아빠가 퇴근하시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던 아이였다. 아빠가 불러주시는 것을 원고지에 받아 적어가면, 내 숙제는 다음 날 교실 뒤에 전시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내가 우리 아빠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니.



“엄마~~ 엄마 기자였잖아~~”

이번에는 큰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찾는다. 향수鄕愁에 대해 인터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한다. 인터뷰 질문을 한 번 봐 달라고 하더니, 내친김에 인터뷰이까지 되어 달란다. 그래, 또 해보자. 탈탈 털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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