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일
'작은 나'의 일기장
2025년 2월 2일
'큰 나'의 일기장
좁쌀만 한 마음도 목소리가 커지는 시기다. 새해 말이다. 마흔에 가까워지니 쪼글쪼글하게 어딘가에 끼여 있던 걱정, 시기, 동경, 계획은 물론이고, 까면 바로 보일 나이, 통장, 체력, 뱃살 등 실체적인 것도 ‘내 입장 먼저 들어보라’며 아우성이다. 이 소리에 느슨하게 한 동공으로 훌훌 보던 숏폼과 게시글도 달리 보인다. 얘네 왜 이렇게 잘해? 이 사람 뭔데 이렇게 예뻐? 여기는 또 어디야? 다들 진짜 부지런하게 산다. 어라, 나는 이렇게 있어도 되나? 누가 콘텐츠를 소비하지 말고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한 것 같은데. 지금 다들 달리고 있는데 나만 퍼질러 앉아 있는 거 아닌가…. 뚜둥…!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자칫 정신이 팔려 그것에 눈을 돌렸다가는 이렇듯 하루가 후회와 번민과 자책으로 얼룩지기 십상이다. 오늘만 툴툴대면 다행이지, 그것이 어제를 침범하고 지난날로 스며 들어가면 속절없다. 와, 나 너무 느슨하게 살았네? 아니 그렇다고 35년을 이리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뭘 어떻게 바꿀 건데. 엥? 이번 생은 망했네? … 여기까지 가면 다가오는 한 해를 스스로 불길한 예감에 처박아 버리는 꼴이다. 냉정해야 한다. 가만 보면 다른 하루로 건너가는 날일 뿐인데 이맘 때면 어찌 이리 마음에 소동이 이는가.
2024년 1월 1일에 여러 다짐을 했다. 이 일기의 계기이기도 한 10대처럼 매일 일기 쓰기, 배움의 의지가 불끈불끈했던 20대처럼 영어 공부하기, 책 읽기, 스스로 인정할만했던 30살 몸무게로 돌아가기, 왠지 남들 다하는 것 같은 인스타그램/유튜브/블로그 포스팅 꾸준히 하기, 책임감 있는 어른처럼 가계부 쓰기, 풍차 적금까지는 아니더라도 꼬박꼬박 저축하기, 쿨하게 운동하기. (돌아보니 서른부터 이 다짐을 내내 복붙하고 있다.) 글로 이렇게 적어보아도 크게 무리스럽지 않다고 본다. 근데 실상은 죄다 못 이뤘다.
변명은 한 트럭이다. 밥값 하느라 그렇다. 일하느라 에너지를 왕창 썼으니 집에서는 널널하게 충전하는 게 먼저이지 않나. 요즘 유행이라는 것을 챙겨보는 것도 일이다, 그것만 해도 빠듯하다. 릴스나 유튜브나 OTT나 흘러가는 트렌드를 알아야 뭘 해도 뒤처지지 않지 않겠나. 집에 취미존이 없어 그런 거다. 딱 갖춰진 자리가 있어야 할 맛이 나는데,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다가 시간 다 간다. 저녁 먹고 치우고 한숨 돌리면 잘 시간이다. 프로라면 사사로운 내 일로 내일을 흔들리게 둘 수 없지. 나이가 들수록 부러워하는 무엇이 하나둘 늘어가서 다짐 보따리에 챙겨 넣기 바쁜데 그것을 실천한 에너지나 여유는 매일 동이 나 있다. 그러니 미루고 슬퍼한다.
올해 들어 헛헛한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건 이제는 그러한 다짐조차 안 한다는 것. 마흔에 가까워지자 이제는 수긍이란 게 자리 잡아 이 생에 될 것과 안 될 것을 갈라 치기 한다. 너무 쉽게도. 그래, 그건 결국 안 될 일이었어. 타고나길 그렇게 했어야 해. 어차피 근처도 못 가고 포기할 걸 뭣하러 시작해.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스스로 안다. 허울 좋은 다짐이나 낡아버린 열정은 고쳐 쓰면 될 일이고, 그냥 하면 된다는 걸. 그 하는 것을 못해 지지부진 옹알옹알하다가 지난날을 핑계로 두 손 드는 거란 걸. 이건 꽤 비겁하고 멋지지 않다. 110살 시대에 반에 반 온 건데 계속 이렇게 밍기적댈 것인가. 아니, 또 그럴 수는 없지.
마음에 소동을 만드는 주범을 찾고 나자 고요가 찾아온다. 움직여야 할 방향이 또렷해진다. 살아온 일을 장애물로 쓰지 말고 디딤돌로 쓰자. 1살이 더 먹어 기분이 좋은 열세 살의 나에게서만 배우자. 한 해의 바람은 새하얀 도화지에 쓰는 것이다. 지우개로 몇 번을 비비고 쓸어 해진 연습장에 써서 괜히 주눅 들지 말자. 새해의 미덕이 있다면 바로 그 도톰하고 뽀얀 종이를 몇 번이라도 명랑하게 받아도 된다는 것일 테다.
서른여섯, 걱정하지 말라는 저 어른의 말로 다시 한번 한 해를 시작해도 좋다. 기죽지 않는 마음, 이것만 가지고 내년으로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