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각종 권위 있는 국제 영화상을 휩쓸며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만큼 이야기할 내용도 참 많은 영화다.
하지만 필자는 「기생충」에서 드러나는 계급 구조와 그 속에서 개인의 욕망이 발현되는 양상에 대해 집중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봉준호식 계급 스릴러가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잘 짜인 계급 우화 기생충
엔딩 크레디트가 내리고 영화에 관심이 생겨 검색해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을 것이다. 계급. 알레고리. 우화. 영화의 디테일(혹은 봉테일).
이를 종합해보면, 디테일하게 잘 짜인 계급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우화 혹은 알레고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분명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고, 감독도 영화를 구조화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 상승과 하강으로 나타나는 공간의 위계
- '선'에 대한 집요함
- 은밀한 가부장제의 작동 양상
- 가부장제가 계급의 문제와 맞닿으며 발생하는 노동의 전가 현상 (박사장은 연교에게, 연교는 피고용자들에게)
- 그로 인한 '집안일'의 외주화; 이를 통해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가 수행하던 일들을 도맡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식 교육(기정과 기우), 가사 노동(충숙), 육아(기정), 생필품 구매(박사장 대신 연교와 장을 보는 기택) 등
잘 구조화한 것은 잘 만든 작품과 같지 않다
그런데 영화의 이런 치밀한 구조화가 곧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가?
기생충은 단순히 사회적 구조의 충실한 알레고리적 재현에 불과한가?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글쓰기 강의 중, 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어떤 작품을 두고 그것이 곧 알레고리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혹평이다.
당시에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님은 문학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는 영화와 같은 예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나 영화가 단지 현실을 구조화하는 데 그친다면 제 본질을 망각한 것이다. 그것의 본질은 반성과 상상이다. 허구를 통해 그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허구는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낙관적인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문학이 완벽한 미래를 지향하되, 그런 미래에 다다를 수 없는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는 그 한계에 맞서 몸부림치고 투쟁해야 한다.)
알레고리 기법의 활용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작품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작품 자체가 알레고리로 치환되어서는 안 된다.
한 작품이 단순히 현실의 충실한 재현만에 그친다면, 현실의 알레고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훌륭한 문학이나 영화 작품으로 불릴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뻔뻔한 이데올로기, 계급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이제 영화가 현실의 알레고리적 구조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살펴보자.
기생충은 계급 이데올로기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맑스에 따르면, 이는 특정 집단의 물질적, 관념적 이해관계를 은폐하면서 전체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착시화된 이념체계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계급 이데올로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서구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 백인우월주의 이데올로기 등이 있다.
그런데 계급 이데올로기는 다른 이데올로기들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다.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권력관계의 은폐이다. 그러나 계급 이데올로기는 굉장히 뻔뻔하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은밀하게 자행되지 않으며 능력주의라는 환상과결부해 하나의 공고한 사실로서 자리잡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계급 이데올로기가 전체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음을, 특정 집단의 물질적이고 관념적인 이해관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수저 계급론은 그것의 뚜렷한 인지에서 비롯되는 자조이다.
물론 계급 이데올로기의 작용은 여전히 은밀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계급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존재를 은폐,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이데올로기들의 자기 방어 전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감추려 한다. 젠더에 기반한 권력관계를 격렬하게 부정하고,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기본위적 운동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계급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생생한 감각으로 인지된다. 그래서 감독은 더 이상 그것이 작용하는 은밀한 양상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해명할 필요 없는 하나의 사실로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공공연하게 드러난 것은 구태여 폭로할 이유가 없다. 감독은 짙게 그려낸 이 구조 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휩쓸리는 인간들
모든 인간은 욕망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중 상승 욕망은 계급 이데올로기 내 가장 보편적인 욕망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계급 구조의 공고함을 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강한 상승 욕망을 가진다. 계급 상승의 문은 아주 좁다. 하지만 자신도 한번 그 문으로 들어가면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을 안다. 또한 웬만해서는 다시 하층 계급으로 내려올 일이 없다는 것 또한 안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계급 이데올로기의 견고한 존립은 역설적으로 아주 좁은 계급 상승 가능성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 상승의 실낱같은 희망이 '있어서' 사람들은 구조를 전복하기보다는 부르주아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런데 사회구조는 개인들의 그욕망이 발현되는 양상에 개입한다. 사회구조의 작용은 마치 거센 물결과 유사하다. 개인은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개인을 휩쓸고, 엇나가게 하고, 좌절시키며 의도하지 않은 어딘가로 다다르게 한다. 때론, 실은 아주 종종 우리가 다다른 곳은 우리가 지향한 곳과는 다르다. 개인은 욕망을 향해 기세 좋게, 계획에 따라 출발하곤 하지만 사회는 그를 휩쓴다. 그리고 욕망은 늘상 왜곡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는 기택의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맹목적으로 따른다. 아무 잘못 없는 박사장의 가족을 속여 돈을 번다. 그들이 없는 틈을 타 그 집을 마치 제 집처럼 사용하며, 기우는 언젠가 그 집에 사위로 들어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까지 한다. 기세가 좋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잠시,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지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바뀐다. 원래대로였다면 집은 텅 비어야 했지만, 폭우로 인해 캠핑이 취소된 박사장의 가족은 갑작스레 집으로 돌아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광 부부와도 마찰이 일어난다. 기세는 꺾이고 그들의 계획은 뒤틀린다.
결국 그들은 집을 탈출하지만, 거친 물결에 휩쓸려 다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계급 상승은커녕 그들은 자신의 집도 건사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의 욕망은 휩쓸리고, 엇나가고, 좌절시켜 결국 박사장의 집이 아닌 이재민 대피소로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 물결은 자연의 여느 물결과 달리 상류(층)보다 하류(층)에서 강하다.
너는 (아직) 계획이 다 있구나?
기택은 기우에게 말한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개인은 욕망과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한 계획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이내 사회 구조에 휩쓸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경험을 격렬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겪는 사람은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고 떨어졌던 상흔이 온몸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그리고 그 상흔은 곧 그들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 감각은 체화된 성향, 인지, 판단 및 행위의 도식(schème), 또는 프레임에 다름 아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것을 하비투스[habitus]라고 부른다.)
반복된 실패와 좌절의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더 이상 계획을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머지않아 또다시 좌절로 끝날 것임을 그의 몸이 증명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기택의 가족 내에서 계획을 주도하는 인물이 아들 기우라는 것은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많은 시간과 경험 속에서 욕망의 좌절을 경험해왔을 기택과 그의 아내보다, 기우는 어리다.
비슷한 연령대에 속해있지만 여성으로서 더 많은 억압을 경험해왔을 기정과 달리, 기우는 남성이다.
그래서 기우는 아직 계획이 다 있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 계획은 무너지고 집은 물살에 휩쓸린다.
그 와중에도 기우는 수석을 챙긴다. 수석이 자기에게 붙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수석은 실내에서 거대한 자연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은 돌이다. 자연에 계획이란 없다. 자연의 모든 것은 무계획의 산물,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自然]' 것일 따름이다. 수석은 본질적으로 무계획의 영역에 있는 자연을 인간의 손에 넣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우는 다시 계획을 세워 박사장의 집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처참한 결과로 이어진다. 박사장의 집 마당에서 난투극이 일어나 동생 기정이 죽는다. 기우는 머리를 크게 다쳤으며, 기택은 지하실에 갇혀 있다. 기우는 마지막까지 수석을 놓지 못한다. 끝내 그 욕망을, 계획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언젠가 기택을 구출할 '계획'을 세운다.
집이 물살로 뒤집혔을 때 가지고 나온 수석을 안은 채로, 기우는 기택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다. 두고 나온 문광 부부가 신경 쓰인다. 그러자 기택은 실은 계획이 없다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계획을 하면 모든 계획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거든.
이는 기택이 세계를 겪으면서 습득한 삶의 감각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기우는 과연 언제 그 수석을 내려놓게 될 것인가.
봉준호식 계급 스릴러
앞서 필자는 기생충의 치밀한 구조화에 대해 이야기한 후, 영화가 이런 구조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살펴보자고 이야기하였다. 그런 다음 계급 이데올로기가 작용되고 있는 ‘뻔뻔한’ 양상에 대해 이야기한 뒤, 그렇게 견고하게 구조화된 사회가 개인의 욕망이 발현되은 양상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 개인이 체화하게 되는 삶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제 이를 통해 봉준호식 계급 스릴러가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스릴러는 일반적으로 앎과 모름이라는 인지의 시차를 이용하여 공포감을 자극하고, 그 기울기 조정을 통해 쾌락을 구성해나가는 장르다. 나는 여기에서 앎과 모름에 집중하고자 한다.
영화는 어떤 앎과 어떤 모름을 제시하며 서사를 전개시키는가?
앎
영화는 뚜렷한 구조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계급 이데올로기를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영화의 알레고리 구조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충실히 받아들인다.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 계급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은밀하게 묘사할 이유가 더는 없다. 따라서 감독은 이것을 오히려 짙게 그려낸다.
모름
그런데 기택의 가족은 구조의 전복을 시도한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구조를 거슬러 욕망을 실현코자 한다. 관객은 기택 가족의 욕망이 그들을 어디로 치닫게 만들지 '모른다'. 어쩌면 정말 욕망을 실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기택 가족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관객은 기택 가족이 그 견고한 '앎'으로서의 구조를 전복할 수 있을지 숨을 죽이며 지켜보게 된다.
영화의 구조가 실제 세계의 알레고리적 재현임을 이해하고 있는 관객에게, 기택 가족이 경험하는 긴장은 곧 관객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세계의 동요와 같다. 하지만 결국 기택 가족의 욕망은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 기정은 죽고, 기우는 머리를 다치며, 기택은 살인범이 되었고, 기우와 충숙은 다시 반지하의 집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럼에도 기우는 여전히 아버지를 구출할 '계획'을 세우며, 또다시 무언가를 욕망한다.
이 모습은 어딘가 섬뜩하게까지 느껴진다.
앞서 경험을 통해 체화되는 삶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인간이 전적으로 구조에 의해 주조되는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택의 가족이 보여준 것처럼, 생생한 감각으로서의 욕망은 인간을 비단 수동적인 존재로만 볼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 속 개인의 욕망이 맞게 될 미래는 너무나 섬뜩하다.
영화는 꿈틀거리는 욕망의 환상을 그리도 생동적으로 보여주고 나서, 이내 그것을 잔혹한 살육의 폐허로 데려다 놓는다. 개인은 이제 그 폐허 위에서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