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바이킹 Apr 17. 2019

변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27/  나를 지키는 용기



2018년 여름은 내게 참 잔인한 계절이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논문이랍시고 하루 몇백 자씩 어쨌든 써내야 했던 것도 그랬지만, 그간 논문을 이유로 미뤄 두었던 '유학 후'에 대한 답을 이젠 곧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수리가 숭덩 숭덩 비었다. 거울 속 허전한 정수리를 관찰하다 보면 이마 라인을 따라 날로 그 세를 확장해가는 흰머리 군단에 눈이 멎었다. 일 년 내내 거지 같은 날씨를 자랑하는 런던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두 달의 계절 동안, 나는 학교에 낼 논문과 나 자신에게 제출할 '다음 계획서' 두 가지 데드라인에 쫓기며 흰머리를 뿜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휴직자'가 아니었던가? 인생 배수진을 치고 날아온 용감한 '퇴사자'가 아닌, 돌아갈 책상이 있는 은혜로운 휴직자의 신분. 논문 제출일이 곧 취준 시작일이었던 주변의 동생들은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했고, 나이 지긋한 동기님들은 나를 참 철없어라 했다. 그렇게나 고마운 회사가 있는데 도대체 뭐가 걱정이냐, 뭐 그렇게 조바심을 치며 마음고생을 할 일이 있느냐는 너무나 지당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 철없어라 하며 힘없이 답했다.


"똑같잖아요, 그럼..."



*

나의 직장 상사가 우연히라도 이 글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지난 유학의 목표를 하나 솔직히 밝혀 보자면, 그것은 해외에서 일자리를 구해 보는 것이었다. 유학을 통해 '강제로라도' 영어 실력을 늘리고, 일종의 평생 자격증이라는 학위도 따서 어떤 식으로든 해외 취업의 발판을 마련해 볼 생각이었다. 갑자기 무슨 강렬한 계기로 해외 취업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해외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약 10여 년간의 회사 생활을 돌아보아도 나 스스로 알게 모르게 해외에 나가서 일할 기회를 얻기 위한 노력은 계속 해왔던 것 같다. 딱히 그에 대한 어떤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하고 싶어서'라는 것이 그나마 내가 찾은 가장 분명한 이유였다.


놀랍게도 홀로 해외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절하게 알게 된 유학 말미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꼭 해보고 싶은 일' 목록의 맨 윗자리를 굳게 지켰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보아야 아는 걸 넘어 그것이 똥인 줄 알면서도 꼭 찍어 먹어 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다. 봄과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낮에는 논문을, 밤과 새벽에는 이력서를 쓰는 이중생활을 하며 어떻게라도 내 사정거리 밖에 있는 똥을 찍어 먹어 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그런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카드는 양날의 검이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고단해하는 친구들을 보며 내 상황에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다가도, 그 고생의 터널을 지나 결국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을 이뤄 낸 누군가의 성취는 가슴을 저몄다. 하루에 열댓 번씩 고쳐 썼던 영문 이력서에 볼드체로 적어 넣었던 'driven', 'achiever'와 같은 단어들은 이 이력서의 주인이 얼마나 성취라는 것에 큰 동기부여를 받는지, 달리 말해 얼마나 변화에 대한 압박을 크게 느끼는 인간인지를 말해주었다. 변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이대로 돌아가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유학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고민의 나날을 보내는 것을 내가 정말 견딜 수 있을까?

때 되어 허물을 벗지 않으면 곧 죽고 마는 번데기처럼, 쉼 없이 현재를 벗으려 애쓰며 살아온 내겐 어제와 똑같은 나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그것은 생존의 공포에 가까웠다.



*

2019년 3월 현재 이 글을 서울에서 쓰고 있으니 나는 일단 탈피(脫皮)에 실패했다. 고등동물인 나는 다행히 매번 허물을 벗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그렇게나 발버둥을 쳤으면서 나는 왜 결국 같은 껍질을 쓰고 돌아왔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탈피의 욕구와 맞먹는 엄청난 힘으로 내가 내 껍질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 유학생인 나에게 현지 취업 비자를 지원해주겠다는 자리는 많은 경우 내게서 '카피라이터'로서의 능력보다는 '한국말 할 줄 아는 1인'으로서의 자격을 물었다. 당연히 그 자리는 내가 아니어도 되었다. 가까스로 카피라이터를 찾는 자리에서 온 면접 전화는 내 비자 상황을 듣고는 곧 끊어졌다. 비자 문제가 아니더라도 언어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카피라이터 자리에 굳이 외국인을 뽑지 않으려는 것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카피라이터가 아니라면 어떤가? 간혹 한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에서 영업이나 마케팅 쪽으로 사람을 뽑기도 했다. 그 역시 풀타임 정규직 비자를 내주는 곳은 거의 없었지만 만일 그렇다 해도 나는 도저히, 또다시 비즈니스를 하며 숫자를 만지는 곳으로는 지원서를 내밀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글을 다룰 기회가 있어 보였던 번역 관련 업무도 내 커리어의 연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어 게임 테스터, 한국 시장 영업관리, 광고 회사 인턴 등 한국인이라는 스펙을 내세우거나 내 지난 영업 경력을 활용하거나 경력을 깎아 지원했더라면 어쩌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기회들이 그렇게 계속 나를 스쳐만 갔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던져 도전해도 될까 말까 한 목표였다. 미친 듯이 해보고 싶은 일이라 생각했고, 그를 이루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저 멀리 솟은 농구대에 공을 던지듯 슛이 성공할 때까지 앞뒤 가리지 않고 그저 시도하는 일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시작된 경기에서 나는 기껏 밤새 닦아 놓은 '나'라는 공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문 채 드리블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 농구대는 아니야. 응? 뭐라구? 공이 골대를 고르는 거야 지금? 그래, 난 이 공에 들어맞는 골대를 찾을 거야. 골을 넣지 못한 채 끝나버릴 이번 경기가 두려워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애써 만들어 온 나의 포지션을 포기하거나 갑자기 골대의 높이를 낮춰 나의 가치를 깎아내릴 슛을 쏘고 싶지는 않았다.


한 커리어 세션에서 우리 팀 막내보다 어린 패널들이 자랑스레 늘어놓는 '멋진 신입사원 이야기'들을 듣느라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이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는 것을.



*

늘 원하는 다음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나를 모두 걸고 덤벼들었던 내게 '지금까지의 나를 지킨다'는 개념은 생경했다. 내가 안이한 건가? 벌써 꼰대가 됐나? 그냥 용기가 없는 건 아닐까? 천 번을 되묻고 그중 구백 구십 번쯤은 그런가 하고 스스로를 탓했지만 나머지 열 번의 대답이 고쳐 말했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언제나처럼 변화를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는 '어떻게든' 일단 변하고 말면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가고 싶었던 길로, 이 다음뿐만 아니라 그 다음, 또 그 다음까지 이어질 방향 위에서의 변화여야만 했던 것이다. 해보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차이를 분명히 자각해야 했다. 내게 해외 취업이란 언젠가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세상에 말을 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해보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떼를 쓰며 쉬이 포기해서는 안될, 지난날의 수많은 내가 인내와 노력으로 빚어 온 나의 소중한 정체성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어렴풋하게 가졌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아직 나에게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고민과 그를 이룰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그때까지 나는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차곡 차곡 쌓아 온 '오늘의 나'라는 재산을 존중할 필요가 있음을.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

생각해보면 변화라는 것에 목을 매고 그 어느 때고 내게 잔인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변화를 위한 변화를,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갈증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그저 흐르는 듯 보였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지키고 싶은 것이 자라난 것처럼, 고민과 몸부림의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변했을 수 있다. 설사 보이는 것들을 애써 바꾸어 장착했다 하더라도, 정작 하나도 깊어지지 못한 스스로였을지 모를 일이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었다.


움직임 하나 없이 갑갑해 보이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번데기는 다른 말로 어린 나비다. 나비가 되려면 반드시 인생의 어느 시기는 번데기여야만 한다. 언젠가 자신의 바람을 만나 시원히 날개를 펼칠 때까지, 번데기는 열심히 자신의 답답한 껍질을 지켜야 한다.


'내가 꿈꾼 자유는 결코 가출이 아닌 탈피였다. 완전한 탈피를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 한다.'

- 박완서, 「도시의 흉년」 중


그러니 다짐한다. 나는 서른넷의 어린 나비다. 나는 용감한 번데기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10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두 번째 초년생 다른 글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에이, 유학이나 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