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 짐

내 과거에선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by 작은바이킹



나는 유학을 가려는 걸까, 보따리장수가 되려는 걸까.

아무리 짐을 단촐하게 싸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위탁과 기내 수하물 각각에 걸려 있는 짜디 짠 무게 제한에다 1kg당 만 원에 육박하는 EMS 배송비 덕분에 강제 미니멀 라이프를 살 수 있는 기회인데도, 자꾸만 생전 안 입던 옷을 거기선 입을 것 같고 오늘 다이소에서 처음 본 물건들도 거기선 꼭 필요할 것만 같다.


여름 내 짐을 싸고, 풀고, 다시 싸기를 반복했다. 살던 방을 빼면서, 엄마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가지고 나갈 짐을 싸면서, 맨손으로 테잎을 감고 물건을 눌러 담은 손가락엔 마디마디 가득 습진이 잡혔다. 나 하나에 딸린 물건들은 정말 많고도 많았다. 그곳에 갈 짐을 싸기 위해선, 일단 이곳에 있던 짐을 버려야 했다. 가진 것을 버리고,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을 버리고, 아깝지만 이젠 쓸 일 없을 것 같은 것을 버리고, 버리고, 버렸다. 처음엔 오래된 양말 한 짝을 들고도 머뭇머뭇했던 것이 버리면 버릴수록 점점 중독이 되어, 나중엔 내 물건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신발을 다 꺼내어 버리고 급기야는 이사 온 뒤로 근 이십 년 간 한 번도 정리된 적이 없었던 엄마 집 이불장까지 뒤집었다. '엄마는 쫌 이렇게 버리고 살란 말야!' 생색 씩이나 내며 이제 곧 떠날 사람인 나는 신나게 나의 과거가 묻은 물건들을 버렸다.


그런데, 필요 없는 것들을 싹 버렸고 필요한 물건들은 알차게 사 두었으니 이젠 휙휙 골라 담기만 하면 되겠거니 한 나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담을 수 있는 무게가 정해져 있는 장바구니에 물건을 골라 담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스테이지였다. 무엇이 필요할지 모를 미래의 짐을 싸는 것에 비하면, 이미 무엇이 필요 없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과거를 버리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


이 와인색 가죽 가방은 베이지 색 트렌치코트에 들고 다니면 괜찮겠다.

이 빨간 사첼을 메고 런던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참 예쁠 텐데.

이 부츠는 작년에 힘들게 발품 팔아서 산 거니까 거기서도 비슷한 걸 찾기는 어렵겠지?


... 하는 고민들은 짐 싸기 시작한 지 5분도 안 되어 굉장히 웃기시는 것들로 판명이 났다. 예쁜(무거운) 가방? 예쁜(무거운) 부츠? 무슨 말씀이세요. 버리기에서 시작해 고르기로 넘어온 나의 짐싸기는 이제 '빼기'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여행자가 아닌 나는 그 조그마한 사첼백 안에 노트북을, 전공책을, 도시락과 물병과 우산을, 집에 오는 길에 살 우유와 바나나와 페브리즈를 넣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방' 카테고리엔 커다란 검은 백팩 하나와 가벼운 에코백 몇 개가 남았다.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한 셀카봉과 플랏에서 신으려고 넣었던 분홍색 삼디다스 슬리퍼와 10g이나 차지할까 싶은 틴트 하나까지 모조리 빼고 또 빼고 나니 어쩐지 설렘마저 빠져나간 듯 우울해졌다. 걔네는 건식 욕실이라 욕실화가 없다던데. 플랏에서 공동 샤워실을 왔다 갔다 하려면 이 슬리퍼는 꼭 필요할 것 같은데. 그놈의 무게가(돈이) 뭐라고, 정말로 필요할 것이 분명한 이 옷걸이 하나를 못 들고 가나. 1년짜리 대학원 공부라는 정말 중요한 것을 눈앞에 두고, 나는 런던에 도착한 첫날 옷을 걸어 둘 옷걸이가 없을 것을 걱정했다.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몇 년만에 다시 시작하는 공부에 대한 초조함을, 나는 옷걸이와 슬리퍼와 다이소 꼭꼬핀에 투영하고 있었다. 내게 이미 익숙한 어제와 오늘들을, 모두 내일로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여름 내 짐을 싸며 조금씩 깨달아갔다.



가지고 떠나는 짐의 무게가 가벼울수록, 오히려 두고 가는 과거의 무게도 가벼워진다. 익숙한 나에 대한 집착을 덜어내고, 아직은 잘 모르는 미래의 나를 받아들일 공간을 넓힌다.


그래도 역시 삼디다스는 가져올 걸 그랬어.





| 직장인을 일시 정지하고 날아온 1년짜리 유학생. 이따금의 토요일에 쓰는 빡세고 다정한 런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