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절대로 안 했나?

'절대로'에 왜 혹했던가

by 이보라



끌릴 수밖에 없다.

정말 강력한 문구잖아.

공부를 절대로 하지 말라니.


문법 공부에 질색하고, 사실 모든 형태의 '공부'에 질색하는 사람에게 있어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책이면? 쫄랑쫄랑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다.


게다가 강렬한 채도의 색에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책의 디자인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책은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날부터 테이프를 틀어 놓고 영어를 듣기 시작했다.


멍때리며 영어 음원을 듣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좀 이상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 것 같아. 분명해.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영어 공부 맞는데?

공부하지 말라면서요?


테이프를 반복해서 듣고, 받아쓰기를 하고, 영영사전을 찾고, 영화를 골라 보고, 영자 신문을 읽는 등 저자가 제시하는 영어 공부법은 많았지만, 영어를 하려고 하면 문장 앞에 '어버버버'가 치고 들어오는 나에게는 이 책의 문장만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요구사항이었다. 이게 공부가 아니면 대체 뭐람?


이 책을 한참 붙들고 지낸 후에도 영어가 딱히 느는 느낌이 없었다. 더 잘 들리는 느낌도, 입이 트이는 느낌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의 영어 삽질 인생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여기에서도 나타났다.


시키는 대로 다 하지 않고, 하다가 마는 것.


저자가 말한 '영어 공부를 절대로 하지 않는 과정'에는 책 내용이 완전히 들릴 때까지 듣고, 모든 문장을 받아쓰기 하고, 입에 익을 때까지 소리 내서 읽고, 영영사전에서 단어와 예문을 찾아서 적고, 이 과정을 영화와 영자 신문에서도 반복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첫 과제에서부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들릴 때까지 듣지도 않았고, 소리 내서 읽기도 하지 않았다. 많이 듣지 않았으니 더 잘 들리는 느낌이 들 리가 없고, 소리 내서 읽지 않았으니 입이 트였을 리가 없다. 아이고.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이 책의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 사전을 봤던 것도, 스크린 영어 대본이 포함된 노팅힐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봤던 것도 이 책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들도 다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직접적인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영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불씨는 유지해 주었다.


문법에 신경 쓰지 않고 테이프를 듣고 책을 보는 방식을 경험한 것 또한 나중에 회화 책으로 입이 트이는데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속은 느낌은 분명 있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결국은 영어 공부를 (짧게나마) 한 것이 좀 분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영어 실력에 (티끌 같은) 자산이 되었던 건 맞다.


살면서 속고 사는 것도 꼭 나쁜 건 아닌가 봐.

그런가 봐.





[삽질 복기]

- 시키는 대로 다 하면 6개월 만에 영어 됐을까?

- 됐을 수도...

- 시키는 대로 다 할 정도의 정신력이면 어떤 방법이든 됐을 수도...

- 문제는 항상 나지, 나야.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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