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어, 왜
사전의 색감은 강렬했다. 빨간색과 파란색의 대비가 눈에 띄는 디자인이었다.
집에 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도 두껍고, 학교 교과서를 여러 권 모아 놓은 것보다 무거웠다. 안 그래도 가방 안은 만석이었다. 교과서와 참고서와 만화책이 가득 든 책가방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크다 만 키가 조금이나마 더 클 가능성을 짓밟고 있었다. 이 영영 사전을 어디 들고 나가면 공부 꽤 하는 애처럼 보이고 좋았을 텐데, 나의 소중한 키를 위해 그 가공할 만한 무게의 사전을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 읽기가 열풍이었던 시절이었고, 영어에 열정이 넘치는 학생으로서 그 유행을 따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사전을 펼쳐 단어와 예문을 하나씩 읽어 본다. 얇게 팔락거리는 종이를 넘기며 계속 읽어 본다.
읽으면 읽을수록 종이가 넘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늦어진다.
늦어지고, 또 늦어지다가, 결국은 넘어가지 않는다.
나름 몇 개월은 사전을 붙들고 씨름을 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 남은 건, 그저 여전히 99% 새하얗기만 한 영영 사전.
30년 가까이 온갖 영어 공부 방법을 시도해 본 경험을 돌이켜 보았을 때, 이것만큼 시간이 아까웠던 것도 별로 없다. 비효율적이고, 재미도 없었다.
물론, (항상 그래 왔듯이) 사전 자체는 좋았다. 구성도 좋았고, 쉽게 풀어 쓴 설명과 예문 문장도 좋았다. 문제는 쉽게 풀어 쓴 문장이 나에게 쉽지 않았다는 거였다. 영어로 영어 단어를 배우는데 설명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단어의 뜻도 와닿지 않았다.
영어 수준이 중급 이상 되는 사람이 영어 원서를 읽으면서 옆에 두고 보기에는 좋은 사전이었을 것이지만, 내가 거기에 해당되지는 않았다.
기초 영어 회화도 버벅거리면서 제대로 못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쓸만한 단어보다 향후 몇 년 안에 전혀 쓸 일이 없는 단어가 훨씬 많았다.
기회보다는 기회비용이 더 컸던 영영 사전 읽기는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나중에 영어를 잘하게 되면 언젠가 다시 도전해 보려는 마음으로(야심차다) 오랫동안 책장 안에 잠들어 있었지만, 그 책은 영원히 깨어날 줄을 몰랐고 집에 있던 책을 대거 정리하면서 중고 도서 시장으로 방생되었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내 것일 일은 없을 것 같다.
[삽질 복기]
- 그걸 읽을 시간에 학교 영단어 책이나 더 볼걸.
- 그거 읽을 시간에 회화 문장 책이나 더 볼걸.
- 그거 읽을 시간에 영어 원서를 읽어 볼걸.
- 그거 읽을 시간에 만화책이나 더 볼걸(가장 현실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