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을 하나씩 눌러야 해요
종이 사전은 아니다.
휴대전화 안에 들어있는 사전도 아니다.
가방 안에 쏙 넣고 들고 다니던 손바닥만 한 전자사전이다. 일본 전자기기가 잘나가던 시절, 샤프 전자사전.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해서 내 기분을 나쁘게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는 기억이 안 나고 기분이 나빴다는 사실만 기억이 날 때가 있다.
그 전자사전도 가격이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게 (술 먹느라) 한 푼이 아쉬운 대학생에게 기분 나쁠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는 정성적 사실만 기억이 난다. 지하철을 1시간씩 타고 가서 피로한 눈을 껌뻑이며 과외를 해서 번 돈이 허망하게 나의 손가락을 빠져나가던 그 아픈 기억 말이다.
전자사전은 얇고, 가볍고, 잘 접혔고, 촉감이 신기했다.
실리콘 같은 질감의 단추로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하면, 단조로운 단색의 화면에 단어 뜻과 예문을 후루룩 뱉어내는 신기한 전자사전이었다.
단어도 쥐약인데 철자도 쥐약인 주인을 만나 나의 손가락이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
전공 수업도 영어 강의로 듣고, 비즈니스 영작문이나 영문학 교양 수업도 듣는 주인을 만나 나의 전자사전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
고급 단어를 미리 잘 외워두었으면 참말 좋았겠지만, 나의 영어 삽질 인생은 겹겹이 후회를 쌓아 올린 산꼭대기 위에 지은 집 같은 포근한 존재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두꺼운 영어 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게 해준, 나름 고마운 신문물이었다.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가격이 매겨져 있던 것 치고, 수명이 엄청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자사전의 화면이 흐려지면서 내 눈앞도 흐려졌다.
이제는 사전을 찾고 싶으면 휴대전화 안에서 영한사전도 찾아보고 영영사전도 찾아보고, 영어 어원사전도 찾아본다. 전자책으로 영어 원서를 읽을 때는 모르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한 번 꾹 누르기만 해도 단어 뜻을 볼 수 있으니 신문물은 항상 나의 편이다.
일상 회화도 하고, 업무 회화도 하지만 단어는 영원한 적인 주인을 만나 여전히 나의 손가락은 고생 중이다.
어휴, 그래도 그 전자사전 실리콘 버튼 누르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니 어디야.
감사하며 살도록 하렴.
감사하는 사람에게(손가락에) 복이 오니까.
[삽질 복기]
- 비싸게 주고 산 전자사전, 본전은 못 뽑은 것 같다.
-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겠지.
- 아마도 그랬겠지.
- 생각난 김에 단어 공부나 할까?
브런치 북에 글 개수 30개 제한이 있는 걸 모르고 시작했지 뭐예요?
2권에서 계속 떠들려고 합니다(말이 많네 많아).
심심하실 때 또 놀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