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다]
딱 5년 전이다. 무더웠던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 바리바리 이삿짐을 싸 들고 제주로 향했던 날이 딱 이맘때다. 도착한 첫날에는 천둥 번개가 쳤고... 창문을 두드리는 거센 비에 기가 눌렸었다.
아... 나 제주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적응할 수 있을까... 그리고 5년 뒤...
나 뉴욕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적응이란 무엇인가...
매트릭스의 유명한 이야기... 모피어스가 준 빨간 약과 파란 약... 당신의 선택은?
아직도 가끔은 자고 일어나면 한국에 있는 내 침대 속에서 일어날 것만 같다.
미국 꿈...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드림이 아닌 그냥 밤새 시달린 꿈같은 꿈을 꾼 그런 기분으로 일어나서 정신을 차려보면 여전히 내가 엊그제까지 살았던 곳과 시차가 13시간이나 나는 그저 지구 반대편의 어느 공간일 뿐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파란 약을 선택할 것 같다. 빨간약을 선택해서 불안한 심정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여지없이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기보다는 파란 약의 익숙함이 더 편하고 즐거울 것 같다.
단지 여행처럼 단기간의 경험이라면 새로움, 신기함, 설렘, 흥미진진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겠지만 살아가야 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뉴욕에 오기 전 한 달 전까지도 한국에서 새집으로 이사를 했었다. 몇 달 동안 새로운 가구, 새로운 가전제품을 사러 발품을 팔고, 폭풍 검색을 해가며 내 공간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겨우겨우 익숙하고 편안한 내 공간을 만들었다 싶었는데 덜컥 지금은 뉴욕 어딘가에 와 있다. 이삿짐으로 가져올 게 많지 않았다. 새로운 가구들은 고스란히 새 집에 두고 왔다. 결국 정말 옷가지 몇 가지만 챙겨 왔는데 실수였다. 있는 대로 다 챙겨 왔어야 했는데...
익숙한 물건들이 당장 없으면... 처음 1주일이 정말 힘들다. 하... 이제 와서 생각이지만... 그때 어떻게 살았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IKEA가 많은 역할을 했다. 왜 멤버십은 공유가 안 되는 것인가... 이케아는 한국의 고양이나 광명이나 뉴욕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해서 신기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산 것과 거의 비슷한 물건들을 사고 또 샀다.
가장 시급한 게 침대였는데 보름 동안이나 맨바닥 생활을 하다... 겨우겨우 시간을 내서 매트리스 먼저 사 왔다. 세상에는 참 신기한 것들이 참 많다. 매트리스가 저렇게 동그랗게 말려있다. 스프링 침대인데 말이다.
프레임은 도저히 들고 올 수 없어서 인터넷 주문을 했다. 일단 보름 만에 바닥이 아닌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것...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지만 소확행을 읽고... 잔잔한 행복... 그저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막연히 느꼈던 것들이... 하나씩 확실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흘 동안 베개가 없어서 힘들게 자다가 맨해튼에서 베개를 사 오고서는 행복함을 느꼈다.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를 사 오고서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ㅠㅠ 작지만 확실하다기보다는 아주 큰 행복감에 전율했다. 이 사진 이후로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루었는데 그 이야기는 차차 해도 될 것 같다. 일단 잠을 자는 데는 적응했다.
일은... 입사한 이래로 여전히 적응 중이다. 항상 새로운 상황, 새로운 환경,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언제나 긴장하게 마련이다. 아직은 긴장하며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의 어느 날의 나른한 오후에 사무실에서 문득 나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다가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직은 여전히 적응 중이다.
하루에 큰 비행기가 두 대가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혹은 다녀오고... 비행기만 타면 사실 12-14시간 만에 내가 살던 곳에 닿을 수 있다. 어찌 보면 무척 가까운데 참 멀다. 다음 달에 한국 출장이 있는데 몇 달 만에 돌아가면 또 어떤 마음일까...
성인이 되고 나서 어딘가에 적응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내 개인적으로는 맥주인 것 같다. 미국에 와서 느낀 건데 미국에 맥알못들이 너무 많다. 홈 브루어의 천국인 줄 알았던 미국에서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손에 꼽지도 못할 만큼 주변에 없다. 하긴 굳이 만들지 않아도 맛있는 맥주가 주변에 무척 많다. 어찌 보면 정말 복 받은 나라다. 맥주라도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진짜... 맥주에는 빠르게 적응했다.
정착한 집에서 처음 만든? 요리??!라고 하기는 너무 간단하지만 거의 첫 끼로 핫도그를 만들어 먹었다. 다 좋은데 미국 소시지는 너무 짜다... 마트에서 소시지 고르기가 가장 힘들다. 소시지 전문가의 답을 듣고 싶을 만큼 너 나 할 것 없이 다 짜다... 아직은 적응 중이다.
그건 그렇고... 요즘 날씨가 너무 좋았다. 희뿌연 하늘이란 건 없다. 구름이 있어서 맑게 구름 낀 하늘이거나... 그저 맑은 하늘이거나... 공기가 좋다. 환경에는 적응했다.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무서워서 중간중간 사진을 찍어본다. 어쩌다 이렇게 혼자 나이 들었을까... 생맥주를 마시고 적당한 변명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에 잠길 때가 있지만... 뭐 괜찮겠지...라고 하는 하루키의 말처럼 정말 괜찮은 걸까...?
적응이란 무엇인가... 셀카란 무엇인가... 일단은 뉴욕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2018. 10. 25 뉴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