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케이크는 제가 예전에 일할 때도 수도 없이 만들었고, 가끔 손님이나 친구들을 위해 집에서 쉽게 만드는 메뉴 중 하나 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저에게 '어떤 초콜릿 케이크가 가장 맛있는지'를 물어보면 저는 입을 뾰족하게 내민 채, 고민에 잠겨 제 큰 눈알을 동그랗게 말없이 굴립니다.
제가 가진 밀가루, 설탕, 버터 묻은 자국에 누우런 세피아빛 연식이 더해진 레시피 북에 정말 다양한 초콜릿 케이크와 관련된 레시피들이 수두룩 하고, 또 각 초콜릿 회사 제품에 따라 얼마나 세상에는 다양한 초콜릿이 있는지 발견하는 재미는 사실 디저트를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 즐거워하던 경험 중 하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로운 초콜릿 제품이나 다양한 디저트를 소개하는 셰프들의 시연이나 클래스를 들으며 만나는 예쁜 초콜릿 무스, 달콤함이 눈 녹듯이 입에서 스며드는 초콜릿 빵과 케이크등 저는 쉬는 날도 돈과 시간을 들여 이 끝도없는 초콜렛의 매력이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콜릿 자체마다 공정과정이나 풍미를 느끼는 것이 좋아 꼭 초콜릿 한 알을 입에 물고는 녹여먹는 재미를, 그렇게 맛본 초콜릿을 어떻게 어떤 레시피로 사용하면 좋을지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들은 이젠 더 이상 키친에서 일을 하지 않는 저에게는 여전히 그리운 시간입니다.
지난주, 재택근무를 하며 잠시 쉬는 시간에 문득 촉촉하니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들쭉날쭉한 근무시간에 피곤해하다가 눈을 감았다 떠보며 조금은 다리를 쭉 필만하니 어느새 주말이 다가오고, 먼지가 조금 쌓인 레시피북을 오랜만에 펼쳐 보며 주일을 시작합니다.
질 좋은 더치 코코아에 머드 케이크 같은 질감의 초콜릿 케이크 레시피, 전 직장동료가 남편이 좋아해서 종종 만들었었다는 화이트 초콜릿 와 마카데미아를 넣은 초콜릿 쿠키, 피칸이나 호두를 듬뿍넣어 씹히는 맛이 배가 되는 브라우니, 부들부들한 초콜릿 무스 , 오렌지 리큐어를 넣은 폭신하다 못해 녹아드는 초콜릿 케이크 레시피, 오래오래 냉장보관에도 늘 맛있는 좋은 초코 파운드케이크 레시피, 실연의 아픔마저 녹아내리게 해준다는 퐁당오쇼콜라 등등을 지나 집에서 주로 사용하는 간단한 초콜릿 케이크 레시피를 열어봅니다.
다이어트 중인 저희 집 남자 고랑이가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를 딱 한 조각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그의 요청도, 바쁜 다음 주 주중에 피곤함이 몰려올 때 제 기분을 끌어올리기엔 이만한 메뉴가 없을 것 같거든요.
초콜릿 케이크
냄비에 따뜻한 물을 올려서 작게 가스불을 켜 둡니다. 집게로 집어둔 봉지를 열자 코끝이 찡끗해지는 초콜릿 향에 웃었다가 반질반질 바닷물에 오래오래 여행한 조약돌 같은 다크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녹여먹으며 넓은 볼에 초콜릿을 계량하여 냄비 위에 올려 천천히 초콜릿을 녹여줍니다.
미리 계량해둔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 소금 등은 체를 쳐서 준비해주고, 실온에 두었던 계란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둡니다. 노른자에는 설탕과 바닐라 익스트랙, 우유를 넣어 잘 섞어주고, 포도씨유를 녹인 다크 초콜릿을 천천히 접어 넣듯이 체를 쳐둔 가루류를 나누어 넣어주며 함께 어울리도록 잘 섞어줍니다. 흰자는 머랭은 작은 뿔이 여우꼬리 휘듯이 부드럽지만 곡선이 살아있게 가볍게 올라오면 천천히 볼을 번갈아가며 초콜릿 반죽과 함께 섞어줍니다. 머랭이 절대 초콜릿 반죽의 무게에 기죽지 않게, 꺼지지 않게 부드럽게 밑부분부터 넓게 잘 섞어줍니다.
이렇게 먹어도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이지만, 오늘은 제가 늘 좋아해서 아껴둔 그리오틴 체리 유리병의 마지막 바닥 부분에 남아있던 기분 좋게 체리향 와인 같은 시럽을 적당량 넣어줍니다. 이제 완성된 초콜릿 반죽을 틀에 반쯤 부어준 뒤 조약돌 같은 다크 초콜릿을 기분 좋게 뿌려준 뒤, 다크 초콜릿과 함께 먹으면 기분이 업되는 그리오틴 체리를 넉넉하게 반죽에 띄우듯이 넣어줍니다. 남은 초콜릿 반죽을 그 위에 부어진 뒤 그동안 뜨끈하게 예열된 오븐에 케이크 틀을 넣어주며 오븐 속 불빛에 윙크를 해줍니다. '오늘도 잘 부탁할게.'
한 20분쯤 지나자, 제법 고소하면서도 초콜릿 냄새가 진하게 집에 풍기기 시작합니다. 잔잔한 향초를 켜놓은 듯 기분 좋은 냄새에, 비에 축 쳐지듯이 뭉쳐있던 기분이 풀어지며 초콜릿 케이크가 익기를 기다립니다.
켜놓은 음악 몇 곡이 끝나고 오븐을 보니 봉긋하게 올라온 초콜릿 케이크의 윗부분에 뾰족한 칼을 살짝 넣었다가 잘 익었는지 테스트를 해봅니다. 아직 살짝 반죽이 안쪽에 묻어나는 것을 보니 조금만 더 오븐에서 익혔다가 잔열로 까지 이용해 익히면 딱일 것 같아 예전에 일할 때 동료들과 함께 들었던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블루투스 스피커의 볼륨을 높여 들어봅니다.
빨간 틀 사이로 보드랍게 올라온 초콜릿 케이크에 남은 체리 시럽과 럼을 섞어서 두 번 정도 반짝하게 발라준 뒤, 이제 실온에서 잘 식혀줍니다. 케이크이든 빵, 쿠키, 초콜릿 작업이든 일을 하면서 배웠던 첫 번째는 '잘 기다리기' 였었거든요.
조바심을 내서 억지로 쿠기를 만지거나 케이크를 잘 시간을 들여 식혀주지 않고 틀에서 분리하거나 꺼내는 순간... 수많은 과정들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식히는 과정까지 이 모든 베이킹의 과정인 것을, 수만 번을 듣고, 해왔지만 가끔 생각합니다. '오븐에서 갓 나온 저 달콤하고 촉촉한 귀퉁이를 잘라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궁금하다- '하며 세상에 아는 맛은 있어도 같은 맛은 없다며 저의 식탐은 늘 저를 조급하게 유혹합니다.
주일 저녁이 다 가기 전에, 일주일 동안 기다렸던 드라마 한 편을 보며 눈물 콧물을 쏙 빼는 시간을 가지는 동안 케이크는 제법 실온에서 잘 식혀져, 이젠 한번 잘라서 맛봐도 되겠다 생각이 듭니다. 작은 톱니가 자잘하게 박힌 작은 칼을 이용해 케이크를 살살 예쁘게 손가락 한마디 두께로 잘라줍니다. 깊숙하게 숨어있던 달콤한 다크 초콜릿향과 체리향이 케이크 결과 작은 구멍 사이에서 삐져나오듯이 칼집의 방향으로 빠져나옵니다.
이렇게 케이크를 자르다가 남은 끄트머리와 자투리, 엄지손가락 만한 남은 쿠키 반죽덩어리로 구워진 미니 초콜릿 쿠키, 모양을 다듬으며 잘라진 딸기, 살짝 파인 복숭아 등은 모아 났다가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커피 한 잔과 함께 나눠 먹거나, 스무디를 만들어 더운 한여름에 시원하게 먹었던 기억 해봅니다.
이젠 그렇게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던 끄트머리만이 아니라 예쁘게 가게의 진열장에, 레스토랑, 호텔의 디저트 접시에 가장 예쁘게 올려진 케이크도 제 맘대로 먹을 수 있지만, 가장 예쁘게 잘라진 조각들은 여전히 손이 가지 않아 랩으로 하나하나 소분한 조각을 양 옆, 위아래를 여미듯이 포장을 하여 냉동실과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줍니다.
여전히 일하던 때의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봅니다. 습관처럼 예전처럼 끄트머리를 얇게 자른 초콜릿 케이크 조각에 웃음이 났다가 차 한잔을 내려 맛봅니다. 살짝 달큼하듯 촉촉하게 씹히는 체리와 중간중간 집어넣은 다크 초콜릿이 조각이 반쯤 녹듯 뭉그러진 부분에 입에 머금은 차 한 입이 녹아들며 혀를 감쌉니다.
한여름 더위에, 오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얼굴에 고양이의 긴 수염처럼 초콜릿 자국을 묻힌 채 바쁘게 일을 하는 저를 보고 풉-하고 웃던 그 웃음소리를, 깜깜한 저녁 밤을 위스키 한잔과 먹는 초콜릿의 맛을 처음으로 배웠던 그 어느 겨울밤이 생각나서 찬장을 열어 깊숙이 손을 뻗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