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시댁인 홍씨들의 시제를 모시러 여수에 가기로 돼 있는 날이다. 보통은 엄마 아빠가 같이 가지만 아빠가 은퇴 후 작은 일자리를 갖게 되면서 올해는 엄마만 가게 됐다.
여수에는 아빠 성씨인 홍씨들의 집성촌과 엄마의 성씨인 황씨들의 집성촌이 모두 있다. 엄마 아빠는 이모 옆집에 살던 친할머니의 중매로 여수에서 만나 결혼했고 친가 식구들과 상경해 인천에 터를 잡았다. 내 두 뿌리는 모두 여수에 있는 셈이다.
올해 99세 백수(白壽)를 맞은 외할머니가 얼마 전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기도 했고 엄마에게 내려간 김에 뵙고 오 면 어떤지 물었는데, 차가 없어 이동도 불편하고 한쪽 일에만 충실하겠다고, 다음 달에 시간 내 같이, 길게 놀다 오자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어제 여수에 계신 제일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다. 부고장에 적힌 외삼촌의 나이는 향년 92세.
엄마와는 터울이 무려 30년 가까이 나는, 그야말로 '제일 큰 외삼촌'이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불렀다. 내가 삼촌과 이모들을 부르는 방식은 조금씩 다 다르다. 주로 사시는 지역이나 집의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내가 성함이나 별명을 붙여 부를 수 있다면 제법 많이 보고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제일 큰 외삼촌, 빵갓댁 삼촌, 서면 이모, 섬달천 사시는 삼촌, 두지동 이모, 서울 외삼촌, 여수 삼촌, 또니 이모, 유선이 삼촌, 유심이 이모까지.
엄마는 6남 5녀, 11남매의 막내다. 첫 번째 외할머니가 3남 2녀를 낳으시고 지병으로 돌아가신 뒤 외할아버지가 우리 외할머니와 재가해 3남 3녀를 얻었다. 할아버지보다 12살이 젊었던 외할머니가 시집을 와보니 할머니와 나이 차가 얼마 나지도 않는 자식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어찌나 어머니, 어머니 따르는지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고 한다.
큰외삼촌의 아들인 '제일 큰 외사촌 오라버니'는 엄마보다 나이가 스물 가까이 많았고 그 자손인 '장조카님'이 엄마와 비슷한 연배였기 때문에 나는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내 또래의 조카손주들이 있는 할머니였다. -지금은 못해도 10대 증손주들의 증조할머니쯤 돼있을 거다- 여수 외가에 가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고모, 이모, 할머니라고 부르며 대우하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배다른 자식들 이야기와 달리 내가 근 40년을 보아온 것으로는 11남매의 우애가 너무나 좋았다. 파고 들면 304호나 305호나 사연 없는 집 없다고, 11남매의 자손들이 뻗어나가다 보면 여느 집 같은 문젯거리들이 없진 않지만 11남매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 자손의 일원인 내가 보기에도 많이 끈끈한 데가 있었다. 특히 막내인 엄마가 집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학창시절엔 10명의 오빠 언니들이 부모님처럼 든든한 방어막이 돼 줬다고 한다. 사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 동급생들이 다 조카들이라 막아줘야 할 일도 많지 않았다.
"니가 누냐(누구냐)? 아이가, 니가 복숙이 딸이냐? 오매 많이 커부렀다잉~."
막내가 낳은 첫딸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남동생만 하나 있는 K장녀였지만 외가에 가면 늘 '엄청난 막내 놀이'를 좀 해볼 수 있었다. '복숙이 딸'이 신분증이었고 그 말만 뱉어도 동네 골목 골목 어디를 다녀도 '프리패스'였다. 어린 시절 친가 식구들을 훨씬 많이 자주 보고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1년에 보는 일이 손에 꼽아도 조금 더 의지하고, 웃고, 걱정하고, 애틋해 하는 이들은 여수 외가 식구들이다.
애틋하다 [형용사]
(1) 마음이 애가 타는 듯이 깊고 절실하다.
(2) 마음이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나는 외가로부터'정답고 알뜰한 마음'과'애 타는 듯 깊고 절실한 마음' 모두를 느끼고 배우며 커 왔다. 어릴 때는 전자가, 나이가 들수록 후자의 마음이 더 크게 자라나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진심, 정답다, 애틋하다, 따뜻하다, 사랑 받다와 같은 말을 깊게 이해하고, 말하고, 쓸 수 있었던 것의 팔할이 다 그곳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이야 KTX로 3시간이면 되지만 어릴 땐 엄빠의 첫 차였던 엘란트라를 타고 무려 10시간을 실려가야 가로등도 없어 칠흑같이 깊고 까만 밤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외갓집 철문 앞에 닿을 수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기도 전에 온 식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주는 그 느낌은 사실 어떤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눈물부터 나는 그런 것이었다. 떠날 때에도 서울 사람들 자주 못 내려 온다고 양파며, 매실이며, 마늘이며 차에 싣느라 트렁크 문을 어떻게 닫을 것이냐 요리조리 짐을 옮기던 풍경마저 한결 같았다.
그렇게 1년에 많아야 두 세 차례 여수에 갔다가 그곳을 떠나올 때면 어린 마음에도 이상한 허전함과 쓸쓸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바로 옆 아파트에 사셨던 친할머니, 할아버지댁과 달리 보고 싶을 때 훌쩍 닿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일 거다.
이제 '제일 큰 외삼촌'까지 외삼촌 세 분과 이모 한 분이 돌아가셨고 7남매가 남았다. 모두 나이가 들며 조금씩 아프시고, 사촌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대학병원을 오가야 하는 일들이 집집마다 생기기 시작했다. 귀여운 막내, 엄마도 어느새 환갑을 넘겼고, 2년 전엔 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런 땅과,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에 나는 자주 울컥하는 편이다. 직접 내려가 뵙지 못하는 마음을 봉투에나마 담아 엄마 편에 보내며 더 늦기 전에 엄마와 함께, 엄마의 땅에서, '엄마의 사람'들과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