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수동적 행위, 내려놓음은 능동적 행위.
초등학교 1학년 알림장을 매일 써갔는데 받아쓰기 연습숙제를 빼먹고 안 해 온 적이 있다.
선생님은 숙제를 안 해 온 사람은 일제히 일어나라고 하셨고 앞쪽에 서있던 친구들부터 손바닥을 3대씩 때리며 내게로 오셨다. 나는 분명히 알림장을 써갔고 꼼수를 부리거나 숙제를 안 할 의도적 마음이 없었는데 체벌을 당한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바닥 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셨지만 “싫어요, 부끄러워요”를 연신 말하며 체벌을 거부했다.
결국 잠시 앉아있으란 말씀을 하시곤 나머지 아이들을 다 체벌하셨다. 나만 따로 선생님자리로 불러 “약속한 거고, 다른 친구들도 다 맞았으니까 이제 은하도 맞아야겠지?”라는 말씀을 꽤나 다정하게 해 주셨다. 선생님은 27살쯤 되신 정말 예쁜 여자분이셨다. 작고 귀여운 노란 병아리 같으셨다. 그래도 체벌 앞에선 선생님이 너무 힘이 세고 무서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 후로 나는 모범생으로 자라다가 고등학교 때는 지각 때문에 몇 번 엉덩이를 맞았다. 벌칙으로 학교 운동장을 뺑뺑 돌기도 했다. 언제나 체벌은 치욕스러웠기에 친구들이랑 맞으러 가는 길엔 엉덩이에 방석을 넣는 둥 이상한 장난을 하며 깔깔대는 웃음으로 치욕스러움을 감추기도 했다.
학교에서 만든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혼나지 않기 위함 또는 점수를 깎이지 않아 대학에 잘 가기 위함이었다. 사회에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나쁜 사람으로 낙인 되지 않기 위함 또는 무엇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약속에 대한 포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일어났다. 맞아도 계속 지각하고 내가 별로인 것 같은 날에는 약속을 지키는 게 아주 힘겨웠다. 더군다나 나를 자주 내팽개쳤다. 의도치 않게 나를 포기했다.
얼마 전 책을 소개하는 유튜버 김미경 씨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의 장점에 대해서 설명하시다가 ‘포기’라는 단어에 대해 재정의를 내렸다. 바빠서 본래 할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포기’라 하였다. 대게 적극적으로 ‘나 이제 안 해’를 포기의 형태로 생각하고 있지만, 잊어버리는 수동적 행위 역시 포기라고.
스스로가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지, 어떤 꿈을 꾸고 사는 사람인지 잊어버리게 되면 나도 모르게, 수동적으로 , 순순히 삶에 대한 포기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나의 선생님도 충분히 다정하게 나의 체벌의 이유를 납득시키셨지만 모든 숙제와 약속의 과정의 전제가 소중한 나와 함께 나아가기 위한 연습임에 더 무게를 두었으면 어땠을까. 너무 바라는 걸까 싶다가도 이제 와서 알아 다행이다. 내게 그런 말을 더 자주 해주어야지. 나를 포기지 말라고. 계속 알아차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