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인철 Jul 23. 2022

아버지는 미소 천사

아버지의 다섯 번째 추도식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허술하고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체구는 작지만 결단력이 강했던 아버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육체노동을 했던 아버지는 집에 오시면 고봉의 식사를 하고 이내 이부자리를 펴고 주무셨다. 아버지의 세 아들 중 가장 아버지를 닮지 않았던 나는 삶에 찌들고 엄했던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당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어려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크게 가지셨던 것 같다. 그렇지만 또한 가장이라는 책임을 결코 벗어버리지는 않으셨다.


나는 맨날 뭘 흘리고, 잊어버리고 다녔지만 공부는 잘 했다. 발표도 잘 못했는데 시험은 잘 봤다. 월말고사를 보면 매달 상장을 탔고, 벽에 붙여 둔 상장으로 집 안은 상장으로 도배를 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공부를 잘 하는 아들을 둔 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떻게 그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세 아들 중 둘째인 나만 데리고 남산 어린이회관에 놀러 갔던 게 기억난다. 난 혼자 게임을 하고 놀고 아버지는 옆에서 구경하고 그런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세운상가에 가서 처음으로 선풍기도 샀다. 공부하는데 더우니까 선풍기 바람 쐬면서 공부하라고. 집에 가서는 나 때문에 선풍기가 생겼다고 으스대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팔 남매의 둘째 아들이지만 할아버지와 백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한참 동안 팔 남매의 가장 역할을 했다. 집안의 제사도 모시고 제주 역할도 말없이 하셨다. 아들들은 학창시절부터 교회를 다녔고, 이 때문에 역정을 많이 내시기도 했지만, 큰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교회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한국식과 기독교식의 하이브리드였다. 제사를 드리는 동안 사촌 형제들은 모두 절을 했지만, 우리 형제들은 기독교 식으로 잠깐 기도만 하고 자리를 나왔다. 작은 아버지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버지는 짐짓 못 본 체하며 막아 주셨다. 그리고 아들들이 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아버지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제주 역할은 계속 하셨지만. 그런데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힘들다고 하시면서 제주 역할을 큰 집의 장손에게 넘기셨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을 모아놓고 당신이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당신도 집안의 제사에 발길을 딱 끊으셨다.


아버지는 교회를 일흔 살이 넘어서 다니시기 시작했지만 열 살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믿음을 가지셨다. 일흔이 넘으시면서 세 아들 다 장가보내고 손주도 보고 하니까 어깨에 얹혀 있던 가장의 짐이 가벼워 지셨는지 지금 봐도 그 시절 아버지 사진의 표정은 순수한 아기 천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연세가 드시면서 정신도 조금씩 흐릿해지셨고 그래서 아버지와의 대화도 좀 더 일상적으로 되었다. 하루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가 아버지는 어떻게 기도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우리 세 아들, 며느리, 손주들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다 기도 하지’ 라고 하시며 거리낌없이 당신의 기도를 카세트 테이프 틀 듯이 읊어 주셨다. 오랫동안 간절히 반복한 느낌이었다. 그 중에 나에 대한 기도는 이런 것 이었다. 둘째 아들 회사에서 일 잘해서 승진하고 전무가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아버지 기왕이면 사장해 달라고 하지 왜 전무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냐고.
   “사장은 힘들어. 전무 정도면 좋아.”
아버지는 대기업의 임원으로 승진해서 다니던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는 결단력이다. 이제 돌아 가신지 오 년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결단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들들을 위해서 옛날의 관습을 본인이 끊으시고 바꾼 것이다.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아직도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나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많이 바뀌었다. 나름 결단력을 가져 보려고 한다. 그런 DNA가 조금은 있을 거라 믿는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년에 들어서 아이들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닌 사진을 남기셨다.  나도 노년이 되면 아버지처럼 순수한 미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가장의 짐을 벗고 모든 사람에게 미소를 주는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여든 살 노모는 아직도 사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