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9월 24일 개봉했다.
장르는 스릴러·코미디. 13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화목한 가정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회사에서는 주인공 유만수에게 장어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아들 시원은 태블릿을 들고 넷플릭스를 보고,
딸 리원은 홀로 2층 베란다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모여 화목하다.
만수는 그들을 불러 껴안는다. 귀여운 리트리버 두 마리 시투와 리투도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만수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 다 이루었다."
햇빛과 예수의 이미지가 맞물린다.
요한복음 19:28-30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는 유언'이었던' 것(대단히 놀랍게도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이다)을 남긴 후에 고개를 숙인다.
예술 작품에서 흔히 나타나는 예수 후광의 이미지는 이것에서 연유한다.
전지전능한 신 본인인 동시에 그 신의 아드님이기도 한, 이 존재 자체가 논리적인 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본다. 햇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같이 떨어졌으리라.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 후광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한다.
만수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햇빛은 그의 얼굴로 낙하한다.
죄의 대속은 없다. 후광도 없다. 신성도 없다.
스크린에 나타난 건 한 개인과, 그가 짊어진 가족이다.
그는 신이 아니고, 신의 아들도 아니고, 신적인 영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자 노동자이다.
다음 씬은 만수가 25년을 다닌 공장으로 넘어간다.
기억력이 유난히 나쁘기 때문인지, 감정에 호소하기 위한 단어들을 손바닥에 적고 일장 연설을 연습한다. 동료들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나서주는 만수에게 고마워한다.
그러나 동료들 앞에서는 그럭저럭 연설을 보여줬지만, 사장 앞에서는 제대로 말할 기회조차 없다.
해고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사장은 매몰차게 그를 무시하고 차에 타고, 수행원들은 만수를 제지한다(이 영화의 포인트는 제지라는 단어의 라임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포인트를 주었다. 적어도 나는 본 영화의 코미디 요소보다는 재밌었다고 자부하는데, 방금 이리 길게 늘여 설명하는 순간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쯤 하겠다.)
사장이 탄 차는 매정하게 출발하고, 공장의 소음 속 울려 퍼지는 건 만수의 손바닥에 적힌 파편적인 단어 몇 개뿐이다.
'해고, 도끼, 모가지······.'
이제 카메라는 어딘가 정신적으로 모자라 보이는 실업자들을 비춘다. 사이비 교주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 어떤 여성(보통 여성은 남성 교주와 부동산, 그중에서도 특히 성을 헐값에 거래하는 피해자 쪽인데, 역시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에는 여성 서사가 있다. 어디선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을 중심으로 의자들이 원을 그리며 배치됐고, 생기를 잃은 남성 실업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다. 치통이 심해보이는 만수도 그중 하나다. 관자놀이를 강박적으로 두드리면서 싸구려 향을 풍기는 긍정적인 말들을 되뇌이게 한다. "사랑하는 내 가족은, 내가 새 기회를 찾는 동안 온 마음으로 나를 지지한다"
이런 말을 누군가의 요구에 의해서 내뱉는 건 실로 비참한 일이다. 작위적인 웃음을 얼굴에 걸고 본인을 애 다루듯 하는 인간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기존에 그러한 믿음이 있었더라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의심이 싹을 틔운다.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요구받는 것 자체로 우리는 코끼리를 떠올리는 법이다.
가족 앞에서는 석 달 안에 무조건 재취업에 성공하겠다고 선언한 만수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1년이 넘도록 마트에서 일을 하며 면접장을 전전할 뿐이다. 어느 날은 회장의 스케줄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기회를 받고 싶으면 지금 당장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무리한 부탁까지 받는다. 만수는 지인의 귀띔으로 중요한 질문을 미리 입수하고 면접장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햇빛의 이미지가 또 한 번 등장한다. 면접관 중 한 명의 얼굴은 후광 때문에 아예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다시 만수의 얼굴은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낸다.
예수와 인간의 위계는 면접관과 만수의 위계로 투영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은 가히 신성한 절대성마저 띠게 되는 것이다. 이 위대한 영화의 서사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절대적인 계급에서 생긴다. 그러나 직접적인 서사는 노동자가 노동자에게 행하는 잔혹한 폭력에 있다. 자본가-노동자의 위계는 섬나라들이 좋아하는 입헌군주제 같은 것이 된다. 위에서 군림하되,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절대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매정한 자본가가 예수처럼 굳건히 저 위에서 관망하는 동안, 미천한 노동자들은 서로의 몫을 가지고 생계를 건 제로섬 게임을 펼치는 꼴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들께서는 이처럼 부조리한 스크린 속 서사 구조에서, 스크린 바깥에 실재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크게 감명받으신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해 본다.
지금까지를 이 영화의 전반부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문 제지'라는 회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다다른다. 여기서 '문제지'라는 회사의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만수는 '문 제지'에 찾아가, 화장실 앞에서 인사담당자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중 선출을 처음으로 만난다. 선출은 만수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남들 볼일 보는 곳에서 뭐 하는 짓이냐"며 모욕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건네주고 바에서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한다. 만수는 바에서 포도주스를 마시며 선출의 SNS를 염탐한다. 만수에게 있어서 선출은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열등감을 자각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만수는 선출이란 인물에게 집착하게 되고, 그를 미행하던 중에 한 건물의 옥상에서 고추 분재를 떨어뜨려 선출을 살해하려 하기까지 한다. 무거운 분재를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 올리자, 분재화분의 밑바닥에서는 물이 만수의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진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성별을 생식기의 돌출 여부로 구별한다는 발상 자체가 구시대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유달리 성인지감수성이 발달한 분들께서는 부디 박찬욱 감독님의 춘추를 고려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아무튼 대단히 보수적인 시각을 차용할 때, 고추라는 식물에서 남성성과 남근을 연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리라 믿고 싶다.
따라서 이 장면을 남근주의의 극단적인 발로라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예 생뚱맞은 해석이 아닌 것이, 영화의 첫 장면부터가 아내 미리의 대사를 통해서 해설됐듯이 "남자에게 좋다는" 장어를 굽는 만수의 모습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만수가 고추 분재를 떨어뜨리기 직전 그를 제지한 것도 한 여성(그 캐릭터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밝힌 바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이었다. 결국 만수의 머리를 적시는 고추 분재의 물은, 만수를 사로잡는 남근주의의 형상이다.
이제 만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틀이 생겼다. 여성으로 추정(물론 이는 나의 추측일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그 혹은 그녀 혹은 그것(?)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밝힌 적이 없다.)되는 원주인으로부터 고추 분재를 구매하고, 가족 중 만수 혼자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별채에서 정성스레 자신의 고추 분재를 가꾸는 장면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자본가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나약하지만 같은 처지의 노동자나, 여성, 아이들에게는 힘과 권위를 사용하고 잔혹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내 기억력의 한계로,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며 매 장면마다 코멘트를 달 수가 없음에 양해를 부탁드린다. 사실상 거의 전적으로 만수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졌던 카메라가 시원, 리원, 미리 등 주변 인물들도 비추기 시작하고, 여러모로 영화가 난잡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만수가 저지른 세 번의 살인에 대해서 먼저 다루고, 만수의 가족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만수는 '레드페퍼'라는 회사를 꾸며내서 채용 공고를 낸다. 그리고 자신의 재취업에 방해가 되는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고, 자신의 것까지 포함해서 경쟁력을 비교하고 줄 세운다. 채용 공고 중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있다면 "사진은 클수록 좋습니다"라는 만수의 말이다. 남근주의적 시각에서 크기가 클수록 그것이 '힘/권위에서의 우위'라는 의미로 환원되곤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만수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실제로도 가장 사진이 큰 이범모가 채용 1순위, 그다음 크기의 고시조가 채용 2순위였으며, 만수는 그들을 죽인 다음에야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살인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유독 구범모라는 인물과 관련해서만큼은 현실적인 개연성이 배제되고,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한 극적 허용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범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만수가 급하게 보러 왔던 면접을 마치고 건물을 나설 때였다. 범모는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폐인처럼 무언가를 뇌까리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범모는 '관자놀이 두드리며 긍정 문구 중얼거리기' 교육을 받는 장면에선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이것 자체로도 조금 의문이 들었다. 위태위태한 개연성에 대해서 말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범모의 실종 사건에 대한 경찰의 조사라든가, 그 종결에 있어서까지도 보란 듯이 논리적인 허술함이 드러난다.
주목할 점은 범모라는 인물은 만수가 자신을 투영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두 인물은 동일한 실직 상태, 펄프맨 수상 경력, 제지업에 대한 자부심, 정원 딸린 집에 산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따라서 범모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정원에서 개입했던 만수의 태도는, 이타적 배려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려는 이기적인 외면처럼 읽히기도 한다. 범모의 상황은 만수가 회피하고자 하는 미래의 구현이며, 이로 인해 범모를 제거하려는 충동은 단순한 경쟁자 제거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파멸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말소하려는 심리적 요인이 살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코믹하게 연출된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범모를 죽이기 위해 만수가 총구를 겨눈 때부터다. 커다란 음악소리가 범모의 방과 극장을 장악하고, 만수와 범모의 대화 소리는 묻혀서 자막까지 사용된다.
만수와 범모, 범모의 아내 아라까지 셋이서 추한 꼴을 보이며 총을 두고 난장판을 벌이기도 하는 등, 끝내 범모가 죽기까지의 과정이 길게 늘어진다.
"해고당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후의 태도가 중요한 거야!"라는 아라의 비난은 범모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만수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했다.
단계적으로 잔혹해지는 만수의 살인극에서, 첫 번째 살인은 계획 속에 이루어졌으나 우발적인 면이 있다. 대화 중 실수로 범모에게 총을 쏘았고, 범모의 결정적인 사인도 아라가 쏜 총알이었다.
·두 번째 살인
두 번째 살인은 무척 특이하다. 일단 고시조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 자체가 워낙 부족하다.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살인 동기도 재취업의 걸림돌이라는 것뿐이다.
특별한 부분이라면 그가 손님 앞에서 딸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과 직후 손님이 말없이 나가는 장면에서 보이는, 약간은 비굴한 모습에서 만수가 딸 리원을 떠올렸으며 자신의 사정을 시조에게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구범모의 경우에는 만수가 그를 죽이기까지의 과정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면, 고시조는 오히려 살해된 후 시체로서의 비중이 큰 인물이다. 살인 직후 만수는 시체를 트렁크에 담고 집으로 싣고 온다. 그리고 별채에서 시체를 전기톱으로 토막 내려다 구역질 때문에 실패하고, 분재 철사로 묶어서 구 형태로 만들어버린다. 그 구는 거의 예술적인 경지였다.
그리고 아들의 악행을 상징하는 훔친 전자기기들 위에 시체를 얹고, 그 자리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어서 마무리한다. 그렇다, 하필이면 또 사과나무인 것이다. 사과는 전통적으로 서유럽에서 선악과로 여겨졌으며, 영화 초반부터 예수의 이미지까지 사용한 바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상징이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다시 말해 인류의 시조다)는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자신들의 나체를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야훼는 그런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아버리고 영원히 모든 인류에게 원죄가 부여됐다는 것이 이 선악과 이야기의 간단한 요약이다.
아들의 죄를 아버지 만수의 죄로 덮고, 그 만수의 죄를, 인류 전체의 원죄나 마찬가지인 사과나무로 덮는다는 것은, 악행을 '어쩔 수가 없다'라고 변명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죄를 인류 전체의 원죄로 덮고 돌리면서 필연성을 부여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세 번째 살인
최선출은 본래 만수가 가장 먼저 죽이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여성으로 추정할 가능성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듯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에 의해 제지당했었다. 세 번째 살인은 최초의 살의를 끝내 실현한 살인이다.
선출을 죽이면서 만수의 살인극도 마무리되는데, 그래서인지 가장 잔인한 방식이다. 만수는 끊었던 술을 입에 댔고, 그 안에 내재했던 폭력성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앞선 두 번의 살인에서는 마지막 남은 인간미 정도는 있었다. 구범모의 경우에는 총을 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했고 그의 죽음에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으며, 고신조의 경우에도 차마 전기톱으로 시체를 토막 내지는 못하는 등 만수 자신이 인간으로서 지켜낸 최후의 보루는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출을 죽일 때만큼은 잔인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중요한 부분은 만수가 술을 몰래 버렸으며, 퍼마시지 않았다는 거다. 마지막 살인에서 보여준 만수의 잔혹성을 전적으로 술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해석이다. 실제로 만수의 인간성이 말살된 시점은 술을 마신 순간이 아니라, 스스로 펜치를 들어 충치를 뽑은 순간이었다.
치아는 곧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내지는 최후의 양심의 상징이다. 영화 초반 만수에게 굴욕을 줬던 선출의 입을 빌린다면 '부끄러움'이란 단어로 표현해도 좋겠다. 존엄성과 양심이 흔들리며 아파하던 한 인간은, 그것을 아예 빼버림으로써, 비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이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고, 술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알코올의 개입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실제로 살인 과정에서 만수의 분별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내로부터 걸려온 영상통화를 받기 전에 혹시 입가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피부터 닦는다. 시체 처리도 철두철미하게 해내며 타살 혐의점을 없애기까지 한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보루를 무너뜨린 것은 술이 아니라 만수 그 자신이었다는 얘기다.
# 시원, 리원에 대하여
시원은 면도를 할 나이가 다가오는 사춘기 소년이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그의 존재와 관련된 어떤 비밀이 암시되고, 결국 만수와 미리의 대화를 통해 시원이 만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점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 자체도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만수가 가족 사이의 솔직함과 신의를 강조하는 순간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한 직후였으며, 정작 시원에게는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시원은 서사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그는 휴대폰을 훔치다 경찰서에 끌려가지만, 만수와 미리의 중재(?)로 사건은 무마되고 훔친 물건들은 사과나무 아래에 묻힌다. 그러나 시원은 만수가 누군가를 죽이고 사과나무 아래에 죽인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미리에게 만수가 살인을 한 것 같다며 고백하는 것도 시원이다. 하지만 미리는 직접 사과나무 아래를 파서 진실을 확인하고도 그것이 시체라는 사실을 숨기며 '돼지'라고 거짓말한다. 이때 시원이 "아, 돼지···"하고 말끝을 흐리며 납득하는 장면에서, 그 발음은 어쩐지 '제지'처럼 들리기도 한다.
리원은 자폐 스펙트럼을 앓고 있는 어린 소녀로, 첼로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며 재지 한 음악을 듣기도 한다. 그녀의 반향어는 조금은 작위적이지만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리원은 맥락의 결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반향어란 본래 대화의 맥락이 상실된 말이며, 그녀는 집에서 첼로를 연주할 때조차 곡을 온전히 연주하지 않는다. 몇 개의 음만 반복적으로 긁어볼 뿐이다.
그런 리원이 집 안에서 첼로로 온전한 곡을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는, 나는 그녀가 마침내 어떠한 '맥락'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맥락이란 어쩌면 침묵된 진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살인을 저질렀으나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재취업이라는 보상을 얻었다. 그녀의 오빠는 도둑질을 했으나 피해자의 약점을 협박하여 벗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가족의 죄악을 덮어줌으로써 가정을 지켰다. 리원 역시도 시투와 리투를 다시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죄악과 거짓으로 인한 수혜자가 되었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매끄럽게 기름칠된 듯 보기 좋게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 사이에는 침묵된 끔찍한 진실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리원이 체득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 그녀가 연주하는 온전한 곡은 단순한 음악적 성취가 아니라, 가족, 더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죄악과 은폐된 진실이 맥락으로서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그것은 말로는 건네지지 못한 고백인 동시에 가족이 공유하는 공모의 침묵을 음악으로 드러낸 증언 같기도 하다.
# 영화를 보고나서
주관적인 감상평을 말하자면, 솔직히 정말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 건물을 나올 때까지 머릿속을 채운 건 "이게 대체 무슨 영화지?" 하는 의문과 비싼 티켓값이 아깝다는 후회였다. 대중 친화적인 영화라고 홍보하길래 봤더니, 이제껏 봤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에게 불친절한 영화였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거다. 웃음 포인트들을 알아채긴 했지만 피식하는 일조차 없었다. 뒤편에 앉은 중년 부부의 웃음소리는 어렴풋이 들렸던 걸 생각하면 세대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해석이랍시고 글을 쓰긴 했지만 난 이렇게까지 영화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주관과 취향의 영역이겠지만 나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 난잡하고 매력이 없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장면이 이야기의 흐름을 벗어나서 엇나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 대한 관람평을 읽어보면서 알아낸 한 가지 재밌던 점이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암호 메시지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영화 감상이란 암호 해석 경쟁과도 같다. 이런 사람들은 취향이라는 말 대신 관객의 수준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스토리는 분해되어야 하는 것이고, 상징은 파헤쳐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나 상징을 그것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거진 무슨 앨런 튜링의 환생이 따로 없다. 마침 이 영화에 사과나무라는 알레고리가 등장했던 바, 아, 물론 사과나무는 그들이 좋아하는 예의 그 빌어먹을 '알레고리'다. 따라서 나는 위대한 암호해독가분들에게 앨런 튜링처럼 사과를 먹어보는 건 어떤지 조심스레 권한다.
생각없이 웃다가 뭘봤나 기억도 못하는 신파 코메디영화에 익숙한 mz가 1.2점 별점테러하는건가. 이정도 영화가 지루하다면 쇼츠나 보길. 난 2시간 넘는 러닝타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재밌고 긴장감 넘치게 봤음. 40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 되어 보니 웃으면서도 씁쓸해지고 자꾸만 생각하게하는 블랙코메디. 연기좋았어요. 잘봤습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관람평이다. 참고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관련해선 단 하나의 수정도 가하지 않았다.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고귀하신 양반 나리의 글을 미천한 나로서는 감히 고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생각 없이 웃다가 뭘 봤나 기억도 못하는 신파 코미디 영화에 뇌가 절여진 MZ 세대라 별점 1점 테러를 해버리고 말았고, 더욱이 습관적으로 쇼츠와 릴스를 보는 일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던 때라, 역시 삶의 관록이 깃든 통찰은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를 절감했다. 나도 이 분 나이에 닿을 때까지 20년 하고도 몇 년 정도를 더 살다 보면 이 존경스러운 양반 나리의 발끝까지는 닿지 못하더라도, 향기로운 발냄새(그렇다, 품격은 발냄새라고 예외로 두지 않는다.) 정도는 맡을 위치까지는 정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통렬한 비판 끝에는 배우들에 대한 칭찬과 품격 있는 감사까지······. 아아, 그야말로 품격 있는 어른의 대표 격이다.
이쯤에서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잠깐만 해보자. 다시금 강조하건대,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웃으면서도 씁쓸해지고 자꾸만 생각하게 하는 블랙코미디'에서 다루는 노동자 사이의 폭력적인 관계를 다른 곳에도 차용해 보자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영화를 본 관람객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 그 자신과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수준을 운운하고 집단을 일반화하여 깎아내리는? 음,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영화를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주제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역시 아무래도 나는 잘 모르겠다.
글을 마무리하겠다. 영화에 대한 생각과 리뷰에서 마지막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던 것 같지만, 마무리하며 읽어보니 개인적으로는 나름 재밌게 쓴 글인듯싶다. 다소간 거칠게 느껴지실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유머'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