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에 빠지게 된 순간

by Eden

어릴 때 보던 만화에는 공식처럼 두 주인공이 나왔다. 밝고 명랑하고, 어딘가 덤벙대는 캐릭터와 친절하고 차분한 캐릭터. 명랑한 캐릭터는 결국 모두에게 사랑받고 심지어는 미취학 어린이들에게 반칙과도 같은 분홍색 옷만 입었다. 그러면 어린 나는 꼭 파란 옷을 입은 차분한 캐릭터를 더 좋아하곤 했다. 그리고 걔가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를 주변에 알리고 설득했다. 여전히 분홍 옷주인공의 인기를 이길 순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시작점이었다. 나는 덜 조명받는 것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것을 힘써 알리는 걸 좋아했다. 이런 성격은 고이고이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꿈틀대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다시 한번 인생의 갈림길을 마주한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해오고 싶었던 공연과 뮤지컬에 대한 진로,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경영학과라는 진로. 둘 다 매력적이지만 ‘성적에 맞춰서’ 혹은 ‘취직이 잘 되어서‘라는 이유로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내가 세상에 진 것 같은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들었다. 고작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적힐 글자지만 그 몇 글자에 오랜 밤을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공연이 너무 좋지만 배우보다는 공연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기획의 과정은 경영학과에서 오히려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세계로 한 발을 내디뎠다.


경영학과를 목표로 하고 사회적 기업 동아리, 창업 동아리에 가입해 기업이 하는 일에 대해 견문을 넓혔다. 다행히도 가입한 사회적 기업 동아리가 체계적인 시스템은 갖춘 동아리여서, 기업을 방문해 직접 미팅도 해보고 우리끼리 나름 열심히 스터디도 했다. 그때 내 안에 있던 파란 옷의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다시 눈 떴던 것 같다. 빛을 비춰주고 싶었다. 너무 좋은 일을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그들을 알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사회적 기업 마케터라는 거창해 보이지만 소박하고 뜨거운 꿈을 꾸고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아,

모든 것은 예상을 뒤엎었다.

마케팅과 경영에 대해 더 심도 있게 배우고 싶었지만 마케팅 수업은 타 경영 전공수업 보다 학점을 더 잘 준다는 이유로 수강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팀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3: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학회는 내용의 본질보다는 ppt 구성에 더 집중했고, 1학년의 의견은 깨끗이 묵살당했다. 물론 갓 1학년이 된 스무 살의 의견이 얼마나 뛰어났겠냐 싶지만은, 기나긴 회의 끝에 결국 고학번 선배들의 의견으로 답이 정해지는, 그들만의 리그 속의 나는 그저 하나의 구경꾼이었다. 그걸 계속 반복하니 마치 답이 있는 것처럼 늘 비슷한 결과물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주도해서 하는 공모전도 다르지는 않았다.

세어보니 3년 동안 마케팅 관련 공모전만 6회 정도 나갔다. 반년에 한 번씩은 나갔는데 제대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이 없다. 이해가 간다. 나와 친구들도 어느 순간 기계처럼 온라인/오프라인 마케팅 방안으로 나누어 온라인은 서비스 플랫폼, 콘텐츠마케팅, 오프라인은 옥외 광고, 팝업 스토어 등의 참여 마케팅. 여기서 기업의 특색에 맞춰 색깔을 조금씩 입혀주고 기계처럼 기획안을 찍어냈다. 친구 집에서, 과방에서, 도서관에서 밤새며 기계 같은 기획안을 만드는 일이 반복됐고 어느 순간 권태가 찾아왔다. 이 감정을 느낄 때쯤 나 역시도 고학번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도 색을 잃어버린 내가 어색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감이 없어져 인턴에 지원도 못했다. 어차피 떨어질 걸 알고, 회사가 나를 뽑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걸 아니까. 무기력에 지쳐갈 때쯤 나를 유일하게 즐겁게 해 준 것은 스토리텔링 수업이었다. 성격을 분석하고 매력을 뽑아내 주인공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과정. 팀 회의가 끝나도 혼자 몰두해서 더 수정하고 거리를 걷다가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했다. 이 과정이 그냥 너무 즐거웠다. 덕분에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교내 연구 성과 발표회에 나가 수상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돌고 돌아 다시 나의 초심을 생각했다.


빛이 비치지 않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이 사람을 세상에 알리는 것.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알릴 수 있는 마이크를 쥐는 것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일이었다.

나는 내가 돌아왔다 생각했다. 떨어진 공모전과 알맹이 없는 대외활동이 만들어낸 공백, 포기하지 못한 공연에 대한 애정으로 공연장에서 근무한 시간들은 나를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목표를 길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무지였다.


다시 한번 마음을 잡고 대학원에 왔다. 마케팅의 본질은 사람과, 세상과의 연결이라 생각이 들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있다. 이전의 경험은 내게 사과를 알기 위해서는 배를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인문학과 철학을 사랑한 시간도 브랜드의 본질을 꿰뚫는 시야를 주었다.


여전히 사랑하는 브랜드들이 많다.

돈이 모든 가치를 치환할 수 있는 시대에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자신만의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브랜드들이 있다.

수려하진 않아도 담백히, 꾸준히, 마음 담아 그 이야기들을 모아가고 싶다. 이 모음이 또 훗날의 내게 선물이 되어 돌아오길 바라며 조금씩 쌓아가고자 한다. 그렇게 내가 다시 마케팅에 빠진 이유를 생각하며 성장할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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