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기 전에'와 생활공작소가 만났습니다
1970년대 개업한 을밀대가 있는 염리동 골목, 한쪽에 자리한 수상한 가게가 있다. 이곳은 여느 가게와는 다르게 상호가 적힌 간판 하나 없다. 간판이 걸려 있어야 할 자리에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계와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하루하루 넘어가는 달력만에 그의 가게를 드러내고 있다. 이곳의 이름은 바로 "녹기 전에". 소문을 듣자 하니 아이스크림 가게란다. 단지 아이스크림을 판다기엔 미심쩍은 이곳. 무더운 여름, 모든 것이 녹아버리기 전에 생활공작소가 찾아갔다.
아이스크림이요? 달콤하지만 아름다운 존재죠
아이스크림을 긁어먹었을 때 보이는 입자가 아름답다는 그는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작했다. 하고많은 가게 중 아이스크림 가게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이 지닌 감각 중 가장 질리지 않는 감각인 미각을 따라서라고. 게다가 쿼터 사이즈의 아이스크림도 뚝딱 해치우는 그의 먹성에 따라 아이스크림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단다.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는 사연처럼 이곳의 아이스크림은 다소 재미있다. 고수 맛, 오이 맛, 감자 맛 같은 제법 도전적인 재료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가 하면, 판매하는 아이스크림이 매일 다르다.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젤라또와 아이스크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타일로 소르베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알쏭달쏭한 정체성과 다양한 메뉴는 모두 녹기 전에 사장님(이하 녹싸님)이 일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와 대화해 본 결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는 아이스크림은 사실 거들 뿐이었다. 그저 미끼일 뿐이다. 그가 아이스크림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 가게 이름이 '녹기 전에'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녹싸님. 뭘 전하고 싶은 거죠? "녹기 전에 즐겨야죠."
녹기 전에, 그러니까 늦기 전에
"저는 죽기 전에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무수한 인터뷰를 통해 했을 이야기로 입을 땠다."저는 수많은 행복의 순간이 있겠지만, 죽기 전에 가장 행복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경험이 많아야 하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3년 전쯤 생각이 바뀌었죠." 그는 뭐든 남들보다 빨리 질려 하는 편인데, 아이스크림을 만들면서 오랜 시간 질려 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앞으로도 질릴 가능성이 적겠구나-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5년 직업설을 정리했다.
*5년 직업설 : 어떤 직업이든 5년쯤이면 지겨워 바꿀 가능성이 높다는 녹싸의 가설
"아이스크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녹기 전에 먹는 것이 제일 맛있거든요.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아이스크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녹아요. 녹기 전에, 그러니까 늦기 전에 시간을 잘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기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가이드'도 집필했다. 지난 시간, 가게를 운영하며 배워 온 것들을 엮은 접객 가이드지만 키오스크나 로봇이 격렬하게 침투하고 있는 식음료 현장에서 매우 고전적인 방식으로 사람이 주는 좋은 기분과 사람이 행하는 응대와 접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이드의 내용이 한편으로는 그저 도덕적이라 매일 합치하기엔 어려울 수 있으나, 틀린 말을 써놓지 않아 스스로 채찍질하기 위한 용도이기도 하다는 녹싸. 책을 읽으면 녹기 전에가 존재할 수 있었던 호흡과 생명력, 그 자체를 공유하는 기분이라고.
좋은 기분과 좋은 기본의 만남, 생활공작소
녹기 전에와 함께 하고 싶다는 속내를 먼저 비춘 것은 당연히 생활공작소였다. 디자인 어워드 수상 기념으로 만든 기프트 박스를 전달하기 위해 DM을 날린 것이 인연이 됐다. "DM을 받자마자 왜 주는 거지? 대체 왜? 나를 어떻게 알아서? 손님이었나? 하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웃음)."그는 저 때까지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기프트 박스가 생활공작소의 큰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녹싸님이 생활공작소 제품을 사용 중이었던 것은 우리도 몰랐던 놀라운 수확.
"생활공작소는 익선동에 있을 때부터 써왔어요. 제가 예민한 피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물이 닿는 직업이다 보니 세제가 손을 많이 망치더라고요. 그렇게 찾다가 만났죠. 실제로 피부에 무리가 가지 않고 디자인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당시엔 제품명에 키치 문구도 재미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는 이번 협업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한다고 했다. 먹는 브랜드와 먹어서는 안되는 브랜드의 협업이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협업이라 생각했다고. 생활공작소는 일상을 청결하고 안전하게 가꾸며 시간을 보내게 한다면, 녹기 전에의 아이스크림은 정서적 안정과 삶의 질을 높이기에 결이 비슷하다 느낀단다. 그는 무엇보다 손님들에게 새롭게 연결된 브랜드와 브랜드의 협업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신 분들께 뭐라도 하나 쥐어 드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마운 생각이 든다고.
종말 할 것 같은 세상에서 무한도전 같은 가게
고객들에게 어떤 곳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이 뻔한 질문에도 평범하지 않게 대답했다. "녹기 전에는 무한도전과 비슷한 포맷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무한도전'프로그램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웃음). 무한도전이 뭐 하는 건데?라고 하면 예능!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설명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녹기 전에도 마찬가지예요. 아이스크림 가게!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아이스크림 가게라고만 하기엔 이상하니까요."
그는 요즘들어 즐거움과 재미 이상으로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가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단다. 어줍잖게 나마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보탬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고. 그는 이런 생각으로 벌써 많은 것들을 기획중이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인스타그램을 팔로우 하도록 하자.
여담이지만 익선동에 있을 때와 지금은 가게도, 녹싸님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세상을 벗어난 도인이 되고자 한 것도 있고(웃음), 또 하나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면 무조건 전문가처럼 보여요. 얼핏 보면 도예가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전문가처럼 보이는 것이 나쁘지 않아요."
가게는 어지러운 듯 고유의 질서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뇌와 같다고 했다. "저는 감각이란 게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전체를 보고 판단해서 이 공간을 만들었다기 보단 좋아하는 것들을 숙고해서 하나 둘 넣다 보니 지금의 공간이 됐죠. 컨셉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 흥미로운 뇌속에 들어와 있는 격이었다. 물론, 의도치 않게 우측에 앉아 측두엽이 되긴했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있어 행복은 무엇인지 물어봤다. 그는 도파민이나 엔도르핀의 분비보다 스스로의 신진대사가 무난하고 평이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그럴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단순히 불행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는 목욕, 산책, 불멍으로 행복을 되찾는다는데 혹시 문득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 느낀다면, 시간이 달콤하게 흘러갈 녹기 전에를 찾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