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느끼는 것' 은 '우리가 아는 것'일까요?
철의 표면이 주는 쾌감, 석재의 묵직함, 하얀 대리석의 아름다움.
'물성' 이란 보통 어떤 사물의, '물체의 성질' 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손가락을 들어 차갑게 연마된 스테인리스의 표면을 쓸어 봅니다. 매끄럽고 날카롭고, 현대적이며 공장이나 기술의 힘이 닿은 문명의 느낌입니다. 흙은 따스하고 부드럽고, 모래는 조금 더 까끌합니다.
이와 같은 이른바 '물성' 들은 이어서 각종 의미를 가지고 디자인이나 건축 등 여러 곳에서 활용됩니다. 가볍고 투명한 유리는 현대의 상징이며, 말끔하게 정돈된 콘크리트 표면은 순수한 감상을 느끼게 하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표현은 물질 자체의 성질보다는 우리가 물질로부터 얻는 감상에 가깝습니다.
사전에서 찾아 본 '물성' 은 물질 자체의 물리적 성질을 논하고 있습니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이를테면 전기적 물성, 기계적 물성, 열역학적 물성 등입니다. 물질의 탄성은 기계적 물성에 해당하고, 유전율, 유전상수 등은 전기적 물성입니다. 유전율이 무엇이냐고 하면…….
아이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물질의 끓는점과 녹는점(이것은 열역학적 물성입니다)을 기준으로 물질에 대해 어떤 인상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물질의 성질에 관한 우리의 감상이었지요? 그러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
물질에 대한 우리의 감상은 어떻게 획득될까요? 감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원초적인 것일까요?
시작부터 되짚어 단서를 주워 봅시다. 먼저 우리가 어떤 물질에 대해 느낄 수 있으려면 그 물질의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존재를 알려면 그것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수만 광년 떨어진 저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물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우리는 그 물질의 물성을 모르지요. 또, 물성을 물질에 대해 인간이 형성하는 감상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우주 공간에 분포하는 암흑 물질의 물성에 대해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만난 적 없으니까요.
결국 물질의 물리적 특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 말고, 어떤 물질에 대한 감상을 알려면 인간은 그 물질과 접촉해야만 합니다. 보든, 만지든, 어떻게 하든 감각으로 그 존재를 인지해야만 하지요. 물성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근본적으로는 물질의 분자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물성이지만, 물질은 인간에게 감각으로 찾아와 보다 직관적인 형용사로 환원됩니다. 섬유의 부드러움, 도자질의 매끄러움, 물의 철벅거림, 철의 무거움.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감각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직관적인 감상' 이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두 번째 질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감상이란 사실 꽤 복합적인 층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 비윤리적 실험이라 널리 비판받고 있는 <아기 알버트 실험(1920)>에서 심리학자 존 왓슨은 9개월 된 아기 알버트에게 '동물에 대한 공포' 를 심어 주려고 의도했습니다.
그는 아기의 앞에 흰 쥐를 풀어 주고, 아기가 쥐에게 호기심을 보여 만지려는 순간 망치로 쇠막대를 때리는 커다란 소리를 들려 주어 공포에 질리게 했습니다. 쥐를 보여주고, 소리를 들려주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공포를 학습시키자 알버트는 곧 쥐가 나타나기만 해도 울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이 공포는 토끼, 물개 털 코트, 털(수염)이 달린 가면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영아를 이용하여 공포 정서를 심어 주는 이와 같은 실험은 다시 행해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만, 인간의 조건적 정서 반응에 관한 이 대표적인 연구는 인간이 세계에서 주어지는 재료들로 정서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 정도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정서, 인간의 감상은 세계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석재는 묵직하고 웅장하다고 여기는 것은 암석의 분자 구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있는, 석재로 된 묵직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많이 보아서일까요?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인간이 물질에서 느끼는 인상이란 주로 접한 가공 형태에도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유리는 투명하고 단단하지만 가볍고 잘 깨지기도 한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태어나서 줄곧 묵직한 큐브 형태로 절단된 유리 덩어리만을 보아 왔다면 유리에 대해 '부서지기 쉬운' 이라는 감상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은박지처럼 얇게 가공된 형태의 철만을 접했다면 우리는 철이 '가볍고 탄성도 있지만 꽤 질기기도 한' 무엇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감상이란 감각으로 느끼는 것들이기도 하고 감각으로 느끼도록 유도된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물질에 대해 주어지는 다른 단서들까지도, 살면서 습득하는 넓은 경험 속에서는 감상에 포함되고 흡수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세계에 대한 광활한 데이터 조각 모음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건축이 건축물이라는 하나의 작품보다도 그 곳에 머물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환경을 만든다고 가정하고, 그 때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의 일부로 물성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즉 '물성과 상호 작용할 사람들' 을 공통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각자가 습득하는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감각의 데이터가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하나의 집단이나 국가를 넘어서 이 지구의 인류 문명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감각의 데이터 말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와 물리적 환경이 다른 외계의 존재를 가정한다면 아마도 그들이 물질에 대해 느끼는 인상이란 인간과 다를 것입니다. 굳이 그 정도까지 가정하지 않더라도, 신체 구조와 인지 체계가 인간과 다른 여타 동물들에게도 물질이 주는 인상은 인간과 다른 의미를 띠지 않을까요?
인간이 논하는 물질의 감상은 그러므로 물리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도 않고 인간 개인의 자아에 완전히 대비되는 무엇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인간 공유의 정신 자원― 말하자면 문명의 자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를 뒤집어서 놓아 봅니다. 우리는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