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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엠 Jan 14. 2020

(3) 물질, 대상, 그리고 존재에 대한 물음

물질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이기도하고 우리가 아니기도 하고, 우리의 존재와 함께하기도 하고 우리가 없어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주의 넓이만큼 수많은 ‘우리’가 아닌 무언가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을 실제로 알 길은 결국 우리가 직접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길 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물질은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에 한정되어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물질은 대부분 ‘대상’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인지 세계와 조우합니다. 이 대상은 때로는 자연이 빚어낸 걸작이기도하고, 때로는 인간이 필요 또는 심미적 목적을 위해 가공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 본질은 ‘우리’가 아닌 다른 ‘대상’이란 사실은 명확하죠. 인간은 인간의 몸뚱아리 하나만 갖고 살 수는 없기에 끊임없이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계를 맺는 대상은 어떤 기준으로 ‘우리’의 선택을 받을까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필요성’입니다. 인간이 연명하기위해 필요한 물, 음식, 옷, 집, 이동수단 등등이 되겠죠. 처음에는 채집을 통해 필요한 것들을 얻었지만 점차 필요한 입들이 많아지고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직접 필요한 것을 재배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필요한 물건이 부족하거나 남는 생산물이 생길 경우엔 필요한 사람들끼리 교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환의 규모가 커지자 각 물건에 따라 상이한 가치가 생기고 그 가치를 결정하는 재화가 생기고.... 어이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같네요. 네 맞습니다. 바로 자본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물건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의 맑선생이 빠질 수가 없죠. 마르크스는 물건에 가치가 생기고 재화가 되는 원리에 대해 그의 대표적 저서인 <자본론>에 명확하게 정리를 했고, 더 나아가 그 동안 계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 인간의 노동에 대한 가치까지도 눈에 보이는 수치로 정리를 하였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빨간 이야기를 할 때까지 아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물질’, ‘대상’에 대한 이야기이니 자본론 1권 1장에만 머물기로 하겠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 초판본






마르크스의 ‘대상’에 대한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치가 있는, 즉 ‘재화’가 될 수 있는 물건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소유하는 물건들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또는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언제든지 교환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필요도 없고 엿 바꿔 먹을 수도 없는 물건은요? 재화로서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일단은 쓰레기죠. 같은 종이쪼가리여도 지폐는 지갑에 넣어 다닐 가치가 있고 코 푼 휴지는 가치가 없는 것 처럼요. 지폐도 코 푼 휴지도 분자 구조는 같을텐데 왜 한쪽은 적혀진 숫자만큼의 가치가 있고 한쪽은 돈 주고도 사지 않는 쓰레기일까요? 그 차이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성’을 지니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러한 유용성을 지닌 대상 또는 사물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도구’가 되겠네요. 인간이 사물의 존재와 조우하는 가장 원초적인 개념은 바로 사물의 ‘도구성’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도구로서 그 관계를 맺지 않은 쓸모없는 사물의 존재는요? 인간 문명 내에 존재하는 쓰레기라면 조금이라도 쓸모의 가능성을 착즙하기위해 그 형태가 바뀌거나 사라질 가능이 높습니다. 물론 사물의 의지가 아닌 인간의 의지로요. 최후의 마지막까지 도구성을 쪽쪽 착즙당해 잃어버린 사물은 태초의 모습으로 사라지거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집니다. 난닝구 하나 사서는 헤질 때 까지 입다가 걸레로 쓰다가 결국 마지막엔 소각장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난닝구라는 사물의 존재는 소멸하죠. 애초에 걸레가 된 시점부터 난닝구는 난닝구라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물은 그 도구성을 잃어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또는 애초에 인간을 위한 도구성 따윈 있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죠. 이 경우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물이 아닌 자연에서 생성된 대상들이 해당되겠네요. 이것들은 우리가 알기도 전에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존재가 인식에 선행한다 할 수 있습니다. 계속 존재라는 말을 반복하게 되네요. 이쯤에서 존재 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을 언급해야겠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아, 물론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라는 고귀한 단어와 연관될 수 있는 대상은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해당됩니다만, 요즘의 대세는 인간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향이니 이 글에선 존재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하이데거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세계에 한정된 인식론에 질문을 제기해주었던 중요한 양반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이용해 지각할 수 있는 속성에 한정되어있지만, 사실 사물 자체는 우리가 지각했던 것 보다 더 밀접하게 존재하고, 그러기에 사물의 사물성은 의식의 지각보다 선행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Caspar David Friedrich: Das Eismeer (1823-1824), Hamburger Kunsthalle






그래서 결국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하이데거 선생님?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업은 결국 다음 세대의 몫이고, 이를 위한 고행은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사물의 사물성을 찾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하이데거 선생이 그래도 반쯤은 편안하게 눈을 감고 계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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