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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zzy Aug 08. 2020

내 마음이 수없이 셔터를 눌렀던 순간

가족, 거짓이나 꾸밈없는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



7000km 떨어진 사막 나라 중동에서 승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한국은 ‘주거지’가 아닌 ‘방문지’ 혹은 ‘여행지’가 되었다. 여행 중 유난히 많은 사진을 찍으며 순간순간을 기록해두려 노력하는 나는, 찍고 또 찍으며 꽤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서울에서의 하루하루를 봉인해두려 애썼다. 그 사진 한 장이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함축시켜서라도 추억을 기록해두고자 하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오랜만에 서울타워를 마주했을 때, 몇 년 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나 요즘 소셜 미디어에서 핫하다는 카페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한복을 입고 경복궁 나들이를 갔을 때. 내 카메라는 쉴 새 없이 그 날의 햇살과 바람, 그리고 내 웃음소리까지 담아냈다. 임신한 친구와 거울 앞에서 그녀는 불룩해진 배를, 나는 20대 초반처럼 용감하게도 신고 나온 하이힐을 뽐내며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 한 장이 꽤 오래 지속되어 온 우리의 우정, 그리고 타인들은 알지 못하는 이 우정의 히스토리마저 대변하는 듯했다. 친구들과 좋다고 소주잔을 부딪히며 찍은 비디오는, 휴가가 끝난 후 돌아가 하게 될 어느 고된 미국 비행 후 도착한 호텔방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혼자 돌려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컷 한 컷, 2주간의 서울에서의 휴가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도저히 사진으로는, 그리고 비디오로도 담기지 않는 컷들은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할까. 사진이 없어 혹여나 잊게 되지나 않을까 겁이 난다. 퀄리티를 떠나 방법적으로 사진을 찍는 일은 참으로 쉬워졌다. 누구나 핸드폰으로 버튼을 한 번 누르면 그것이 곧바로 지닐 수 있는 기록이자 기억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 차마 그렇게 간단하게 담아낼 수는 없는 순간들은 어떻게 해야 기억해야 할까. 보다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렇게 적어둬야 하지 않을까. 피곤해서 바빠서 게을러서 등등의 이유로 세세히 적어두지 않아 사진만 남아 있는 수많은 소중한 순간들에 대해 그래도 나는 사진이 있어 감사했다. 기억의 일부를 지니고 있음에,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남아있음에. 하지만 이번만큼은 안 되겠다. 타지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길었던 14일간의 한국 휴가의 기억의 일부가 기록의 부재로 희미해져버릴까 봐. 그래서 나는 최대한 상세히 적어둬보려 한다.



이번 휴가에서 큰 일정을 차지했던 것 중 하나는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하고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일 조차 내게는 이제 일상이 아닌 일 년에 한두 번 이렇게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일이 되었으니까. 매일같이 최소한 아침, 그리고 되도록이면 저녁도 집밥을 먹었다. 비행이라는 일을 시작한 이래, 비행 후에 오는 극도의 피로와 게으름이 배고픔을 이긴 지 오래라 작아져버린 내 위가 벅차 할 정도로 매일같이 밥상은 풍요로웠다. 엄마는 왜 그리 밥을 잘 못 먹냐고 안타까워하다가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나는 밥은 반 공기도 못 끝내도 국은 솥째로 들이마시다시피 하며 여전한 국물 마니아의 위용을 드러냈다. ‘엄마, 혼자 살다 보니 국은 진짜 잘 안 해 먹어. 일 년치 국을 다 먹는 기분이야.’ 한을 풀듯 나는 그릇을, 아니 솥을 비워냈다. 우리 아버지는 이제 요리 연구가가 다 되셨다. 엄마에게서 대권(?)을 이어받은 지 제법 되신 주방 실세 울 아버지는 일상 요리뿐 아니라 무려 직접 된장 고추장까지 담그셨으니 이건 생각 이상의 레벨이었다. 특히나 나의 한국 방문 주간에는 내 취향과 의견을 고스란히 반영해 매일같이 다른 테마의 식탁을 볼 수 있었으니, 평소에 전기밥솥에 쌀밥조차 잘 안 지어먹는 나는 이런 호강이 다 어디 있나 싶었다. 이렇게 내가 사는 먼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 밥’을 먹고 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엄마와의 수다 시간이다. 그간 한참을 밀린 이야기를 며칠 만에 어떻게든 다 따라잡겠다는 기세로 나는 조잘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 어떤 형식이나 가식도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볼 일도,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없다. 나 자신을 그대로 보여도 되는 곳, 나를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되는 곳인 가족의 품에 있는 시간만큼은 말이다.



     평소에 대화도 잘 안 하고 심지어 서울에 있는 2주 내내 얼굴 보기도 힘들더니, 나 돌아가는 날은 기억하고 챙겨서는 짐 들어주겠다고 집에 일찍 와 있던 동생. 서울에서 도하까지 가지고 갈 무려 40kg가 넘는 짐을 척척척, 4층에서부터 1층까지 계단으로 말없이 다 내려준 그 묵묵함 뒤의 끈끈함을 어디 가서 과연 비슷한 모양새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은 사진은 내게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수없이 셔터를 눌렀나 보다. 또렷하게 그 장면들이 가슴에 콕 박혀, 공항 가는 길 내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택시 파업 탓인지 한참을 콜택시를 불러도 성과는 없고, 공항 리무진 막차 시간은 다가올 때 엄마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는 안 되겠다며 큰 도로로 나가야겠다며 그 많은 짐을 가지고 언덕을 내려가려던 차였다. 엄마는 있어보라 하더니 잠옷 바람으로 나가서는 15분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긴긴 언덕을 따라 내려가 그 멀리 큰 도로까지 가서 택시를 잡아오는 게 엄마의 사랑 방식이었다. 스마트폰 사용이 서툴러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하고, 한 번 말해줘서는 잘 기억 못 하는 엄마를 보며 아 이제 엄마가 아니라 내가 엄마를 챙겨야 하는 때가 왔구나 싶었다. 글쎄, 위기의 순간에서 엄마는 강해진다. 내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아직도 엄마가 내 보호자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엄마랑 찍은 사진으로 바꿨다. 한국 온 지 4일째 되는 날에 함께 나들이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엄마는 세련된 코트를 입고 내 선글라스도 빌려 썼다. 같이 찍은 셀카를 보니 왜 보는 사람마다 놀라며 언니 같다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 이 모습을 가지고 가야지, 싶었다. 근데 내 가슴에 남은 컷은 다른 장면이다.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아래위 세트로 되어 있는 파자마? 아니, 내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입던 운동복, 어느 행사에선가 나눠준 단체 티셔츠 등을 조합해 믹스 앤 매치 패션을 구사하는 우리 엄마다. 그러고 그저 무작정 택시를 잡으러 나가던 그 모습, 그 한 컷의 잔상은 내 마음속에 영원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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