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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화 May 20. 2016

스스로를 높여라. 너는 최고가 될지어다.       

   셀프 PR의 절대적 귀재,  진시황제

아득히 먼 옛날, 기원전 1200년 전 고대 이집트에는 악명 높은 왕 람세스가 있었다. 그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절대 권력자 람세스와 견주어도 좋을 만한 아주 강력한 통치자가 고대 중국을 다스렸다. 그의 이름 진시황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BC. 259, 1.~BC. 210, 음력 9, 10.)는 엄격한 법치주의의 기반 하에,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건설, 약 30여 년 동안 철권통치하였다. ‘폭군’, ‘만리장성’, ‘분서갱유’ , ‘불로초’ 등 진시황제를 상징하는 말은 많지만, 정작 그가 권력을 이용해 스스로의 위대함을 PR 하는 데 대단한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자기 PR의 귀재 진시황제, 그와의 인터뷰를 시작한다.  


인터뷰어 :  황제 폐하가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주변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주십시오


진시황제 :  흔히들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는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합쳐진 말이오. 춘추시대는 조상들 대의 일이니 짐이 알 바 아니고, 짐이 즉위했을 당시는 전국시대였소. 짐의 콧바람에 끽, 소리도 못하고 공중분해돼버릴 작은 나라도 끼어있었지만 대체로 위 사진처럼  진, 한, 조, 위, 연, 초, 제나라 등 7개국이 서로를 넘보며 쟁패하고 있었소. 그중에서 무력이나 경제적으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건 우리 진나라였소.


  짐이 13세 때 아버지인 선왕이 돌아가시고, 태자인 짐이 왕위를 물려받았소. 처음에는 내가 왕이므로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구나, 좋아했는데 그것도 아닙디다.  다들 어리다고 우습게 보고 왕을 허수아비로 생각했소.   왕손이었던 아버지가 한 때 조나라의 볼모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모님과 친분이 두텁던, 내 생부로까지 오해받고 있는 재수없는 작자 거상 여불위가 나 대신 친정을 했지요. 내가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컷 채웠소.

 

 하지만 영악했던 나는, 앞에서는 그가 하라는 대로 했지만, 뒤에서는 힘을 길러, 마침내 성인이 된 22세 때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친정을 시작했소, 나를 허수아비 취급한 여불위 세력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에게는 자결을 적극 권하였소, 그가 짐의 뜻대로 자결하자, 드디어 짐의 세상이 온 거요.. 짐은 첫 프로젝트를 ‘천하통일’로 삼고, 약한 나라부터 차례로 야금야금 먹어치웠소. 태양이 하나뿐이듯 짐 이외에 다른 왕이 있을 수 없소. 그리하여 나는 아래 사진과 같은 진나라로 통일하는 데 성공했소.


 인터뷰어 :  폐하 자신을 ‘황제’로 칭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진시황제 :  별다른 뜻은 없소.  그저 ‘왕’이라는 말이 짐의 위대함을 나타나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평범해 보였소.   나는 역사상 그 어떤 왕보다 위대한 통치자가 될 자신이 있었기에, 뭔가 특별하고 오래도록 기억될,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호칭이 필요했소.  그래서 ‘삼황오제(예부터 백성들을 이롭게 가르친 전설적인 세 명의 스승과 다섯 명의 성군)’ 에서 각각 ‘황’ 자와 ‘제’ 자를 따 ‘황제’라는 칭호를 창안했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는 나 자신이 삼황오제의 덕을 두루 겸비한. ‘모든 왕을 초월한 최고의 왕’이란 뜻이지요.

 

 그리고 역사상 첫 황제로서 특별히 ‘시황제’라 칭하도록 명하였소. 내 딴에는 내가 이룩한 진나라의 영광이 대대손손 억만 대에 이르기까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는데, 내 후대 왕들이 부족하여 결국 내 이름만 남게 되었지.  하지만 내가 그때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지금의 유럽처럼 이 나라 저 나라 분리되어 각자 따로 놀고 있을 거요.  어쨌든 짐은 ‘황제’만 아니라, 나만이 쓸 수 있는 ‘짐‘이나 ’ 조칙‘ 등 천자 전용어를 특별히 제작해 황제를 절대화, 내지는 신격화했소.  


 인터뷰어 : 통일 이후에 많은 일을 하셨는데, 자신의 업적을 소개해 주십시오.

 

 진시황제 :  짐이 황제로 즉위하고, 정복전쟁을 벌인 지 단 9년여 만에 중국 대륙을 하나로 통일했소. 이는 실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단한 성과요. 천하를 통일하고 나니, 이 거대한 나라를 내 뜻대로 다스리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이다. 우선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해 황제인 내가 모든 걸 결정하는 직접 통치를 했소. 


 우선 각 지방마다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통하기 위해서 문자를 통일했소.  예를 들어 한 무식한 백성이 조나라의 사투리로 말하면 바로 죽음이었소.  이로서 단순히 국토통일뿐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오.


 다음에는 수레의 폭을 통일하였소.  그 전에는 나라마다 수레의 폭이 다 달랐는데, 이로서 대륙 어디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되었소. 이는 교역량 증가로 이어져 그만큼 경제를 발전시켰소.  경제가 날로 발전하려면 화폐와 도랑형을 통일해주는 센스도 필요했소.  나는 백성들의 생김새만 빼고, 이 나라에 있는 모든 걸 다 규격화시키고 하나로 통일했소.  

 그리하여 진정 하나가 된, 거대한 중국 대륙이 된 거요. 내 나라가 망한 후에도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는 역대 중국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제도였소. 당시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나는 정말 천재였소. 안 그러오? 하하.   


인터뷰어 : 예. 뭐.... 폐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폐하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위대한 군주임을 과시했다는데요. 사실인가요?


 진시황제 :  맞소이다. 짐의 좌우명이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일인자가 될지어다, 요. 겸손이 미덕이라는데 나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소. 자꾸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드러내야 남들도 나를 알아주는 게 아니겠소? 그 말은 곧 제 이름에 책임을 진다, 뭐 그런 뜻과도 통하오. 


 짐은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화려한 마차에 올라 드넓은 대륙 안을 순행하는 걸 좋아했소. 황제 재임기간 중 다섯 번의 순행을 했고, 마지막 순행 길에서 명을 달리했지만, 어쨌든 나는 가는 곳마다 성대한 잔치를 벌여 지방에 사는 백성들한테도 짐의 권위와 위대함을 널리 알렸소. 그리고 가는 곳마다 곳곳에 비석을 세워 짐의 업적을 칭송하게 했소. 짐이 얼마나 대단한 왕인지 알릴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고 싶은 훈계도 비석에 새겼소. 중국의 비석 풍습은 짐으로부터 시작된 거요. 

 짐이 건축물에도 관심이 많아 좋은 물건을 많이 지어놓았지요. 그중 거지떼 같은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은 내가 지은 위대한 건축물이오. 아방궁이나 진시왕릉도 내 탁월한 안목에서 나온 최고의 건축물이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 우리는 이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니 함부로 넘보지 말지어다. 또,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이 진시황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기념비 내지는 절대권력을 과시하는 홍보물 같은 것이었지요.


인터뷰어 :  폭군이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시황제 : 짐이 통일한 것 중 하나가 사상 통일이었소. 무지한 백성들을 휘어잡으려면 사상 통일은 필수 아이템이었소. 사상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소. 나라 안의 유학 서적 대부분을 불살랐고, 4백여 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시킨 분서갱유 사건 때문에 내가 졸지에 폭군이 되어버렸소.  백성들은 엄한 법이 무서워서 눈짓으로만 말을 주고받았다고 합디다.  

 

그러나 폭군?  당치도 않소.  짐은 그저 황제로 영원히 살고 싶어서 내부 단속에 좀 과하게 신경을 썼을 뿐이고, 그래서 불로초도 원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폭군이라고 비난한다면 나 진시황제는 상당히 억울하오. 시황제라는 칭호에 걸맞은 업적을 남기고,  짐과 진나라의 위대함을 후세 대대로 전하려 한 것이오. 그 뿐이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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