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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룸스>, 다크웹보다 어두운 그 내면

위험한 스펙터클에서 눈을 돌려 스스로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by 헤이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잠깐 멈췄던 일이 1월 중순부터 재개되면서 2주 가량 영화를 못 보기도 했고 글을 쓸 여유가 없기도 했습니다. 1월 3주차까지는 개봉작들을 따라갔는데 크게 글을 쓰고 싶은 작품이 없었고요. <리얼 페인>은 좋은 영화지만 제 생각이 정리가 안 됐고 <노스페라투>는 특별히 분석을 요하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파문>이 저로서는 가장 흥미로워서 어쩌면 나중에 리뷰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능하면 신작 위주로 글을 올리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브런치를 언제까지고 놀려둘 수는 없으니 작년에 본 작품들 중 손에 꼽을 만큼 인상적이었던 <레드 룸스>에 대한 글을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본 공포영화가 <파묘>, <나이트 스윔>, <악마와의 토크쇼>, <롱레그스>뿐인 상황에서 제가 본 가장 무서운 장면은 이 공포영화들이 아니라 <레드 룸스>에 있었습니다. 켈리앤이 세 번째 피해자인 카미유처럼 옷을 입고 렌즈를 낀 뒤 교정기를 착용할 때 절규와 같은 코러스가 포함된 곡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켈리앤의 표정과 음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물려 소름이 오싹 돋게 만듭니다. 그리고 켈리앤이 카미유의 침대에서 셀카를 찍는 장면 또한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켈리앤의 섬뜩한 미소가 보일 때마다 공포스러웠죠.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몸서리쳐지는 스너프 필름 장면이 들어 있는데 그 사운드와 새빨간 비주얼은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켈리앤과 클레망틴이 함께 영상을 보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무언의 목격자>, <떼시스>, <8미리>, <베이컨시> 등 어렸을 때 본 영화들은 기억이 흐릿해서 지금 시점에서는 스너프 필름 소재의 영화 중 가장 끔찍한 게 <레드 룸스>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 편을 더 꼽자면 존 에릭 도들의 <더 포킵시 테잎스>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피해자가 10대 초중반의 소녀들로 설정된 <레드 룸스>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게 되네요. 결정적으로 <더 포킵시 테잎스>에서는 살인의 순간이 그대로 보여지지만 피해자의 입이 막혀 있어서 비명이 들리지 않고, <레드 룸스>에서는 고문의 이미지는 소거되어 있지만 어린 학생들의 비명이 고스란히 들려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재현'의 문제에서 사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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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영화의 줄거리 속에서 주인공 켈리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부터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슈발리에의 팬을 자처하는 클레망틴은 켈리앤 또한 슈발리에를 지지하기 위해 매일 재판을 방청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켈리앤은 카미유 또는 카미유의 엄마인 프랑신에게 매혹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영화의 처음부터 확고합니다. 장면 전체가 하나의 쇼트로 촬영된 플랑세캉스라 '시점 쇼트'라고 부르는 건 적절하지 않지만 첫 재판 장면에서 켈리앤의 시선이 프랑신을 향해 꽂히는 순간은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초반부 프랑신이 인터뷰를 통해 슈발리에의 그루피들에게 일갈할 때 켈리앤은 멀리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데, 이 짧은 쇼트는 이후 프랑신과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하는 장면과 한 축으로 꿰어집니다. 법정에서 쫓겨날 때 그녀를 보고 손인사를 건네는 슈발리에의 모습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관객은 일차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유추하려 노력하게 되지만, 이는 계획적인 오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정확히 뭘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지 모호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매혹의 근원이나 속성을 영화가 괄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켈리앤은 궁극적으로 카미유의 영상을 손에 넣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초반부터 그녀가 포커 게임을 통해 비트코인을 모으고 있음이 제시되고, 섬뜩하면서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클라이맥스 경매 장면에서는 그녀가 얼마나 절박한지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의중은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증거 자료인 영상을 확보해 프랑신을 돕기 위해서? 이걸로는 재판장에서의 기행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미유 영상에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죠. 그렇다면 켈리앤은 원래 이런 폭력적 영상물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걸까요? 여기에는 카미유 또는 프랑신에 대한 매혹을 설명할 방법이 빠져 있습니다. 켈리앤은 카미유가 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프랑신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카미유 행세를 하는 재판장 장면은 두 가지 지점 모두에 수긍할 수 있게 만들죠. 카미유가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건지, 카미유가 되고 싶었던 건지(이 경우 고문의 대상에 자신을 놓는 피학적인 성적 취향까지 포함해서), 혹은 카미유 모녀를 딱하게 여겼던 건지, 하나를 콕 집을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욕구에 이끌렸든 켈리앤은쾌(快)를 위해 스너프 필름을 시청한 뒤틀린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세 번째 감정까지 소량 포함해 이 모든 감정이 난립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명확한 '켈리앤은 뒤틀린 인물'이라는 말을 굳이 한 것은 바로 이 특성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행동조차 괴이하게 보인다는 점을 짚기 위해서입니다. 켈리앤이 프랑신이나 죽은 카미유를 돕기 위해 영상을 프랑신에게 넘겼을 거라는 설명은 어딘지 부족해 보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프랑신은 계속해서 자기 딸과 관련된 증거를 찾으려고 했으니까요. 일말의 죄책감이 그녀를 추동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할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켈리앤의 행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보다 부산물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마침 범인의 얼굴이 나오길래 즐겁게 영상을 다 보고 영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달했다, 혹은 영상을 다 보고 나니 죽은 소녀나 그 엄마에 대해 켕기는 마음이 생겼다. 또는, 제가 추측하기에는 아마도, 카미유의 방을 염탐하는 김에 영상을 전달했다(그 의중과 관계없이 켈리앤의 최우선적인 관심이 전자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 역시 너무 갔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정반대 방향에서 카미유의 영상을 프랑신이 보게끔 만드는 걸 의도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중 하나를 특정하는 게 아니겠죠.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켈리앤이라는 인간의 미스터리가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점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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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앤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녀의 행동은 내면과 별개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카미유의 영상을 재상하는 켈리앤의 클로즈업에 고농도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영상을 입수한 것에 대해 만족해하는 표정으로 헤드셋을 낀 채(즉, 처음으로 관객에게 사운드를 소거한 채) 영상을 재생하는 켈리앤의 얼굴은 레드 룸의 조명으로 새빨갛게 물듭니다. 클레망틴과 함께 이전의 영상들을 볼 때보다 훨씬 높은 채도의 빨강으로요. 분명 프랑신은 켈리앤 덕분에 언론에 대고 호소했던 '그 영상'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켈리앤은 스너프 제작자들에게 몇 천 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영상을 구매했으며 또한 그 영상을 첫 번째로/독점적으로(!) 향유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녀의 이후 행동이 어떠했는지와 관계없이, 심지어 그녀가 프랑신을 도우려는 목적만으로 움직였다고 극단적으로 가정하더라도, 그녀는 다크웹과 불법 영상물 제작자들의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신은 자기 딸과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슈발리에가 응당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슈발리에는 법의 심판을 받겠지만, 카미유와 같은 피해자는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겁니다. 클레망틴을 데리고 간 모델 촬영 장면의 마지막 쇼트는 켈리앤이 복면을 쓰고 있는 사진입니다. 이 순간 영화는 켈리앤을 영상 속에서 복면을 쓴 살인자와 겹치고 있는 셈입니다.


결과와 무관하게 켈리앤을 비판(혹은 비난)하기는 쉬운 일인 듯 느껴집니다. 그녀의 지독한 취향 및 불법적 행동과 공익적 결과 사이의 균형이 맞지 않다고 느끼는 건 저뿐만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여기에 다른 무게추 하나를 추가해보겠습니다. <레드 룸스>가 논쟁의 영역에 두고 있는 것은 스너프 필름이나 다크웹처럼 명백한 범죄가 아니라 '본다'는 행위입니다.


이 영화에서 클레망틴은 초점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겨가는 캐릭터입니다. 클레망틴은 첫 재판이 끝난 후부터 무죄 추정의 원칙을 내세우며 슈발리에에게 혐의가 없음을 엉성하고도 과격하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라이브 쇼에 전화를 걸어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망신만 당하고 말죠. 클레망틴이 변화하는 것은 두 소녀들이 고문, 살해당하는 영상을 보고 나서입니다. 마지막에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인터뷰를 보면("정말 힘들었지만 뤼도비크를 지우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어요.") 클레망틴은 슈발리에에게 매혹당했던 것을 철회하고 희생자들을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상태인데, 아마도 이 영상들을 본 것이 그런 관점의 전환을 야기했을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클레망틴이 영상을 보는 시점이 슈발리에가 진범인지 아닌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은, 그러니까 그와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때라는 점입니다. 즉, 클레망틴은 슈발리에가 범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의 관점을 바꾼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고통을 목도하고, 범인과는 관계 없이 관점을 바꿨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이 끔찍한 사건에서 클레망틴의 초점은 피해자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는데(그녀는 슈발리에를 옹호하면서 남겨진 유가족들의 고통까지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나서야 가해자 쪽에 쏠려 있던 관심을 거둘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켈리앤이 사준 테니스채를 주저없이 쓰레기통에 처박고 떠나는 클레망틴의 모습에는 켈리앤에 대한 성토의 뉘앙스가 어려 있는데, 스너프 영상을 본 뒤 충격을 받은 그녀가 켈리앤을 어떤 방향에서 힐난하는지는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스너프 영상은 클레망틴에게 최소한의 기능을 한 것입니다. 켈리앤과 스너프 영상 간의 부정적 순환 고리를 파악하고 나면 클레망틴이 반대로 긍정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불편한 역설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으나 범인을 슈발리에로 지목할 수 있었던 것도 사람들이 이 영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켈리앤은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켈리앤이라는 렌즈를 통해 상이 맺힌 <레드 룸스> 속 세계는 명쾌한 결론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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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보여진다'는 모티브는 켈리앤의 내면과 관련해서도 중요합니다. 그녀는 언제 어느 홈페이지에 올라갔는지를 제목에 명기하면서 자기 사진들을 모아둡니다. 홈페이지에서 자기 사진이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패닉에 빠지는 모습은 '보여지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 욕망은 어찌나 큰지 자기 커리어를 박살내면서까지 켈리앤이 법정에서 '그 짓'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켈리앤은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세계에도 속해 있고 싶습니다. 클레망틴에게 두 영상을 보여줄 때 별일 아닌 듯 커튼을 치는 것도, 경매 직전에 불안하게 1층을 내려다보다가 방을 가리는 것도, 프랑신의 집으로 가면서 CCTV를 조작해 자기 모습을 지우는 것도 모두 그녀가 어두운 세계에 걸쳐 있기 때문에 행하는 일들입니다. 저는 이게 '보여지고 싶은 욕망'과 '감춰져야 하는 상황'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보여지고 싶은 욕망'과 '감춰져야 하는 세계에 속하고 싶은 욕망' 둘의 양립으로 보입니다. 모델 일 못지않게 우리가 많이 본 것은 그녀가 인터넷의 음지들을 돌아다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켈리앤은 <셰임>의 브랜든처럼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는 기제가 충돌해서 흥미로운 캐릭터가 아니라 온갖 욕망이, 심지어 때로는 충돌하는 것들까지 양립하는 캐릭터라서 흥미롭습니다. 후반부로 가서 결국 승리하고 마는 것은 '감춰져야 하는 세계에 속하고 싶은 욕망'인데, 누가 봐도 문제적인 행동을 하고 일에서 배제되자 패닉에 빠지는 모습은 그녀의 욕망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녀가 '보이지 않고자' 할 때 하는 가장 섬뜩한 행위는 경매가 끝난 뒤, 다시 말해 카미유의 영상을 보기 전에 기네비어까지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직접 커스터마이징해서 보안에도 문제가 없고 자기를 위해 작동하게끔 만들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미유는 자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욕망, 즉 카미유와 관련된 욕망을 실현하는 순간만큼은 기계에게조차 목격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다른 두 소녀의 영상을 볼 때는 기네비어를 파괴하지 않았죠). 그리고 켈리앤은 당연히 관객마저 소외시킨 채 혼자만의 욕망 속으로 칩거합니다. 기네비어의 마지막 농담은 '왜 유령들은 거짓말을 잘 못할까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죠'였습니다. 디지털 세계의 망령과도 같은 켈리앤은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쉽게 들여다보게끔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2시간 동안 켈리앤을 좇아왔지만 그녀의 속을 명쾌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인 '레드 룸'은 인터넷에서 고문과 살인을 생중계하는 사이트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런 음지는 인터넷뿐만 아니라 켈리앤의 내면에도 존재합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그 '빨간 방' 다음으로 끔찍한 것은 켈리앤이라는 뒤틀린 인간 안에 자리잡은, 우리가 쉬이 들여다볼 수 없는 그 방이라고 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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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서 스펙터클의 윤리는 주로 시각적 심상을 기준으로 논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도구가 카메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각 이미지를 빼고 '재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반면 사운드에 대해서는 비주얼만큼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레드 룸스>를 보고서는 이 영화가 표현한 정도의 잔혹한 사운드라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지를 소거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긍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사울의 아들>에 대해 지인이 관객을 극장 안에 가둬두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를 서라운드 사운드로 들려주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사울의 아들>에 대해서는 납득되기도 하고 갸웃거려지기도 하던 그 말이 <레드 룸스>를 보고 격한 공감과 함께 다시 떠올랐습니다.


선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여타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결정적인 순간은 재현하지 않는데, 그와 별개로 생생하게 담긴 사운드들은 청각적 요소를 빼고 폭력적 영상물에 대해 논할 수 있을지 무척 암울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주체가 어린 소녀라는 걸 아는 사람의 비명뿐만 아니라 그 비명을 유발한 전기톱 소리가 함께 울려퍼질 때, 겁에 질린 소녀의 울음소리가 공허한 방에 가득 울릴 때, 이게 픽션이라는 사실을 알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피도 차갑게 얼어붙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너프 영상을 차치하고라도 이 영화는 모든 장면의 사운드를 강렬하게, 무엇보다 불편하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스트링 메인의 테마곡은 음침할뿐만 아니라 볼륨도 크게 믹싱되어 있어서 관객을 위압감에 짓눌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첫 재판 장면을 비롯해 영화 내내 깔려 있는 저음역대의 앰비언스는 건조하고도 냉담하며 그로테스크한 무드를 형성하는 데 일조합니다(사운드트랙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음악과 앰비언스의 구분이 쉽지 않은 이 트랙들은 극장처럼 사운드 환경이 잘 갖춰진 곳이 아니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기술적으로 사운드에 무척 공을 들인 이 영화를 보고 '영상물의 사운드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이 초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더 포킵시 테잎스>의 살인 영상은 기괴함과 폭력에 액센트를 주고 공포에 질린 채 눈을 부릅뜬 희생자를 카메라 바로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공포 효과를 배가합니다. 이 쇼트에 대해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감독은 무엇보다 관객을 공포로 몸서리치게 만들기 위해 이미지를 구축했을 것입니다. 같은 평가를 <레드 룸스>의 영상 속 사운드에 대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비명 소리와 전기톱 소리는 관객이 가능한 한 가장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숨이 끊어진 후 피범벅이 된 레드 룸을 짧게 비추는 영상의 끝부분은, 설령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소거했다고 해도 찝찝한 뒷맛이 남는 이미지의 잔여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상의 말미만 보고서도 관객이 치를 떠는 것은 이 영상의 사운드를 들었으며, 그 소리를 듣고 괴로워하거나 무감각한 두 캐릭터의 리액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센세이셔널리즘의 함정을 피해가려 하지만 장르적인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정 부분 그 함정에 발을 갖다댄 듯 보입니다.


앞에서 저는 클라이맥스 쇼트에서 켈리앤이 헤드셋을 씀으로써 카미유의 영상을 '독점적'으로 '향유'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켈리앤이 관객마저 소외시켰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영상물과 사운드의 문제를 가져와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어쩌면 여기서 사운드까지 소거함으로써 <레드 룸스>는 비로소 센세이셔널리즘의 함정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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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을 복수형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하나는 켈리앤과 같은 사람들로 인해 계속 존재하게 될 수많은 방들, 그리고 켈리앤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심연과도 같은 방일 것입니다. <레드 룸스>가 탐구하는 것은 슈발리에라는 명명백백한 악이 아니라 그보다 덜하지만 훨씬 미묘한 방식으로 생명력을 가지는 켈리앤이라는 악입니다. 이 미묘한 악은 '미디어를 시청하는' 행위를 통해 존재하고, 또한 더 커다란 악을 존속시킵니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켈리앤이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켈리앤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이렇게 켈리앤이 홀연히 사라지게 만든 것은 우리가 영화 내내 보았던 그녀라는 미스터리, 즉 텅 빈 공간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녀의 자리를 빼앗음으로써 그녀에 대해 확고한 비판을 가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대신 클레망틴이 켈리앤의 부재를 채움으로써 가해자에 대한 스캔들투성이의 관심을 거두고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시선을 견지하기를 촉구하죠.


그러나 비어 있지 않은 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바로 관객의 자리입니다. 이 영화는 켈리앤과 마찬가지로 '시청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관객의 자기성찰을 요구합니다. 시청함으로써 그 존재가 가능해지는 이 악에 대해서 현대인의 절대다수는 결코 무혐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굳이 너그럽게 보아주자면 관객과 가장 유사한 자리는 켈리앤이 아니라 경매에 참여한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문당하고 살해되는 영상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는 사람들, 액수가 모자라면 '유출본 뜨면 보지, 뭐'라며 시청을 끝내 단념하지는 않는 사람들이죠. 이 캐릭터와 이야기를 보고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객석을 떠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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