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쓸 수 없는 일뿐인 삶과 예술, 그 예술을 만들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안에서 서사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이미지나 리듬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그 리듬을 충분히 향유하지 못한다면 라이카트의 작품을 제대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죠. 이전에 자연이나 노동의 리듬을 소담하게 묘사했던 라이카트는 <쇼잉 업>에서 창작의 리듬을 역시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영화에는 미술학교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학생들의 이미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메인플롯에 전혀 포섭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이 쇼트들은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미학적 지향점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 션은 "말해지지 않은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해."라고 말합니다. 이 순간들을 배제한 채 리지의 서사만을 따라간다면 영화의 절반을 놓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영화를 보면서 생생하게 느껴야 하는 순간들에 <쇼잉 업>의 핵심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격적인 리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리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으니까요.
<쇼잉 업>을 보고 딱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불만투성이인 사람조차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예술의 기능 혹은 마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인 리지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꼭 토를 달아야만 하는 병에 걸린 것처럼 굽니다. 혼자 있을 때조차 부정적인 말만 입에 붙어 있고요. 게다가 이 영화는 리지의 성격적인 결함이 끝에 가서 대대적으로 교정되는 전통적인 플롯을 차용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끝까지 투덜이인 이 사람을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결정적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리지의 결함뿐만 아니라 그녀의 따뜻하고도 인간적인 면모들까지 보았다는 것입니다. 고양이를 키우거나 비둘기를 돌보고, 걱정이 지나쳐서 문제지만 항상 가족들을 신경 쓰며, 창작자이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기혐오와 열등감 등을 느끼는 모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일 겁니다. 이렇게 관객이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은 고전적이고도 효과적인 전략이죠.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그녀를 포함해 창작하는 사람들을 그리는 방식과 관련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확고하게 리지이지만, 영화는 다른 사람들을 그려내는 데에도 열심입니다. 상술했던 학생들의 창작 활동은 물론이고 조역들도 계속 줄거리 바깥에서 자기 모습을 보여주죠. 조는 한참 타이어를 굴리면서 소개되고, 에릭은 차를 몰고 학교에 들어와 학생의 작품에 피드백을 해주며 등장합니다. 시나리오상에서 이 장면들은 리지와 관련된 기능이 있습니다. 조는 리지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캐릭터이며 첫 대화를 통해 리지의 집에 생긴 수도 문제를 설정합니다. 에릭이 등장하는 대목은 리지의 직장을 소개하는 장면의 도입부를 맡고 있고요. 리지에 초집중해서 아주 밀도 높은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정반대로 다른 인물들을 향해 시선을 넓게 확장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 많은 창작의 순간들이 '예술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위에서 '예술의 기능 혹은 마법'이라는 말은 이렇게 만들어진 창작물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떠올랐던 거겠죠. 실제로 이 영화에서 온전히 긍정되고 있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작품입니다. 리지는 주변과 계속 불화하지만 그녀의 도예품들은 언제나 경탄의 대상이 되죠. 조 역시 작업 중인 그녀의 조각들을 칭찬했고, 에릭은 작품을 구울 때마다 옆에서 그녀를 북돋아줍니다. 그는 심지어 불에 탄 게 오히려 자기 취향이라고까지 말하죠. 마릴린은 리지의 활동에 열렬히 경탄하고, 역시 도자기를 구웠던 아빠는 "색을 과감하게 썼구나."라며 작품들을 세심하게 감상합니다. 리지의 전시회는 이런저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성공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리지 또한 조의 작품만큼은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 이미지들을 거꾸로 '사람들이' 창작을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활동에 몰두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향해 열려 있는 시선 덕분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비뚤어져 있습니다. 비단 리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굳이 리지의 메시지를 듣고도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버리는 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션은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 만큼 은둔하고 있고, 리지의 부모님은 그전까지 점잖게만 나오던 모습과 확 대조되게 만나자마자 다툽니다. 이렇게 온갖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만들고 서로 감상하는 광경을 보고 나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수많은 학생들 역시 사연을 직접 들려주지는 않았지만 똑같이 울고 웃고 시달릴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풍경들은 만들어지고 있는 예술 때문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비뚤어진 '사람들이' 작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 또한 그러한 창작물이겠죠.
리지가 본질적으로 새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주 내밀하고 미묘한 차원에서 변화를 겪기는 한 듯합니다. 저는 결국 모든 것이 잘 굴러가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변화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리지는 처음부터 아빠 집에 찾아온 '그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비치는 모습으로 짐작하면 리와 도로시는 좋은 사람들이 아닌 것 같죠. 아빠의 소파 두 개를 차지해서 누워 있고, 커피와 우유가 떨어졌다고 당당하게 주문합니다. 리지의 전시회에 와서도 작품보다 와인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요. 그렇지만 이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아빠는 이 상황을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빠는 또 은퇴 후의 일상에 대해 리지가 "끔찍한데요."라고 말하자 "내가 좋으면 됐지."라고 받습니다.
비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지는 한편으로 비둘기를 과보호합니다. 그 때문에 조와 갈등을 겪기도 하죠. 하지만 붕대에 감겨 있던 비둘기는 이미 날개가 다 나아서 날아갈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션이 비둘기를 날려 보낼 때 리지는 다급하게 "No, Sean, wait!"이라고 외치지만, 조의 말처럼 새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겠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건 오히려 리지였을 테고요.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이 션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아빠는 션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게 반년 전 추수감사절이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엄마 역시 사랑을 주고 기다리면 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엄마는 리지의 과도한 걱정이 오히려 문제임을 알고 있는 듯 그녀가 션의 집에 따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션을 못 찾았음에도 그냥 전시회에 와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실종됐다며 걱정하는 리지를 비웃듯이 션은 바로 그 순간 리지의 등 뒤에서 등장합니다. 리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 션은 아주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불에 타버린 리지의 '최고의 작품'이 있습니다. 리지는 션의 집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도 그 도자기를 집어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조에게 욕이 섞인 메시지를 남기기 직전 그녀는 그 작품 때문에 잔뜩 신경질이 난 상태였죠. 하지만 "내 최고의 작품은 불에 타버렸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라는 리지의 말에 마릴린은 '결과를 받아들일 때'라고 쿨하게 이야기합니다. 리지의 변화는 캐릭터의 에피파니로 크게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새를 따라가는 그녀의 시점 쇼트로 포착된 하늘과 나무, 그리고 감미로운 플루트 소리에 내밀하게 웅크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비둘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오브젝트입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카메라가 붐업한 끝에 비둘기의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삽입함으로써 마치 비둘기의 시점처럼 느껴지게 만든 영화의 마지막 쇼트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럽습니다. "딴 데 가렴. 딴 데 가서 죽으렴."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리지의 캐릭터를 너무 잘 설명해주고요. 그리고 비둘기를 통해 리지와 조의 관계가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단계적으로 세심하게 흘려놓는데, 그 단서들의 상당 부분은 비둘기와 관련해 나누는 대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리지는 조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는 조와 리지 총 두 명의 전시회가 나오는데, 조가 신진 작가로 소개되는 애비게일 퍼샤인이 훨씬 크고 중요한 전시입니다. 게다가 '너만 전시 있는 거 아니'라는 리지의 말에 자기는 두 탕을 뛰고 있다고 답한 것에서 조가 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리지는 혼자서 몰래 조의 전시를 감상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전시회에 불참합니다. 심지어 조는 리지의 집주인이기도 합니다. 고양이 사료를 사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곤궁한 리지와 달리 조는 오래된 집을 사서 수완을 올릴 정도로 경제감각도 뛰어납니다. 연애 혹은 성생활을 하고 있는 쪽도, 더 폭넓은 인간관계를 즐기는 쪽도 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버린 비둘기를 조가 주워서 보살피는 것은 리지의 도덕감정에도 타격을 주었을 겁니다. 후에 리지가 비둘기에 애착을 갖게 된 데에는 '작고 불쌍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나 이입뿐만 아니라 조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것 또한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지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전시회까지 수도가 고쳐지지 않아 집에서 샤워를 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이게 어느 정도 호들갑이라고, 리지의 다른 걱정거리처럼 그녀의 시각 때문이라고 은연중에 드러내는데 이때 비둘기가 활용됩니다. 새도 마치 리지처럼 온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둘기를 리지와 연결시키는 독법도 물론 가능할 겁니다. 저는 그뿐만 아니라 '따뜻한 물은 안 나오더라도 집에 스토브는 있지 않느냐'는 동물병원 의사의 반문이나, 새를 혼자 뒀다고 예민하게 구는 리지에게 "날이 차지도 않잖아."라고 대꾸하는 조의 말을 통해 리지의 태도를 교정하려는 것도 중요했을 거라 봅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쳐지지 않는 수도는 삶에 영속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상징하기도 할 텐데, 이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셈입니다. 앞에서 저는 '모든 것이 잘 굴러가고 있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때의 '잘 굴러감'은 실제로 온 세상이 무지갯빛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죠.
아빠는 리와 도로시에 대해 "They're very free."라고 말합니다(자막에서는 "어디 얽매이질 않아."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붕대를 벗어나 마침내 날아가는 비둘기의 모습을 보면, 자유롭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잿빛 인생에 대해 초연한 태도와 결부된 것이 아닐까요.
<쇼잉 업>은 도예품을 만들기 위한 리지의 밑그림들을 쭉 훑는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해 마침내 다 구워진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회에서 끝납니다. 이 과정에서 삶과 예술은 우연과 사고를 거쳐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곳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리지는 주변 사람들과 동물들을 통해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배웁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shwoing up'인 것은 가마에서 어떤 도자기가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것처럼 그 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삶과 예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션이 옛날 드라마들을 많이 해주던 채널 4가 안 나온다고 하자 리지는 그럼 <환상특급> DVD를 사주면 좋을지 물어봅니다. 그러자 션은 "TV에 뭐가 나올지 알면 그게 무슨 재미야?"라고 되묻죠. 이 말은 영화의 핵심을 살짝 뒤틀어 응축한 것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션은, 채널 4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I know what's going on."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실제로 삶이나 예술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미 꿰뚫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을 돌이켜볼까요? 패닝할 때마다 프레임을 제대로 잡기 위해 줌을 조정하는 촬영과 이 '세팅'의 흔적을 소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한 편집은 무엇이 앞에 놓일지 모른 채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고 있는 카메라와 그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도록 만듭니다.
션은 처음 등장했을 때 자기가 음성메시지를 잘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I'm not a big message guy."라고 말합니다. 저한테 이 말은 얼핏 영화 혹은 예술에서 '메시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합니다. 도입부에서 말했듯이 라이카트는 서사와 의미로 결코 축소할 수 없는 총체로서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영화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리뷰를 쓰고 나니 이 말이 더욱 뜨끔하게 느껴지네요. 이 리뷰에서는 <쇼잉 업>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만 다뤘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직접 영화를 보셔야 체험하실 수 있는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