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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워: 분열의 시대>, 질문을 멈춘 카메라들

폭력적 스펙터클을 향한 불완전한 물음

by 헤이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5년 제 첫 영화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였습니다. 알렉스 가랜드의 전작 <멘>이 국내 개봉했을 때 이미 이 작품에 대한 소식이 많아서 꽤 오랫동안 기대해온 작품인데, 우선 무척 흥미롭게 보았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스 가랜드는 어떤 장르를 다루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고 또한 매우 뒤틀린 비전을 구현해낸다는 측면에서 개성이 있는 감독입니다. 이번 작품도 블록버스터의 범주 안에 속해 있지만 스펙터클은 한정적으로 사용하면서 오히려 진짜 관심 있는 다른 이야기에 더 집중하는 게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분열의 시대'라는 노골적이고 조악한 부제를 붙였지만 저는 사실 이 영화에서 나라가 반쪽으로 나뉘어 싸우는 양상은 배경에 그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미국의 현재에 초점을 맞춰 비평을 하신 분들도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애초에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대통령이 카다피나 차우체스쿠와 비견되는 독재를 펼치다가 내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정치적 성향이 극과 극인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연합해 서부군을 형성했다는 설정 자체가 감독이 밝혔듯이 논쟁의 뻘밭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일 겁니다. 리와 조엘은 대통령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는데 결국 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살려주세요..."이고 조엘은 여기에 "그거면 됐어요."라고 싸늘하게 응수합니다. 그러니까 영화 속 대통령이 대변하는 가치관이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의 내전은 현실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낸 풀기 어려운 매듭이 아니라 한 미치광이의 소행 때문에 촉발된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만약 제목에 혹해 옳고 그름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사회적 갈등을 보고 싶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거시적 차원에서는 선악의 대결로 짜여 있더라도 안으로 들어가보면 실제 전장은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설령 바깥 상황을 의식하고 있다고는 해도 중립을 택하는 것만으로 전쟁에서 비껴 나 있을 수 있는 마을이 그렇고, 원칙도 없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군인들이 그렇습니다. 이 군인은 '당신은 어떤 류의 미국인이냐'고 묻죠. 결국 거창한 대의명분과 별개로 편 가르기로 전락한 이 내전의 성격은 놀이공원에서 저격수와 대치하고 있는 두 군인의 일화에서 가장 부조리하게 제시됩니다. 상대방이 어느 쪽에 속해 있건 나한테 총을 쏘면 적이라는 생각은 사실상 이 영화의 부제보다 더 효과적으로 현재의 정치사회적 세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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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종군기자의 윤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의 윤리는 그들을 옥죄는 도덕적 규범으로 한정되는 말은 아닌데, 만약 이 단어가 너무 협소하게 느껴진다면 작동방식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겠습니다. 사람이 죽고 다치는 곳에서 그 폭력의 이미지를 포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관객 또한 계속 질문하게끔 영화는 만들어져 있죠.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제시가 주유소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을 본 뒤 혼란스러워하자 리가 그녀를 모질게 몰아붙이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리는 전쟁터에서 보는 것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질문을 계속하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며 '우리가 하는 일은 기록하는 거고 질문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무뎌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조언대로 제시는 질문하지 않고 뻗어나가면서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정작 리는 죽은 새미의 사진을 지우면서 자신이 찍은 사진에 대해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리의 저 대사는 '찍은 것을 그대로 내보낸다'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서른 장 중 쓸 만한 사진 한 장을 건진다면 그 이미지가 무엇을 담고 있든, 어떻게 포착됐든 게재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이나 판단은 그다음에 옵니다. 그러나 만약 사진사가 (새미의 사진에 대해 리가 그러했듯이) 사진을 지우거나 편집 단계에서 게재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면, 그녀의 명제는 설 토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리는 이 순간 자신이 찍은 것에 대해 질문하게 된 것이고, 그 질문의 결과 사진을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녀의 커리어를 단방향의 화살표로 본다면 이것은 퇴행입니다. 오프닝과 달리 클라이맥스의 시가전에서 리가 오히려 패닉에 빠져 웅크리고 있는 것은 그녀가 여정의 결과 자신의 직업에 대해 회의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봐야 이해 가능합니다.


영화의 끝에서 제시가 아닌 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누군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리의 죽음을 이렇게 파악하고 나면 사람의 생명이 달린 순간에 그를 구하기보다 사진을 찍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리한 현실에 대해 길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결말에서 이 영화는 제시가 찍은 사진들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리의 죽음을 특별히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 남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 혹은 남의 생명이 앗기는 순간까지 기록하고 증언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 이 영화를 통해서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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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새미의 사진을 지우는 장면은 그녀의 변화를 보여주는 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관객도 모르게 죽은 이를 촬영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므로 충격적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은 그녀에게 본능적인 행위인 듯합니다. 마치 리가 총에 맞는 순간 제시가 그녀의 죽음을 촬영했던 것이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던 것처럼요. 이 기자들의 행위가 본능적이라고 영화가 규정하는 것은 앞서 말한 질문과 판단의 테마와 연결되는, 혹은 그 토대가 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셔터를 누르기 전에 매번 숙고할 수 있다면 윤리는 촬영 이전에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럴 경우 질문은 독자의 몫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건 순전히 책임 회피겠죠. 하지만 마치 사슴을 사냥하는 사자처럼 셔터를 일단 누를 수밖에 없는 것이 종군기자의 생리라면, 윤리는 이 지점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이 이미지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이르러서야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얻은 이미지에 대해 질문하기를 멈췄던 리가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서 제시에 의해 대체되는 이야기입니다. 초반부 새미의 대사대로 제시의 나이 때 리는 제시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겹쳐 있고, 관객은 사실상 같은 사람의 두 가지 시간대를 동시에 보는 것과 같죠. 리는 왜 질문을 하기 시작했을까요? 이 변화는 자신의 직업이 현실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회의와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중반부 새미와의 대화에서 리는 자신이 외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미국에 메시지를 보내길 바랐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소망은 결국 터진 내전 앞에서 짓밟혔습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조엘이 토로한 것처럼 그들의 여정이 무의미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워싱턴 목전에서 대통령이 투항함으로써 그들의 취재가 무용하게 되었고, 토니와 보하이, 무엇보다 새미가 이 헛된 여정에 동행했다가 죽었습니다. 나의 일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하는 것에서 직업의 죽음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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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여기에는 리 자신의 문제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가 이 부분을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이 여정이 그녀의 오랜 커리어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 모두 해당됩니다.


우선 이전까지 외국의 전쟁을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았던 것과 달리 이 내전은 그녀가 내부인인 공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직업윤리 없이 전장을 누볐을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의 태도가 어땠건 관계없이 그녀의 자리 자체가 외부인의 자리였음을 지적하는 것이죠. 리의 가족들과 제시의 부모, 그리고 중반부에 나오는 초현실적 중립지대처럼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듯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리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이 여정에는 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시가 끼어 있습니다. 제시가 엮여 있는 한 리는 이 여정을 타인의 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이 설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옷가게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거울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리를 여럿으로 분열시키고 항상 남을 응시하던 그녀가 자신을 응시하게끔 만들죠. 또한 제시로 인해 리의 위치가 촬영자에서 피사체로 전환됩니다(그리고 제시는 촬영자로서 리의 위치를 대체하죠). 질문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내 일이 아닐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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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놀이공원 장면은 '적'을 중의적인 의미로 규정합니다. "Someone shooting."이라는 대사는 당연히도 저격수뿐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까지 지칭하죠. 백악관 내부에서 경호원들을 사살하는 거의 모든 순간들은 사진에 찍힙니다. 즉, '총을 쏘다'와 '사진을 찍다'가 계속 겹쳐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죽은 대통령의 시신을 두고 찍은 군인들의 기념사진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이미지는 승리의 느낌보다는 섬뜩함을 더 많이 자아내죠. 시신 앞에서 환하게 웃는 군인들 못지않게 오싹한 것은 그 순간을 이미지로 박제한 사람일 것입니다.


제시의 잘못은 총에 맞는 리의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리가 총에 맞아 죽었음에도 그녀를 두고 계속 사진을 찍으러 앞으로 나아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이끄는 조엘의 모습은 이 비정함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직업 전체의 것임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투 중 다른 기자 동료가 자신이 찍은 이미지를 자랑하거나 돈 되는 샷은 자기한테 넘기라고 외쳤던 것처럼요. 제시가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거듭나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이르면, 제시의 사진이 흑백이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전쟁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직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이미지가 마치 그 전쟁의 대립 구도처럼 '흑백'이라면,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긍정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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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 자체가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사울의 아들>과 <1917>에 각각 다른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의 아들>은 첫 쇼트에서 이 카메라는 자기 눈앞에 다가온 이 인물만을 따라가겠다고 천명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약속과 달리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정교하고도 교묘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워크와 블로킹을 볼 때마다 불편해집니다. 전장의 시체들을 훑는 <1917>의 카메라워크와 블로킹 역시 유려하지만 적어도 <1917>은 자신의 카메라와 관련해 약속한 바가 없죠.


마찬가지로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또한 이미지를 포착하고 배치하는 것에 대해 훨씬 엄격한 기준을 적용받아야 할 겁니다. 대통령을 죽이는 순간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영화 또한 자신의 시네마토그래피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카메라와 포토그래피의 윤리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에 걸맞게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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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삽입되는 리와 제시의 사진들은 이 영화의 카메라가 포착한 이미지와 크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촬영할 때 인물들이 촬영한 것과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포착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촬영 측면에서 이 영화가 기자들의 카메라와 거리를 두었던 것은 주유소에서 리가 사진 찍는 순간을 익스트림 롱쇼트로 쭉 빠져서 묘사하는 쇼트 하나였습니다. 자신이 비판하는 이미지메이킹과 시각적으로 거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필름메이킹이라면 그건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게 아닐까요? 영화를 같이 본 지인은 '현실이 그러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차라리 클라이맥스 시가전의 압도적인 스펙터클은 걸리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주유소 뒤편에 산 채로 매달린 사람들의 클로즈업, 정규군을 기관총으로 처형하는 순간의 슬로모션(과 경쾌한 음악), 시체구덩이에 빠진 제시를 직부감으로 촬영한 쇼트, 경호원이나 대통령이 죽는 순간을 제시의 카메라와 동일한 앵글에서 포착한 촬영 등이 걸립니다. 만약 카메라가 폭력의 순간에서 눈을 돌린 채 리와 제시의 사진을 삽입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캐릭터의 사진을 빌려 카메라가 애써 외면했던 '이미지'를 사실은 전시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하게 됐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부당하게 딴지를 걸고 있을지도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카메라를 더 심사숙고해서 포지셔닝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그만큼 엄중한 심판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리가 일전에 사진을 찍었던, 타이어에 묶인 채 불타 죽는 사람의 쇼트는 그녀의 기억 속 시점 쇼트라는 알리바이라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왜 하필 그녀의 시점 쇼트가 (그것도 슬로모션으로) 삽입돼야 하는지 영화는 답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전장 한가운데에서 본능적으로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과 달리 영화는 숙고 끝에 촬영을 시작할 수 있고, 또한 편집 단계에서 이미지를 '게재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는 (어느 지점까지는) 윤리적 판단을 보류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는 보류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윤리적인 카메라'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이 영화를 이렇게 엄격하게 보아야 한다는 게 저 스스로도 불편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을 카메라와 포토그래피로 파악한 이상, 그리고 영화가 카메라로 만들어지는 예술인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다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는 전제 하에서 이런 논의를 해보았다는 사실은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특히 사운드 설비가 잘 갖춰진 상영관에서 본다면 더욱 좋을,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작품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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