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설 Dec 18. 2024

<서브스턴스>, 사방의 파랑과 나의 것이 아닌 빨강

늙은 몸 대 젊은 몸의 전쟁과 피칠갑 바디 호러, 요란하다 요란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해 <미래의 범죄들>이 개봉하면서 몸에 대한 상상력 측면에서 역시 크로넨버그만이 줄 수 있는 독창적인 풍경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상적인 상상력을 선보인 '바디 호러'를 해가 바뀌기 전 하나 더 만나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미래의 범죄들>과 <서브스턴스>는 장르를 공유할 뿐 접점이 그리 크지는 않은 듯합니다. 특히나 <미래의 범죄들>이 거의 현학적이기까지 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연출 역시 자극에 휘둘리지 않았던 작품이라면, <서브스턴스>는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좁혀두면서 자극적인 연출에 몰두합니다. 저는 <미래의 범죄들>이 다룬 이야기도 무척 좋아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서브스턴스>가 좀 더 훌륭한 영화라고 평해야 할 듯합니다.


코랄리 파르자라는 감독의 연출 성향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파르자는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자극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컷이 빠르고 빅 클로즈업 인서트를 온갖 곳에 사용하며 사운드 이펙트 또한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이 영화는 특히 패닉 상태나 고통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REMEMBER YOU ARE ONE'처럼 화면에 점멸하는 자막까지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데 저로서는 거의 절제심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활성제를 맞고 등에서 분열된 수가 나오는 장면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연상될 정도로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로 묘사됩니다(실제로 클라이맥스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삽입되기도 합니다). 이 시끌벅적하고 난폭한 스타일은 분명히 파르자의 취향이겠지만, 한편으론 영화적 방법론으로서도 중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로테스크한 호러 치고 <서브스턴스> 속 인물들의 심리는 기괴하기보다 오히려 직관적으로 이해될 만큼 보편적인데, 그럼에도 영화 스스로 인물들의 심리를 '깊이 있게' 파고들기보다는 '선명하고 아주 자극적으로' 극화 혹은 감각화하는 데 집중한 듯 보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관객이 이입할 대상이 아니고, 그렇다고 이들이 겪는 참상을 관객이 체험하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이 영화의 연출에서는 인물을 조롱하기까지 하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물들이 겪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의 '리듬'을 체험하게끔 하는 것을 영화의 목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네요. 그럼에도 이 영화는 편집이 매우 정확해서, 인물이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해서 다음 행동을 결심하는지 속도가 아주 빠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손실 없이 전달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코랄리 파르자의 세계에서 온갖 '자극적인 연출'은 육체적 광란을 묘사할 때나 고통을 묘사할 때나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저택에서의 파티나 인물이 절벽에서 떨어져 나무에 꽂히는 순간을 유사하게 자극적으로 표현했던 전작 <리벤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브스턴스>에서는 활성제를 맞거나 안정제를 맞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 엘리자베스가 자기 모습을 견딜 수 없어 온몸을 꽁꽁 싸맨 채 리필 키트를 받으러 갈 때, 이와 손톱이 빠지고 귀가 떨어지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수가 밤거리를 활보할 때 사용되는 테크닉의 현란함이나, 수가 자신의 육체성을 만끽하거나 '펌프 잇 업' 쇼를 처음 녹화할 때,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환상에 빠져 자기를 향한 환호를 상상하거나 스노우볼 속의 금가루를 볼 때 사용되는 테크닉의 현란함이 동일합니다. 파르자는 두 작품에서 계속 '(여성의) 육체성'을 탐구하고 있고, 그녀에게 얼이 빠질 것 같은 자극적 연출은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방법에 다름 아닙니다. 코랄리 파르자는 영화를 사색의 도구가 아니라 환각제 비슷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죠. 그리고 그녀에게 육체성이란 관능과 고통이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컬러 팔레트입니다. 영화에는 대략 네 가지 정도의 색이 주요하게 사용되는데, 특히 핵심적인 것은 파랑입니다. 파랑은 노쇠해버린, 그리고 그로 인해 우울한 엘리자베스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첫 장면에서 '스파클 유어 라이프'를 촬영할 때 그녀는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고, 하비가 새우를 처먹으며 안녕을 고하는 장면에서는 상하의 모두 파란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밤 장면은 항상 파란 조명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특히 프레드와의 데이트를 망쳐버린 후 침대에 홀로 남아 있을 때 그 새파란 톤은 더더욱 눈에 확 들어옵니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침대에 파란 옷을 남겨둔 채 (수에 해당되는) 빨간색 옷을 입고 집을 나서려 하는데, 결국은 손에 낀 파란 장갑으로 혐오스러운 자기 얼굴을 미친 듯이 쥐어뜯고 맙니다.


수의 몰락도 결국 그녀가 파랑으로 물드는 광경으로 암시됩니다. 규칙을 깨고 엘리자베스의 액체를 착취하는 몽타주의 한 순간 수는 파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으며, 엘리자베스에 의해 '종료'될 위기에 처했을 때는 연보랏빛 잠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해전야 쇼에서 그녀가 입어야 할(그리고 결국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입는) 드레스는 하늘색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별에 묻은 피를 청소차가 말끔히 씻어내고 나면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명예의 전당 근처의 바닥도 모두 파란색임을 흠칫 깨닫게 됩니다.


엘리자베스의 젊음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시켜줄 서브스턴스는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영화의 첫 쇼트부터 계란 노른자의 분열을 보여주고, 밖에 나갈 때마다 엘리자베스는 노란 코트로 자신을 감쌉니다(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은 서브스턴스 키트를 받으러 갈 때뿐입니다). 노란색 체액이나 토사물, 그리고 수의 푸른 눈 속에 도는 노란 기운으로 영화는 변화에 노랑을 할당합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젊었을 적을 상기시키는 스노우볼의 금가루 또한 노란색이지만, 마지막에 별에 묻은 피를 닦으며 지나가는 청소차 역시 채도 높은 노랑으로 칠해져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짧지만 강렬한 녹색이 있습니다. 이 색은 몬스트로 엘리자수에게 할당되어 있는데, 그녀의 토사물과 타이틀에 녹색이 사용되었습니다. 독과 부패를 의미하는 녹색은, 어쩌면 파란색으로 쓸쓸하지만 자연스럽게 노년을 마무리지었을지도 모를 엘리자베스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건 말하자면 처음부터 내내 강조되어왔던 규칙을 어긴 엘리자베스와 수에게 가해지는 처벌과도 같습니다(빨강과 달리 녹색은 그녀의 책임을 질타하는 색입니다). 


수는 빨강과 분홍으로 자신의 젊음과 관능미를 표현합니다. 엘리자베스의 노란 코트를 입고 오디션장으로 가다가 문득 분홍색 비키니를 입은 마네킹을 발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SUE' 타이틀을 채운 분홍색으로 그녀의 색은 확고히 정해집니다. 오디션에서 "제 이름은 수."라고 말하는 그녀의 빨간 입술은 빅 클로즈업으로 촬영될 뿐만 아니라 수 십 대의 TV 화면 속에서 반복 재생됩니다. 파티에서 데려온 남자와 섹스를 할 때도 수의 입술이 강조되죠.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던 쇼트는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뒤, 파란 차가 지나가고 나면 핑크색 벽과 그 앞을 걸어가는 핑크색 옷차림의 수가 보이는 쇼트였습니다. 이 쇼트는 옛것을 새것이 대체했음을 아주 경제적이고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빨강은 수의 고유한 색깔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빨강은 남성들, 특히 방송 사업을 쥐락펴락하는 하비의 색깔이기 때문입니다. 수와 빨강이 결부되어 있는 것은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그녀의 욕망을 살펴봐야 함을 함축합니다. 관객은 수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빨간색을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몰래 들어간 남자화장실은 영화에서 가장 높은 채도의 빨강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하비가 점유한 공간입니다(카메라 앞까지 다가와 소변을 보는 그는 말 그대로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그는 전화로 엘리자베스를 까내리고 새 여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세면대 앞에 무력하게 서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에게는 잃어버린 젊음만 원망스러운 게 아닐 겁니다. 남성의 욕망에 먹잇감이 된, 혹은 더 이상 먹잇감으로서 효용이 없어진 자신을 한탄하는 거겠죠. 하비가 남김없이 다 먹고 남기고 간 새우 껍집들은 빨간색으로 하비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그가 살만 쏙 발라먹고 내버렸을(지금 엘리자베스와의 식사 또한 그런 자리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을 상기시킵니다. 객석에서 수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며 주주들에게 "She's my most beautiful cre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로서 엘리자베스 또는 수를 보아야 함을 똑똑히 깨닫게 됩니다.


결국 클라이맥스에서 엘리자수는 자신의 피로 무대와 객석, 그리고 복도를 물들입니다. 하비의 붉은 욕망으로 굴러가던 방송국은 엘리자수의 더 붉고 진한 피로 뒤덮입니다. 클라이맥스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피에 젖고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은 한편으로 이것이 엘리자수가 관객을 향해 되갚는 행위로 보이게끔 만듭니다. 의미상 좀 더 자연스러운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자베스와 수가 미디어에 의해 처참하게 희생되었음을 보여주는 클라이맥스이기도 할 것입니다. 피를 뿜으며 복도를 지나간 후 그녀가 사라진, 피만 벽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빈 복도를 보여주는 쇼트는 두 가지 정서를 모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방송국의 복도를 피칠갑으로 만들었구나. 그게 앙갚음을 한 것이든 잡아먹힌 것이든.


이 영화에서 여성,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시각은 어느 정도 과장돼 있긴 합니다. 하비와 오디션 심사위원들, 그리고 세트장 카메라의 시선은 물론이고 동창인 프레드와 이웃 올리버의 시선도 마찬가지죠(상대적으로 이 두 캐릭터는 기능적인 차원에서만 소비되는 느낌이긴 합니다). 후반부로 향할수록 심사위원과 하비의 말이 플래시백 처리되면서 반복됩니다. "차라리 코에 가슴이 달린 게 낫겠다.", "모든 것이 완벽히 제자리에 있군.", "예쁜 여자는 언제나 웃어야 돼.", "여자는 50대가 되면 끝나요." 따위의 말들. 남성의 시각이자 미디어의 시각을 대표하는 이 캐릭터들과 대사들은 연출 측면에서 다소 과용됨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의 좌절과 공포, 그리고 수의 야망을 떠받치는 전제조건이라는 점에서 제 역할을 합니다.


이 영화는 서브스턴스를 오남용한 한 개인/여성의 일탈과 그로 인한 몰락을 다룬 이야기인가? 그렇게 볼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 그녀에게 서브스턴스를 추천해준 남자 역시 그녀와 똑같은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당신도 시작됐나요? 당신을 먹어치우는 거?"). 늙어버린 몸과 다시 찾은 젊은 몸 사이의 전쟁은 어느 인간에게나 보편적입니다. 둘, 이 개인/여성은 서브스턴스를 오남용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피해자입니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남자와 달리 끝 모르고 폭주하게 되는, 즉 폐기해야 할 활성제를 또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여성이자 미디어에 비침으로써 욕망을 충족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몬스트로가 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와 수는 몬스트로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죠.


<서브스턴스>는 연출 못지않게 각본도 좋습니다. 특히 저에게는 중반부가 가장 뛰어나게 느껴졌는데, 두 사람이 몸을 점유할 때마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이 설정에서 끌어낼 수 있는 거의 최상의 재미와 성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엘리자베스는 달력에 한 주는 'SUE'라고 적고 한 주는 'X' 표시를 함으로써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했습니다. 수 역시 '더럽고 늙고 뚱뚱하고 역겨운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자신의 몸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수가 자신의 몸과 거기에 딸려오는 쾌락과 명예에 탐닉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처참히 망가지고,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그나마 평범한 노년을 수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을 선포합니다. 수가 출연한 토크쇼를 보며 격노하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녀가 수에게 얼마나 질투심과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음, 그러고 보니 저도 엘리자베스와 수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하고 있네요. 엘리자베스와 수는 두 사람이 아닙니다. 둘 모두 '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그녀'는 스스로의 정신으로 다만 다른 몸에서 행한 일까지 질투하고, 자신의 젊음을 유지시켜줄 다른 몸을 멸시합니다. '그녀'를 망친 건 '그녀' 자신이며 '그녀'는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이 허무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녀'가 배꼽에서 닭다리를 꺼내는 환상에 시달리는 순간입니다. 그 닭다리는 데이트를 망치고 낙담한 '그녀'가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 '그녀'는 그 사실을 견디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녀'라는 건 없어요."라고 단언하는 상담원의 말은 제3자에게만 옳은 말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자아 개념이 의식이 아니라 몸에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의 몸이 활성화돼 있는 동안 다른 몸이 꺼져 있다고 해도, 엘리자베스의 정신이 두 몸을 오가는 거라고 해도, 엘리자베스와 수는 다른 사람입니다. 생명과학적으로 엄밀한 이런 자아 개념을 가지고 <서브스턴스>는 전에 본 적 없는 전쟁을 흥미롭게 그려냅니다.


엘리자베스가 의식하는 것이 화장실 안에 숨겨놓은 수가 아니라 전광판 또는 TV에 등장하는 수라는 사실을 통해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에 그녀가 얼마나 꽁꽁 묶여 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데이트에 가야 하는데 통유리를 통해 거대하게 보이는 수의 전광판을 보고 그녀는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로 돌아갑니다. 전광판 속 수의 모습과 비교하면 문고리에 비치는 스스로의 얼굴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장면은 거의 악취미로 만들어낸 역설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위치에 엘리자베스가 살고 있는 이유는 자기 모습이 걸린 전광판을 즐기기 위해서였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면 전광판은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하비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버려진 뒤 엘리자베스는 차를 몰다가 전광판에서 자신의 쇼 홍보를 내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교통사고가 나고, 병원에서 젊은 남자에게 서브스턴스를 소개받죠. 이 영화는 초반부의 설정 이후 본격적인 사건으로 넘어가는 지점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주인공의 욕망에서 점화되는 탄탄한 구조로 포장해둔 셈입니다.


'당신이 원형이다'라는 서브스턴스의 경고는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말은 엘리자베스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상기시키는데, 여기서 누군가는 교훈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받아들여라!') 영화는 이걸 이야기를 다음 단계로 밀고가는 요소로 사용하는 동시에 거기서 또 다른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더욱 심하게 육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수를 '종료'시키지 못합니다. "안 되겠어. 난 내 자신이 싫거든.", "흉측만 나만 남게 돼. 그러니 돌아와."라는 말을 읊조리며 심폐소생술을 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몬스트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비극의 정점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엘리자베스, 즉 늙은 몸이 원형이라는 것은 저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약 새로 복제된,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자신이 원형이라면 이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이 공상과학적 호러 속에서도 '당신이 원형이다'라는 명제는 현실 속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똑같이 표현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각본에서 재치가 반짝이는 일종의 언어유희를 언급할 수 있겠네요. 수에게 새해전야 쇼를 기념하며 보낸 장미에는 'BREAK A LEG! THEY ARE GOING TO LOVE YOU!'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엘리자베스가 받은 메모의 과거형과 달리 수는 미래형으로 적힌 메모를 받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메모의 앞 문장은 실현되지만 뒷문장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엘리자수는 복도에 몰려들어 환호하는 사람들을 상상하지만 결국 관객들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 그녀에게는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라는 찬사 대신 "Shoot the monster!"라는 고함과 폭행이 되돌아오죠. 그러나 행운을 빈다는 관용적 의미와 다르게 마지막 순간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면서 길에 넘어지고 그로 인해 온몸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정말 짓궂은 농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원의 남자 직원이 건넨 메모 속 'It changed my life.'라는 말의 의미도 뒤에 가면 정반대로 뒤집히죠. 엘리자베스의 성이 'Sparkle'이라는 점도 빠뜨릴 수 없겠고요. 우리는 또 한 번 영화와 인물 사이의 먼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영화의 각본에서 결함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점은 초반부에 경고 사항들이 모조리 열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련의 규칙들이 제시되는 순간 관객은 주인공이 이 규칙들을 어기게 될 것임을 바로 알 수 있고, 게다가 반복되는 상담원과의 통화에서도 이 경고 사항들은 재차 지적됩니다. 영화는 이 예측 가능한 전개를 그럼에도 관객이 예상치 못했을 비주얼 쇼크로 돌파합니다. 리뷰를 마무리하면서 바디 호러로서 폭주하는 몬스트로 시퀀스는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겁니다.


귀도 아닌 어딘가에 귀걸이를 끼우고 얼마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고데기로 펴는 엘리자수를 비추는 동안 영화는 마치 디즈니의 공주가 치장하는 장면에 깔릴 법한 음악을 삽입해 아이러니와 기괴함을 증폭시킵니다. 엘리자수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삽입한 것은 영화가 이 인물과 그녀의 파멸을 조롱에 가깝게 다루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젖이 하나 떨어져 나오는 것 또한 여성의 육체가 전시되는 방식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악취 진동하는 조크겠죠.


피 분수 장면은 앞서 논의한 함의를 갖고 있긴 해도 시나리오적으로 연결이 부드러운 클라이맥스는 아닌 듯 보입니다. 오히려 감독이 상상한 악취미적인 광경을 클라이맥스에 배치해놓은 느낌인데, 저한테는 시각적인 참상보다도 피가 격렬히 분출되는 소리를 음악, 비명 등과 섞어 크게 믹싱해놓은 것이 스펙터클의 핵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화면을 가득 채운 빨간색이 의미소의 정점에 해당한다면, 다른 사운드들을 압도하는 피 분수 사운드는 감각적 자극의 정점인 셈입니다. 저는 인위성이 살짝 걸리고 장면이 다소 길다고 생각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이 클라이맥스를 꽤나 즐겼습니다. 장르영화를 만드는 창작자 입장에서, 한 번 머릿속을 스친 이상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장관이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저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공유하면서 리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건 '펌프 잇 업' 쇼의 첫 촬영 장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등에서 복제되어 나온 직후 수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나체를 골똘히, 아주 오래 응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샤워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가슴부터 엉덩이까지 클로즈업으로 훑고 내려갑니다. 저는 이 장면은 영화의 자극적인 연출법의 연장선상에서 젊은 몸에 대한 매혹과 탐닉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펌프 잇 업' 장면에서 빅 클로즈업으로 몸 구석구석을 훑는 촬영과 신체를 더 오래,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스피드 램프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선정적인 동작들은 차라리 이야기의 일부로서 문제 삼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힙합 뮤직비디오에서 숱하게 봐왔던 여성의 육체를 전시하는 방식을 그대로 활용합니다. 심지어 방송용 카메라라는 필터 한 단계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도요. 후에 엘리자베스가 TV에서 이 쇼를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방송 안에서 이런 식의 촬영과 편집이 사용되었다면 얼마든지 이해가 됐을 겁니다. 하지만 왜 파르자는 자신의 카메라를 직접 이용해서, 자신이 야유하는 미디어가 차용했을 법한 스타일로 이 장면을 연출했을까요?


저는 이게 미디어의 착취적 방법론을 흉내 내서 역으로 미디어를 풍자하는 전략적 도구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장면에 대한 물음표는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네요. 사실상 부주의로 인한 실수로 보이는 이 장면은 울퉁불퉁하게 걸리기는 해도 제동이 걸리지는 않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저를 멈춰서게 만드는 지점이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