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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 "구제할 수 없는 인간들이 있어."

풀악셀로 질주하는 내리막길, 복수심 또는 죄책감으로

by 헤이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 길티>를 정말정말 좋아하고, 과대평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6년 만에 만나는 구스타브 몰러의 신작은 큰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더 길티>와 비교하면 당연히 <더 길티>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올해 나온 수작들의 목록에 당당히 자리할 만합니다.


<아들들>을 보고, 구스타브 몰러는 마음속의 지옥을 정말 잘 그려내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누군가는 마음속의 지옥을 서정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테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수위나 탐미적인 이미지로 외화할 수도 있을 텐데 구스타브 몰러는 마음속의 지옥도를 브레이크 없이 풀악셀로 질주하는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더 길티>에서 관객이 주인공과의 심리적 페이스를 놓치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를 말리고 싶어지기까지 하듯이, <아들들> 역시 거짓말과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마음속의 공허를 채우려는 인물을 그러지 못하게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다만 <아들들>이 전작과 다른 점은 상대적으로 에바의 심리는 다소 과격해 보이더라도 뭇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는 데 있겠죠.


<아들들>을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장르는 스릴러로 번안하고 심리는 어둡게 뒤틀어 만든 듯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나 결말부에 이르면 여러모로 아쉬워지는데, 특히 중요한 순간에 에바가 자신이 시몬의 엄마임을 밝히고, 이 말을 들은 미켈이 도망치다가 미끄러져 '추락하는' 것은 <아들>을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 영화를 떠올리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기승전결의 높낮이 폭을 크게 키워가며 진행되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후반부는 다소 성급하게 마무리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아들들>에서 가장 탁월한 것은 '감금'의 이미지 디자인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을 프레임 또는 프레임 속의 프레임 안에 가둠으로써 그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는데, 에바의 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금'되어 있다고 일컫는 것이 너무나 적절해서 이야기와 이미지가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영화의 공간적 세팅이 감옥이라는 것부터 자연스럽죠. 그리고 구스타브 몰러의 오프닝은 언제나 심플하면서 탁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더 길티>에서 헤드셋으로 '막힌' 아스게르의 귀를 비추며 시작했듯이 <아들들>은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에바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1.37:1의 화면비를 택한 것 또한 옆쪽의 여백을 최대한 잘라내서 인물을 포위하고, 특히나 빅 클로즈업을 잡았을 때 화면이 에바의 얼굴로 꽉 차서 그녀가 밀폐돼 있는 듯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에바는 촬영적으로 '갇혀' 있어서, 그런 예시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건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대화할 때 카메라는 반드시 피사체 반대쪽으로 넘어가서 창살을 걸고 인물을 찍습니다. 에바가 미켈과 엄마의 면회를 훔쳐볼 때는 그녀의 시점에 포착된 모자뿐만 아니라 그녀조차 문 반대편에서 프레임 안에 갇히게 촬영되고, 두 번 나오는 소지품 보관실 장면은 두 번 모두 서랍과 거기 놓인 물건들을 걸고 에바를 찍습니다. 미켈이 외출할 때, 계단 틈까지 사용해 인물들에게 허락된 공간을 극도로 좁혀 놓는 촬영은 아이디어가 참신합니다. 심지어 외출 나온 미켈을 태운 밴을 보면서 여기서는 필연적으로 트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밴이 멈춰 서고 나무 기둥 두 개와 위쪽의 가지를 이용해 밴을 막아두는 것을 보고는 그저 감탄할 뿐이었죠. 미켈과 엄마의 대화를 길게 보여주는 롱쇼트에서 각각의 인물들은 창틀로 분리되어 있고, 떠나는 미켈을 바라보는 엄마 역시 창문 바깥에서 유리와 창살을 걸고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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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해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온순한 죄수들이 수감된 서5동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하던 에바가 미켈이 온 것을 보고 이성을 잃은 뒤 중앙동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죠. 물론 에바가 어떻게 복수할지를, 전출을 요청할 때도 실제로 미켈을 만났을 때도 계획하거나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사실 그녀가 미켈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러다가 미켈에게 과도한 폭력을 가함으로써 소송 및 징역의 위기에 처하자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중반부는 핑퐁처럼 오가는 이 파워 게임이 주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다가 미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간 외출을 얻어낸 후 미켈의 집까지 동행해서 모자가 어떤 관계인지 보게 되는 것이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저는 에바가 진실을 밝히는 순간보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서브텍스트 측면에서 더 클라이맥스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에바는 서5동으로 돌아가고, 미켈은 중앙동에 남죠. 아래층에서의 지옥 같은 일들이 끝난 뒤, 모든 상황은 원래 자리를 찾습니다.


에바의 심리를 복수심이나 증오로 파악하면 줄거리를 이 정도로만 묘사해도 충분할 겁니다. 과도한 복수심이 자신을 물어뜯는 상황을 만들었고, 그럼에도 어쨌든 미켈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는 결말이죠. 복귀하는 차 안에서 에바는 고개를 돌려 미켈을 정면으로 쳐다보는데 그는 잠깐 시선을 맞받다가 고개를 떨궈버립니다. 그리고 독방에 홀로 남게 되자 시몬의 망령이 그를 찾아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더 이상 미켈의 뜻대로 놀아나기 싫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바 역시 더 이상 미켈과 엮이고 싶지 않아 했으니 자기 뜻을 이루면서 결말을 맞이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정도만 다뤄서는 영화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사실 에바와 미켈 사이의 일들로 이루어진 표층만큼 에바가 시몬에 대해 고민하는 서브텍스트 쪽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시몬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 또한 가중폭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었으며, 에바는 오히려 아들이 감옥에 간 이후 마음이 편해졌고 애가 사라져서 기쁘기까지 했다고 목사에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미켈의 엄마와 달리)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면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에바는 갈수록 말을 듣지 않고,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지다가 결국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지긋지긋했던 아들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란, 죽고 나서야 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일까? 이 영화의 표층을 따라간다면 에바의 심리는 아들을 잃은 후의 사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미켈에게 가하는 폭력들은 그렇게 보아도 자연스럽죠. 그러나 저는 에바가 하게 되었다는 그 생각이, '시몬이 변할 수 있(었)을까?'라고 추측합니다. 미켈은 에바로 하여금 그 가능성 자체를 평생 미지의 영역에 놓아둘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에바의 증오 중 일부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형성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라미가 '17번 수감자'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는 것은, 시나리오 작법으로만 따지면 과잉입니다. 관객은 미켈이 에바의 아들을 죽였음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라미가 미켈을 집어서 그의 범행을 늘어놓은 이유는 에바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중앙동에 있는 수감자 중 누구였어도 상관없었겠지만 하필 에바가 들여다보고 있던 것이 17번 방이었고, 그 안의 흉악범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과장된 톤으로 알려준 겁니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라미는 '여기 수감자들은 다 갱생 불가능'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때 카메라는 화자인 라미가 아니라 청자인 에바를 비추고 있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가가 촉촉해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감정적으로 아들이 살해당한 방법을 조목조목 들어야 하는 에바의 참담한 심경을 표현합니다(칼로 찔린 부위들을 열거할 때 에바의 클로즈업으로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이곳의 수감자들이 갱생 불가능하다는 말에 대한 에바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에바에게 남아 있습니다.


라미는 이 입장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미켈을 폭행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에바 편을 들고 고소당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흉악범들에 대한 그의 견해가 바탕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에바가 미켈 대신 주간 외출을 신청할 때도 그는 극구 반대하며, 마지막 장면에서도 "구제할 수 없는 인간들이 있어. 현실이 그래."라고 말하고 퇴장합니다(그리고 이게 영화의 마지막 대사입니다). 엔딩의 카메라는 복도에 앉은 에바와 그녀를 위로하는 라미를 정측에서 잡는데 화면 한가운데 바닥에는 노란색 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선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고요. 그리고 마침내 에바가 일어나서 퇴장할 때 그녀는 Z축 끝까지 그 선을 밟고 걷습니다. 이건 연출의 명확한 디렉션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화면 가장 안쪽에서 그녀는 라미가 사라졌던 오른쪽으로 퇴장합니다. 영화는 다소 뜬금없이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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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바깥에서 발생한, 심지어 에바 역시 보지 못했던 사건인 시몬의 죽음은 수감자의 자살로 변주되어 반복됩니다. 미켈과의 요가 명상 중 눈을 감고 시몬이 살해당하는 순간을 상상했던 혹은 꿈꿨던 에바는 코드13이 발생했다며 자신을 찾는 동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납니다. 즉, 편집의 논리에 의하면 두 사람의 죽음은 겹쳐 있습니다. 그리고 서5동으로 달려가는 에바의 모습은 핸드헬드로 격렬하게 촬영돼 있는데, 이는 그녀의 심적 동요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수감자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이고, 바로 교회를 찾아갑니다.


이 전개가 아쉬운 이유가 있다면 에바와 자살자의 관계를 제대로 묘사해둔 적이 없어서 그녀가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는다는 것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에게 건네는 말인 "곁을 못 지켰어요.", "아예 나 몰라라 했어요. 방치했죠. 날 찾는 사람 옆에 있어주지 않았어요."는 자살자와 시몬을 동시에 떠올리도록 의도된 대사겠지만, 목사가 이걸 자살자에 대한 이야기로 알아듣는 것처럼 관객에게는 시몬의 이야기로만 들립니다. 아마도 감독은 첫 장면의 친밀한 분위기로 에바와 수감자들의 유대 관계가 전달됐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녀가 미켈에 대한 감정에 휩싸여 수감자를 방치해둔 사이 그는 죽고 말았고, 이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는 처음으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남에게 꺼냅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그녀를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어그러지고 맙니다. 신부가 지금은 면회를 가느냐고 묻자 에바는 연락이 끊겼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살자에 대해 에바가 자책하자 신부가 건넨 위로의 말, "우린 최선을 다하잖아요."는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닙니다. 에바는 (시몬에게도 수감자에게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습니다.


폭행 이후 에바는 입원해 있는 미켈을 찾아가 (역시 문에 달린 작은 창문 틈으로) 그를 지켜봅니다. 이 장면은 암전이 된 이후 미켈의 고통스러운 호흡을 한참 동안 들려준 후에야 끝납니다. 다음 장면에서 에바는 미켈을 찾아가 바깥공기를 쐬게 해주고 담배를 줍니다. 그리고 사과를 하면서 원래 있던 수용동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죠. 그러니까 에바는 이때 이미 미켈과의 볼일은 끝났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미켈의 협박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끊지 못했을 뿐, 이 정도면 충분히 복수했다고 생각해서든지 심하게 다친 그의 모습을 보고 연민이 들었든지 에바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파워 게임은 역전돼버렸고, 그녀는 억지로 미켈을 더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원치 않게 미켈과 가까이 지내면서, 에바는 그에게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이 영화를 같이 본 지인은 에바가 미켈의 변화가능성을 보고 흔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런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17번 수감자'라고 부르자 미켈이 "내 이름은 미켈이에요."라고 말하고, 에바의 이름까지 물어보는 장면은 두 사람 사이의 유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켈이 요가를 하고 학습실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에바는 그가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요? 저는 그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싶은 마음에 에바를 이용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엄마가 석방된 후에는 뭘 할지 묻자 미켈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외출 신청을 대신 해줄 때 에바가 했던 말들, "나가면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니."라든가 "사회에서 어머니를 보면 수용자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같은 말들은 진심이었을까요? 저는 미켈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입에 발린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에바는 거짓말을 너무나 잘하니까요. 모자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미켈이 이 제안에 반응할 거라고 예상해서 던진 말이 아니었을지.


오히려 저는 에바가 미켈의 엄마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지 못했던 일을 그녀는 하고 있으니까요. 처음에 '미켈, 생일 축하해 사랑하는 엄마가'라고 적힌 책을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린 것은 미켈에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듯 보였습니다. 접견 예약자 목록을 보고 라미를 찾아가 면회를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친밀해 보이는 그의 가족관계를 망치기 위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사실 에바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연결되었던 사람은(이때의 연결은 유대 같은 긍정적인 의미보다 거미줄처럼 끈적끈적한 느낌에 가깝습니다) 제가 봤을 때 미켈이 아니라 미켈의 엄마입니다. 에바의 마음속 지옥은 사실 미켈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시몬에 대한 죄책감으로 더 펄펄 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티타임이 파한 후 익스트림 롱쇼트로 일관하던 카메라는 에바의 빅 클로즈업으로 단숨에 들어갑니다.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한 에바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쇼트는 미켈이 복귀하는 것을 집안에서 바라보는 엄마의 쇼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 쇼트는 창문 바깥에서 유리와 창살을 걸고 찍었는데, 심지어 창살이 필요 없을 것 같은 가정집 창문에 이 영화는 창살을 설치해놓았습니다. 즉, 이 쇼트는 미켈의 엄마 또한 에바와 마찬가지로 '수인'임을 드러냅니다. 미켈의 집에 가서 에바가 확인한 사실은 미켈이 변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미켈의 엄마 또한 수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켈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계속 에바를 협박할 생각만 한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다음번에는 낫겠죠."라고 말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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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미켈이, 그러므로 시몬도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한 에바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을까요? 흉악범인 아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주는 엄마도 지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에바는 앞으로 시몬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원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요. 에바는 미켈을 죽이는 데 실패합니다. 혹은 죽이기를 포기합니다. 그렇다면 시몬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녀는 '시몬을 죽일 수 없었을' 겁니다. 이건 당연히 상징적인 말입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시몬의 죽음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라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보면 영화의 마지막 대사 "구제할 수 없는 인간들이 있어."라는 말은 미켈이 아니라 에바를 향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녀는 결국 구원을 찾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영화가 어떻게 의도했는지와 관계없이 저한테는 계속 한 가지가 더 걸립니다. 그러니까 설령 에바가 미켈의 변화불가능성과 미켈 엄마가 수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더라도 시몬은 어땠을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의 마음속에는 '그렇지만 시몬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이 소용돌이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물음은 에바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에바는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인간'일 겁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심리는 다르덴 형제의 <아들>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이 뛰어난 영화인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이 지점을 가장 첫 번째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는 전적으로 에바에 대한 이야기이고, 미켈은 깊이 있게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 에바의 이야기를 위해 환경 혹은 대상으로 조성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같이 본 지인이 미켈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제가 놓친 게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만약 미켈을 또 하나의 주요 인물로 파악한다면, 저는 '위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미켈의 욕망에 주목하게 됩니다.


영화 속 교도소에서 서5동과 중앙동은 매우 다르고, 영화는 이 차이를 효율적이지만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오프닝에서 에바는 수감자마다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어주고 수감자들도 모두 인사를 받아줍니다. 그리고 에바와 수감자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중앙동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번호로 부릅니다. 라미는 에바가 서5동에서 왔다고 하자 서5동을 '약골들만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데, 서5동에서 소동이란 샤워실에서 수감자가 나오지 않는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앙동에서 에바가 처음 맞닥뜨린 일은 발작을 일으킨 수감자를 진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교도관들이 죄다 달라붙고 심지어 수감자의 따귀를 때려야 할 정도로 폭력적이었습니다. 에바가 막 이감되어 온 미켈을 발견하고 뒤를 밟는 장면에서, 서5동의 하얗고 환한 복도는 어둡고 붉은 조명의 복도로 갑작스럽게 컷 됩니다. 그리고 서5동은 위층에, 중앙동은 아래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두 공간을 대비하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켈이 중앙동에서 나와 서5동으로 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미켈의 욕망은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는 '위에 있는' 서5동으로 가고 싶어 하고, 또한 집에서도 계속 '위층'에 가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만) 만약 미켈이 갱생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면, 그리고 만약 '위'가 인물의 갱생을 의미하는 거라면, 미켈은 실패합니다. 독방으로 복귀하기 전에도 그는 산비탈에서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미켈은 에바를 이용해 서5동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속죄 없이 얄팍한 방식을 이용해 위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지하의 독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그는 교도관들에게 위악적인 제스처를 취할 만큼 좌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순간에 이르러서 미켈은 비로소 자기 죗값을 치르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를 타이트하게 잡던 카메라가 살짝 옆으로 비껴 나면, 포커스아웃된 시몬이 뒤에 계속 앉아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사실 맥락을 배제한 촬영 및 유사한 컬러의 조명으로 에바가 독방에 들어와 있는 듯 보이는 쇼트가 바로 뒤에 붙어 있는데, 이는 에바가 계속해서 미켈을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떤 의미로든 미켈에게 인생의 새로운 단계가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스타브 몰러는 내면 깊숙한 곳의 어두운 심리를 장르적인 어법 속에서, 하지만 비할리우드적인 스타일과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두 번이나 탁월하게 다뤄냈습니다. <더 길티>와 <아들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몰러만의 느낌을 정확히 자아냅니다. 게다가 몰러가 다루는 인간들은 심리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드러내는, 혹은 그 심리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는 행위 역시 어두워서 더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에바가 미켈을 괴롭히는 방식들은 정말 사소하면서도 지독합니다. 치졸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담배를 주지 않거나 화장실에 못 가게 만드는 것부터, 음식에 침을 뱉고 자기 앞에서 소변통을 채우도록 강요해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까지. 물대포를 쏘는 장면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듯한 그녀의 클로즈업으로 끝나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가 정확한 순간에 달려들어 미켈을 폭행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야비한가요. 무엇보다 그녀는 중앙동으로 근무부서를 옮길 때부터 끝까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합니다(심지어 텍스트 바깥에서, 그러니까 교도관으로 취직할 때부터 일부 정보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상실감이나 고민을 차치하고서라도, 에바는 시나리오 작법 측면에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계속 같은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주길 바라는 감독이 그리 많지 않은데, 구스타브 몰러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캐릭터와 이야기를 들고 오더라도 이 맛을 쭉 유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두 번째 영화도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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