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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설 Aug 24. 2020

<반교: 디텐션>, 호러여야 하는 명확한 이유

시대를 목격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아직까지 올해 최고의 영화는 <1917>입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쭉 줄을 세울 만한 좋은 영화들이 올해에도 많았었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마에게>,  <페인 앤 글로리>, <문신을 한 신부님>, <더 플랫폼>, <톰보이>, <소년 아메드>는 흔쾌히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연말에 제가 특히 기억할 영화는 <문신을 한 신부님>과 <더 플랫폼>일 것 같습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닌데, 유독 올해 저에게 각별한 영화들은 (<1917>을 제외하면) 어둡고 습한 이야기와 기이한 에너지로 폭주하는 작품들이네요.


위의 두 편에 <반교: 디텐션>을 추가하고 싶어졌습니다. 사실 <반교: 디텐션>은 저 일곱 편의 훌륭한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수작은 아닙니다(그렇게 될 잠재력이 충분한데 약간 아쉽게 미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반도> 때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런 경우를 마주할 때마다 별점이란 건 어김없이 무력해지고 마는군요.

저는 이 영화의 원작 게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보를 간략히 찾아본 정도인데, 두 가지 정도의 감상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영화가 원작에 상당히 충실하다는 점, 그리고 독서회를 밀고한 이후의 팡루이신에 대해서는 아주 중요한 각색이 이루어졌다는 점. 하지만 오늘 글에서는 게임과의 비교는 하지 않습니다.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 무지한 제가 비교를 하는 것이 그닥 유용한 일은 아닐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생길 수 있을 듯해서 위의 말을 미리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반교: 디텐션>은 상당 부분 원작이 쌓아 놓은 토대 위에서 자신의('자신만의'라는 말은 비교가 전제되어야 쓸 수 있으므로 저는 사용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성취를 이루어낸 작품인데, 이 글에서 저는 영화가 0에서부터 이 모든 성취를 쌓아 올린 것처럼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는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술한 대로, 제가 게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교: 디텐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플롯입니다. 이 영화에는 총 세 개의 챕터가 있고, 첫 번째 챕터의 제목은 '악몽'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팡루이신과 웨이중팅이 고립된 학교 안에서 겪는 일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자와 이미 죽은 자가 함께 꾸는 악몽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해지죠. 핵심적인 사건이 온통 꿈속에서 벌어지는 영화라니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 끔찍한 시대와 사건을 밑그림으로 삼는 영화가 '사건 이후'를 다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적합한 구조를 차용했다고 느껴집니다. 이 작품에서 밀고한 자와 고발당한 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 서로 엮이는지는, 처음 엮일 때 못지않게 '사건 이후' 다시금 엮일 때에 이르러 무엇보다 중요해지니까요.


그러므로 플래시백을 극의 핵심적인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이 영화에는 실제로 일어난 현실의 일이 있고, 두 사람이 이를 바탕으로 꾸는 꿈이 있습니다. 굳이 조금 널널하게 봐준다면 이 영화의 작법은 '플래시백'이 아니라 '현실과 꿈의 교차'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물론 저는 플래시백이라고 할 겁니다). <반교: 디텐션>의 주요 사건은 사실 굉장히 단순하고 직선적인데 이 사건이 비선형적으로 제시되고 또한 영화가 꿈속에서의 일을 제1스토리로 채택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관객으로서는 사건의 추이와 현실-꿈의 관계에 대해 동시에 고민하게 됩니다(프롤로그와 챕터1, 챕터2를 넓게 보면 제시되는 과거 사건들의 타임라인이 뒤섞여 있는데, 각 챕터 안에서는 사건들이 시간 순으로 전개됩니다).

이 전략이 가장 탁월하게 적중한 것이 초반부입니다. 첫 번째 챕터에서 등장하는 호러 장치들은 명확한 맥락이나 해당 이미지로 구현되어야 할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데, 때문에 이 부분의 이야기들이 뒤에 가서 짜 맞춰지는 것이 관객으로서는 재미있죠. <반교: 디텐션>의 초반부 전략은 공포와 미스터리입니다. 이는 (서사를 다루는 기교가 아닌) 순수하게 장르적인 재미를 먼저 추구한다는 뜻이고, 결과적으로 관객의 이목을 붙잡아둘 만큼 이 전략은 잘 먹힙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후반부의 전략은 따로 전개시켜왔던 꿈과 현실의 이야기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닙니다(둘을 성공적으로 엮어내고, 또 둘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고한 한 가지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 전략은, 꿈속에서 풀어야 할 일과 현실에서 매듭 지어야 할 일을 따로 상정해놓고 두 플롯을 각자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즉,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를 풀어내는 것이 핵심이라면, 꿈속에서는 망각 상태를 벗어난(이 부분은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죠) 팡루이신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지켜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두 플롯은 결국 엔딩에 가서야 한 가지로 합쳐집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가 장르적으로나 주제적으로 '정확한' 전개를 밟아나감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잡아끄는 것은 두 플롯이 어정쩡하게 서로에게 기대지 않고 각자의 몫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해서 모든 순간 플래시백을 타당하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죠.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플래시백은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혹은 친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특정한 사건이 꿈속의 공포로 귀결되거나, 특정한 공포 효과가 이전 사건에 대한 기억을 촉발하는 것은 이 영화에 필요한 방법론입니다(그다지 정교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그때그때 맞붙이는데도 미학적으로 탁월했던 예시로는 <블루 재스민>이 있습니다). <반교: 디텐션>의 후반부는 실제로 그런 식의 연결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 방식은 초반부에 꿈속의 사건과 현실의 서사 진행이 반드시 일대일 대응되지는 않았었다는 사실과 대비됩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초반부의 전략은 미스터리였으니까요. 그런데 꿈속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그와 대응되는 실제 사건이 뒤이어 곧장 묘사되는 식의 전개가 반복되는 후반부는, 진행시켜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상황에서 직접적인 배치가 아니고서는 이를 제대로 다 말할 수 없겠다는 조바심을 자꾸만 의식하게 만듭니다(그러니까 저는, 단순히 이 부분이 친절하다는 점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편의적으로 이 부분에 접근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미 비선형적인 이 영화의 플롯 상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플래시백들을 배치했다면 관객에게 더 많은 지적 유희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고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캐비닛에 갇힌 성을 보여주는 장면과 웨이중팅이 거짓말을 해서 성에게서 책을 전달받는 장면이 나란히 붙어있는 건 너무 쉬운 방식이 아니냐는 거죠(비선형적인 플롯이 다루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조합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져서 '왜 이 조합인가?', '왜 다른 조합은 아닌가?'와 같은 의문들이 쉽게 그리고 수없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교: 디텐션>은 호러로서는 소박한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사실상 관객을 무섭게 하는 공포 효과는 거의 나오지 않고, 챕터1에서도 사운드와 갑작스러운 컷을 통해 사람을 깜짝 놀래는 정도의 장면들만 등장합니다. 한 쇼트 안에서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은 아예 없고, 점프 스케어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항상 사운드 아니면 편집입니다. 장면 자체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을 정도로 길어져서 관객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컨저링>이나 <곤지암>에서 이런 류의 장면들 때문에 너무 무서웠는데) 대목도 없고요. 굳이 고르자면 팡루이신의 귀신이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뒤쫓아오는 장면이 있겠지만, 강도는 많이 약하죠.


그리고 그 장치들을 활용하는 방식도 익숙합니다. 챕터1이 시작하고 팡루이신이 혼자 텅 빈 복도를 걸을 때, 영화는 번개가 꽝 치는 걸로 관객을 한 번 놀라게 만들지만 이후에 지속적으로 삽입되는 번개 소리는 관객이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작게 믹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의 번개 소리는 명백하게 (일회성) 점프 스케어로 사용된 거죠.

팡루이신이 거울 속에서 자기 귀신을 보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팡루이신과 웨이중팅이 대화하는 동안 긴장감을 유발하는 음악이 깔립니다. 점차 무언가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다가, 어느 순간 음악과 앰비언스가 모두 사라집니다. 고조시키던 긴장감을 갑자기 툭 꺾어버리면서 안도감을 자아내는 거죠. 그리고 그때 불쑥 귀신이 나타납니다. 이 역시 관객을 안심하게 만들었다가 그 직후에 놀래는 호러의 전형적인 리듬입니다(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 그 고조되는 분위기의 끝에서 제대로 터뜨려주는 방식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반교: 디텐션>에서 초반부의 공포는 그리 창의적이지 않고, 후반부에는 공포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하나는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1962년 대만이라는 압도적인 공포의 대상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저는 <반교: 디텐션>이 왜 이 이야기를 꼭 호러라는 장르로써 풀어내야만 했는지 명확한 이유를 제시했다고 봅니다.


이 영화에서 귀신은 둘 등장하는데, 하나는 팡루이신의 귀신이고 하나는 군인 괴물입니다. 군인 괴물이 상징하는 바는 대만 국민당 정부로 명확하죠. 영화가 시작되면 학교 앞에 울려 퍼지는 계엄령 방송이 들려옵니다. 간첩과 간첩을 은닉해주는 사람은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방송은 군인 괴물이 처음 등장할 때 똑같이 반복되며, 이때 군인 괴물은 독서회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학교 관리인을 살해하고(물론 이것은 당에 의해 학교 관리인이 처형된 사건에 대한 은유입니다) 웨이중팅과 팡루이신을 쫓아옵니다.

여담입니다만, 아마 이때 군인 괴물은 웨이중팅만을 쫓아왔을 겁니다. 왜냐하면 독서회에 속했던 것은 웨이중팅뿐이니까요. 만약 군인 괴물에게 인격이 있었다면, 그는 팡루이신을 치하했겠죠. 그녀는 당의 배신자를 고발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공포의 대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바이 교관입니다. 군인 괴물이 꿈속에서 (이미 처형당한) 독서회 사람들을 다시금 죽이는 자라면, 바이 교관은 현실에서 눈에 불을 켜고 교사와 학생을 감시하는 자입니다. 그 역시 장교이고,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 대만 국민당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관객의 공포를 겨냥했던 초반부를 지나 <반교: 디텐션>은 인물들의 공포로 이행해갑니다. 이 영화가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실존했던 시대를 통과해온 인물들이 겪었던 공포이기 때문에 이 이행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앞서 팡루이신과 웨이중팅에 대해 관객의 이입을 충분히 확보해놓은 상태입니다(관객을 팡루이신의 자리에 앉아 있도록 만든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점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포함한 독서회 사람들의 공포를 관객은 함께 느낍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공포영화라면, 그건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끔찍했던 시대에 대한 생생한 공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대만의 역사가 익숙하다면 더 잘 이해될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당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영화가 효율적으로 세팅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습니다(거의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봤을 때 제대로 느끼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다릅니다).

또한 대만의 현대사는 한국의 현대사와도 상당 부분 유사하죠. 이 영화의 메시지인 '잊어서는 안 된다'는 지금의 대만인들을 겨냥한 것이었겠지만, 우리에게도 똑같은 무게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군부 독재시대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6.25 전쟁, 혹은 세월호 참사까지 다양한 시대와 사건을 떠올릴 겁니다. 그만큼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뻔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긍정하게 되는 것은 그 메시지로 향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망각의 모티브입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팡루이신은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교실에서 깨어납니다. 얼마 뒤에 마주치는 웨이중팅 또한 명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악몽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재확인하면서 마침내 망각에서 깨어납니다. <반교: 디텐션>이 망각의 모티브를 다루는 데에는 레이어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첫 번째. 두 사람은 똑같이 기억을 잃었지만, 그 이유는 다릅니다. 팡루이신은 죽었기 때문이고, 웨이중팅은 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시대를 통과한 자의 윤리는 살아남아서 목격한 바를 증언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잊어서는 안 된다' 안에는 '살아남아야 한다'와 '증언해야 한다'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 시대 안에서 가해자를 도왔든 일방적으로 피해자의 자리에 섰든 책무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팡루이신은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웨이중팅은 밀고자가 되지 않기 위해 차라리 처형당하려 합니다.

이때 팡루이신에게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 즉 살아남아 시대에 대해 증언하는 일에 대한 책무를 웨이중팅에게 일깨워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녀의 속죄는 죽음이 아니라 이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루어지죠. 다시 말해 이 악몽 속에서 웨이중팅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팡루이신은 죽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화가 팡루이신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 그녀는 목소리를 내기 포기한 사람이고, 둘, 그녀는 가해자를 도운 조력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영화가 적극적으로 지적하는 팡루이신의 죄는 증언할 책임을 방기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했다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그녀가 저질렀던 밀고의 죄는 영화가 크게 비판하지 않습니다(뒤에서 다루겠지만 팡루이신을 '악의 없는 소시민'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만, 역사를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 부분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웨이중팅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생존을 택한 것은, 이미 독서회 사람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 즉 자신의 생존과 동료의 생존 사이의 딜레마가 없기 때문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죠. 현실에 비해 훨씬 쉬운 선택이라는 뜻일 텐데, 저는 이쪽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두 번째. 'detention'은 학교에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교'는 학교로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영화의 핵심은 '반교' 쪽에 들어있을 거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두 사람이 꿈속의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일은 여러 번 반복되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죠(그렇다면 왜 둘의 깨달음은 이번 꿈에서 달성되는가, 에 대해 영화가 딱히 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이 일은, 그러니까 친구들이 군인 괴물에게 붙잡혀 죽고 두 사람이 기억을 되찾은 후 갈등하는 일은 왜 반복되는 걸까요.


이 반복이 끝나는 지점은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순간일 겁니다. 두 사람의 꿈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은 이 비극적인 시대와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뜻이고, 이 시대를 끝낼 수 있는 것은 살아남은 자가 증언하는 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증언에는, 조력자의 증언 또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영화에서 이 조력자는 챕터2의 제목인 '밀고자'로 지칭되지만, 실제로 조력의 형태는 훨씬 다양하겠죠). 팡루이신은 강당에서 전교생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목숨을 끊었다고 말하지만, 영화는 그녀가 방과 후 학교 바깥에서, 그러니까 이 끔찍한 시대가 끝난 후 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곳에서 고백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이 못다 한 일을 웨이중팅을 살림으로써 보충합니다.

분량으로 따지면 제목이 붙어있지 않은 프롤로그보다도 짧은 엔딩이 하나의 챕터로서 온전히 자리하고 '살아남은 자'라는 제목을 갖는 것은, 이 영화로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세 번째. 망각의 모티브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장치가 바로 얼굴 없는 팡루이신의 귀신입니다. 얼굴이 없다는 것은 역사에서 주체가 아닌 익명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죠. 후반부에 팡루이신이 군인 괴물에게 붙잡혔을 때(이때 군인 괴물은 팡루이신을 다른 학생들과 달리 곧바로 죽이지 않고 붙잡기만 하는데, 이는 이전까지 '영웅'이었던 그녀가 웨이중팅을 구하려 하면서 당을 배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거울로 된 괴물의 얼굴에 비친 팡루이신의 얼굴은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군인 괴물에게 복종하면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지워져 버리겠지만, 그녀는 웨이중팅을 구하기로 함으로써 얼굴을 되찾습니다.


팡루이신은 명백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가해자는 아닙니다. 그녀의 위치도 동기도 평범하게 세팅했다는 점이 <반교: 디텐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실제로 참담한 역사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었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반드시 체제와 사람 사이에서만 끔찍했던 것이 아니겠지요.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더 끔찍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웨이중팅 또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팡루이신에게 책을 건넴으로써 독서회가 발각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웨이중팅은 팡루이신의 속마음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에 대해 우리는 면죄부를 줄 수도 있고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교: 디텐션>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하는 영화인 셈입니다. 웨이중팅에게 면죄부를 준다면, 평범하게 죄를 짓고 평범하게 고통받은 사람들 사이의 오랜 앙금을 어떻게 풀 것인가.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면, 시대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속죄할 수 있는가.


물론 영화는, 앞서 이야기했듯 '잊어서는 안 된다' 속에 포함된 그 수많은 일들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답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겠죠. 저 질문 뒤에 각자 답을 이어 붙일 수 있을 겁니다. 저 또한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지만, 여기는 그 생각을 밝히기에 적합한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글이 길어졌습니다. 할 말을 충분히 다 하지 못했는데도 그러네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도록 하는 영화를 만나는 순간은 항상 기분이 좋습니다. 비록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도록 만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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