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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설 Aug 22. 2020

<바바둑>, 모성 신화의 안에는-②

1부에 이어집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앞서 샘이 환경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샘이 아멜리아를 들쑤시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샘의 역할 역시 이중적이에요. 샘의 어떤 행동들은 행동장애와 관련되지만, 어떤 행동들은 인정해야 할 것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해방시키는 데 일조합니다(물론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어느 쪽도 아멜리아에겐 반갑지 않겠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행동이, 지하실을 열어젖히는 것과 죽은 오스카의 이야기를 자꾸 꺼내는 것입니다.

아멜리아는 죽은 오스카의 흔적들을 7년 동안 지하실에 방치한다

지하실은 <바바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입니다. 오스카와 관련된 물건들은 아멜리아가 정리해둔 그대로 지하실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벅시가 지하실에서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것은 오스카에 대한 아멜리아의 기억일 겁니다.

또한 바바둑의 동선도 지하실과 연관되죠. 아멜리아는 「미스터 바바둑」을 2층 방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인 옷장 위에 올려둡니다. 이 책은 점차 내려오다가, 마침내 지하실에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통제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바바둑>의 결말은 성숙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멜리아가 7년 간 그랬듯 기억을 방치하는 형태는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하실을 샘이 마구 헤집습니다. 심지어 샘은 아멜리아가 인지하기 전부터 지하실을 놀이터 삼아왔습니다. 왜 이 사실을 아멜리아보다 관객에게 먼저 알렸을까? 해방시키는 자로서의 샘의 역할을 미리 제시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지하실이 아멜리아의 뇌 혹은 마음이라면, 그녀는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기만 하고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샘이 지하실에서 노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녀가 지하실에 내려가 보는 일은 없습니다).

오스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그 일과 등치되는) 샘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샘은 아멜리아에 의해 방치된 기억들이 기어코 어질러지고, 정리되도록 만듭니다. 오스카의 기억에 매몰되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명백히 존재하는 샘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면, 아멜리아가 눈앞의 샘 자신마저 회피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므로.


샘이 자기가 태어난 날 아빠가 죽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영화의 초반부, 중반부, 후반부에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대사에 아멜리아는 매번 샘이 '오스카처럼'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샘은 말로나 행위로나 자꾸만 오스카를 연상시킵니다. 오스카의 형태를 띤 악령을 지하실에 정리해둔 아멜리아는 (이전과는 다르게) 제때 샘의 생일을 챙기는 것으로 모든 인정 과정을 마무리합니다.

<바바둑>은 샘을 아주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바바둑>이 훌륭한 이유 중 하나는 샘이라는 인물을 기능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맘&대드>와 <바바둑>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영화는 샘의 역할보다 입체적인 성격 자체를 더 도드라져 보이게 만듭니다. 따라서 아멜리아의 기억을 헤집는 것이 어디까지 의도적이었는가 묻는 것은 무의미하며(사실 샘이 의도하고 한 일들은 아니겠죠), 오스카를 환기시키는 것을 생존 욕구 혹은 인정 욕구로 간편하게 치환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샘이 엄마를 사랑한다고,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유치한 애정 투쟁이나 허풍이 아닌 진심임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바바둑>은 샘을 중요하고도 신중하게 다루면서, 한편으로 어떤 부분들은 모호하게 처리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샘이 분명히 바바둑을 보고 있음에도 영화는 그가 보는 바바둑을 단 한 번도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바둑에 대해 더 절박하게 느끼는 것 역시 샘입니다. 오프닝부터 악몽을 꿨다고 말하며 등장하는 샘은, 꾸준히 바바둑에 사로잡힌 채 남을 위협하거나 발작을 일으킵니다. 샘은 바바둑이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즉, 외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공포영화로서 더 많은 효과를 유도하기엔 샘의 시점을 채택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바둑>은 그토록 많은 순간 샘이 보고, 겁을 내는 바바둑을 통째로 괄호 쳐버립니다. 만약 샘이 공포를 겪는 주체가 된다면 영화에서 아멜리아는 부분적 혹은 전적으로 대상화되어버립니다.

「미스터 바바둑」에 묘사된 바바둑과 바바둑의 형상을 닮은 오스카의 옷

샘이 본 바바둑은 아멜리아가 (그리고 관객이) 본 바바둑과 같았을까요? 즉, 지하실이 어질러졌을 때 아멜리아가 본, 벽에 걸린 오스카의 모자와 외투, 그리고 구두를 걸친 악령의 모습이었을까요? 이것은 「미스터 바바둑」에서 제시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동화책에는 그 모습만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부분들은 형체가 모호한 검은색의 무언가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바바둑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멜리아가 소중하게 여기던, 오스카와 둘이 찍은 사진(샘이 부재하는 모습을 아멜리아가 아낀다는 사실 또한 중요합니다). 이후 아멜리아는 샘이 그 사진에서 오스카의 얼굴을 지우고, 자신의 얼굴은 악마로 묘사한 것을 보고 격분합니다. 이때 샘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샘에게 아빠는 없는 존재입니다(그런데 엄마는 기어이 그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악령입니다. 결국 바바둑이 향하는 방향은 샘을 죽이는 것입니다.

샘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존재에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악령이 아멜리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든, 시간이 흐르면서 아멜리아에게 씌었든 말이죠. 샘이 엄마를 지키겠다고 한 말은, 전과 달라지는 그녀가 무엇엔가 당하고 있었음을 파악하고 한 말이었을 겁니다. 「미스터 바바둑」에서 아이 다음에는 엄마가 죽습니다. 또 첫 장면에서 동화책은 '늑대가 죽었다'며 끝나지만, 후반부 만화영화에 의하면 늑대는 양의 탈을 쓰고 있었을 뿐 죽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바바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샘이 놓친 게 있다면, 그 외부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아멜리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샘은 계속해서 그를 '들이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 바바둑은 집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존재입니다. 악령에 완전히 잠식당한 아멜리아가 온 집 안의 문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장면은 오히려 바바둑을 내보낼 구석을 막아버리는 일처럼 보입니다(반대로 이 문제는 집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는 샘이 자신이 살인충동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바바둑>은 특수한 상황에 대한 영화, 일회적 사건에 그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아멜리아는 당연히 모든 싱글맘, 혹은 그를 넘어 모든 엄마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캐릭터입니다. 영화에는 그 시선의 확장을 담은 장면도 있습니다.

아멜리아의 곤경은 다른 엄마의 곤경과 고스란히 겹친다

아멜리아와 샘이 간 식당에서, 혼자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치르며 힘겨워하고 있는 엄마가 묘사되는 장면을 여는 쇼트는 두 무리를 정확하게 대칭시키는 와이드 앵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자의 대화는 각 인물들을 정면에서 담는 미디엄 쇼트로 찍히고 쇼트-역쇼트 관계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멜리아는 프레임 안에 혼자인 반면 샘을 잡은 프레임에는 뒤에서 신나게 떠드는 아이들이 함께 잡혀 있습니다. 즉, 샘과 아이들이 겹쳐지는 셈인데, 그렇다면 (첫 쇼트에서 양쪽이 쌍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아멜리아와 다른 엄마 역시 겹칠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그 힘겨움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합니다. 이는 심지어 엄마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기까지 하는 동생 클레어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는 아이에게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거나 경멸스러운 일인 양 굴고(이때 그는 '보통의 엄마들' 운운합니다), 아멜리아가 사고를 낸 차의 주인도 '아이를 태우고' 역주행을 하냐며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시선과 말들 속에서 아멜리아는 오로지 '엄마'로서 규정됩니다. 그녀가 오스카를 놓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그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아멜리아'로서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오스카는 (출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아멜리아를 '아이 엄마'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을 테니까요. 아멜리아를 엄마 외의 존재로 생각할 수 없는 샘에게 상냥했던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는 사실은 외부적 악령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바둑>은 트라우마도, 애증의 관계도 없는 척 덮어놓는 것이 해결책일 수는 없다는 성숙한 시선을 견지합니다. 바바둑이 지하실에서 기거하는 독특한 결말은 그렇기에 신뢰가 갑니다(물론 장르적으로 힘이 빠진다는 것은 항상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한 사람의 자기 인정만을 답으로 제시함으로써 모든 곤경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여기엔 대화와 이해,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이 있습니다.


로치 할머니가 샘을 돌봐주고, 아동복지사들이 찾아와 샘을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은 구원의 실마리입니다. 아멜리아는 "엄마는 아파, 샘. 도움이 필요해."라고 말합니다. 이때 '도움'은 샘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사라진 오스카를 대신하여 기댈 수 있는 사람과(로치 할머니는 광기에 휩싸인 아멜리아에게 그녀와 샘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하죠) 아이에 대한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필요합니다. 아멜리아를 모든 여성으로 확장하는 것은 사회적 차원으로 논의를 넓히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오나 도나스는 "엄마로서의 삶이 끝없는 이야기라는 것으로 다시 한번 되돌아가 보면 거기에는 아빠의 존재나 부재는 거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타인의 [육아] 지원 여부가 후회를 보상해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 엄마들은 모두 남편 없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겐 집에 돌아갔을 때 반겨줄 남편이 있(을 테)고, 몇 행복해 보이는 엄마들 중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행복이 가능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영화적으로 남편의 자리는 예외 없이 비어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하자면, 엄마로서 느끼는 이 불온한 감정들은 실존적입니다. <바바둑>은 행복하게 끝나지만 모든 역경이 끝났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에게는 아멜리아와 샘처럼 피하고 싶은 문제가 남습니다. 그 문제는, 누군가는 겪지 않으려고 피하고, 누군가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피하는 문제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바바둑>을 보고 나서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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