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군수 사업가는 어떻게 새 사람이 되었나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판타스틱 Mr. 폭스> 이전의 작품들을 하나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무척 이상하긴 하지만 저는 최근의 웨스 앤더슨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웨스 앤더슨의 2010년대 작품들보다 2020년대 작품들을 조금 더 좋아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최근작들은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다소 미묘한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요즘의 영화들에서 다뤄지는 따뜻하면서도 씁쓸한 정서나 감정이 저에게는 무척 잘 맞네요. 가장 좋아하는 웨스 앤더슨의 작품이 11년 만에 <문라이즈 킹덤>에서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갱신되었을 때 이제 저도 순수하고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보다는 삶의 불가해함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죠.
이번 <페니키안 스킴>도 저는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직선적인 모험 이야기로 돌아와 하나의 인물을 깊숙이 파고들고 두 인물의 관계를 진진하게 묘사하는 것이 좋았네요. 그리고 소재와 전개, 그 저류에 흐르는 인물들의 관계까지 이런 로드무비는 세상에 단 한 편밖에 없다고도 생각했고요. 다만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관련해서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세부 사항을 정신없이 휘몰아치듯 묘사하는 연출 스타일에서 불친절함을 느끼는 관객이 많겠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동업자들과의 설전을 폭발적인 컷과 사운드 오버랩으로 표현한 장면들을 보면 이 정신없음 자체가 연출의 의도일 거라 짐작되고 또 사실 세부 사항을 소화하지 못해도 어떤 상황인지 따라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지만,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 페이스 조절이 조금 더 섬세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는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두 번 봤는데 처음 볼 때는 이야기를 좇아가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두 번째로 볼 때는 너무 장면 간의 속도감이 '강-강-강!'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비유하자면 '조증'의 영화라고 일컬을 수 있을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은 아프고 어두운 감정을 다룰 때 아래쪽에 일종의 안전망이 쳐져 있어서 여타 영화들만큼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페니키안 스킴>도 예외는 아닌 듯하군요.
이 영화의 제목인 '페니키안 스킴'은 주인공 자자 코다가 30년 간 공을 들인 페니키아 해상 사업 프로젝트를 의미합니다. 자막에서는 '계획'이나 '프로젝트'로 번역되었지만 실제로 영화 중간중간 인물들은 'schem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요. 'scheme'은 사전적으로 'plan'과 구별되는 단어인데, 그 차이는 바로 부정직하거나 남을 속이는 책략의 뉘앙스가 이 단어 안에 있다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자자 코다의 원대한 계획이 어떻게 거짓말과 엮이는지를 살펴보면 <페니키안 스킴>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는 자자 코다가 암살 위기에 처해 여섯 번째 비행기 추락을 겪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옥수수밭에 쓰러져 있는 동안 그는 잠시 천국에 다녀오는데, 이때 F. 머레이 에이브러햄이 연기한 선지자는 "그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죠. 이 말은 관객에게 주인공을 소개하는 방식인 동시에 리즐이 가진 의문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자 코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질문하게끔 만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욕실에서 간호사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긴 오프닝 크레딧의 끝에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봅니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 전 짤막하게 보았지만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하늘나라를 보려고 시도하는 셈이겠죠.
오프닝의 라디오 뉴스나 비밀요원 엑스칼리버의 브리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자 코다가 아주 부도덕한 사업가라는 사실입니다. 그 스스로도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질을 부모와 가정환경 탓으로 돌리고, 거짓으로 꾸며낸 자신의 법적 정체성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던 와중 사업에 필수적인 자재인 금속 핀의 가격이 급등하면서 그는 크나큰 손해를 보게 되고, 그 '갭'을 메우기 위해 그와 동업자들이 서로 얼마간의 돈을 내야만 합니다. 이 로드무비는 표면적으로 이 조율 또는 줄다리기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관객은 자자 코다가 얼마나 약은 사람인지 시작부터 정확한 언어로 소개받았고, 이 여정을 통해 직접 보게 됩니다. 그는 매번 일상적인 미팅이라며 방문 목적을 속인 채 동업자들을 만나러 다니고 상대가 승인하기로 했던 서류를 바꿔치며 허술한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갭과 관련해 동업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한해서 자자 코다는 단 한 번도 상대를 속이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점이겠죠. 그가 얼마간의 갭을 양보받을 수 있었던 것은 파루크 왕자처럼 기브 앤 테이크가 되거나, 판돈을 걸고 들어간 농구 내기에서 이기거나, 총을 대신 맞아주거나, 수류탄으로 상대를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육촌 힐다가 갭을 메우는 일이 자기 사업인 유토피아 전초 기지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돈을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사업가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자 코다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직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기만적인 책략은 전재산과 30년 간의 계획이 걸린 문제에서 그를 구해주지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자자 코다의 최후의 선택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투척하는 데 더해 빚까지 져가며 갭을 메우기로 합니다. 그가 꿈꿔왔던 사막의 개발 계획은 그와 리즐 없이 계속됩니다. 만약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했다면 아예 사업 자체를 포기해도 됐겠죠. 그럼 사업은 수포로 돌아가고 동업자 모두가 피해를 입겠지만 그는 재산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우리가 이전 90분 동안 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이때 '타인'에는 많은 돈을 투자한 동업자들뿐만 아니라 해상 사업 프로젝트를 통해 발전된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사막 지역의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이 일생일대의 결단이 부분적으로 누바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자자 코다는 이복동생인 누바에게서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본 것 같다는 것이죠. 사업 측면에서 누바는 다른 동업자들처럼 단순히 갭을 메우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해상 사업 프로젝트 자체를 거부하면서 이미 진행 중인 계획을 무위로 돌리고 동업하기로 했던 '모두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계속해서 총과 폭탄, 탄약을 팔고 싶기 때문이죠. 개발이 예정된 지역은 현재 전쟁 중인데 그곳이 자자 코다의 사업으로 평화를 찾는다면 누바는 더 이상 무기를 팔 수 없습니다. 누바가 보여주는 제로섬 게임은 가장 폭력적이고 극단적입니다.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자자 코다는 자신의 결심을 근엄하게 공표합니다. 그의 선택의 결과가 누바가 초래할 결과와 배치된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선택의 원인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가 변화한 이유를 누바와의 대화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겠죠. 자자 코다는 딸 리즐과 함께 동업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경험을 합니다. 그는 암살 위협과 총격, 출혈, 늪에 빠지는 일 등 숱한 위협을 겪으며 사후세계 또는 천국을 계속 넘나들고 종교적으로 신실한 딸을 옆에서 직접 살펴봅니다(이전까지 '염탐'을 통해 간접적으로 딸에 대해 알아왔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자자 코다는 정글에 떨어진 후 "내가 몇 번이나 더 죽을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처음에는 자신의 사업을 잇고 적에게 복수해줄 상속자 겸 후계자를 찾는 것이었다면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리즐을 더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여기서 생겨납니다.
본격적으로 리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영화에 담긴 모든 일들이 자자 코다가 자초한 결과라는 점일 겁니다. 만약 그가 악덕 사업으로 경쟁국가들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면, 또 사보타주 때문에 생긴 갭을 메우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대신 동업자들을 설득했다면 어쩌면 자신의 제국 전체를 무너뜨려야 할 일은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의 구조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벌어진 일을 스스로 바로잡는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리즐이 이 여정에 동참하는 데에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두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저택으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엄마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자자 코다는 누바에게 혐의를 돌리면서 그에게 복수해주는 것을 대가로 리즐의 서명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의혹에서 발현한 또 하나의 궁극적인 의문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맥주를 마시면서 비욘은 리즐에게 아버지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거라고 말하죠. 자자 코다가 '우리 없이' 프로젝트가 계속될 거라고 말했을 때 리즐은 "난 돈 필요 없어요."라고 대꾸하는데, 사실상 그의 결정을 지지하는 이 대사는 그녀가 이 여정에서 자자 코다로부터 무엇을 원했는지 엿보게 만듭니다(자자 코다 또한 돈을 공물로 바치자 아내로부터 싸늘하게 "걘 당신 딸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을 통해 가족들이 자신에게 바랐던 것은 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겁니다).
리즐은 주요 인물 세 사람 중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유일한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자자 코다와 비욘은 그녀에게 미묘한 거짓말을 함으로써 상처를 줍니다(영화에서 가장 유약한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도 사실상 가장 굳세게 느껴진다는 점이 이 캐릭터의 매력입니다). 우선 자자 코다는 누바가 아내를 살해하게 만드는 데 자신의 거짓 편지가 영향을 줬을 거라는 점을 뒤늦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비욘이 했던 "나 같은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라는 말은 그의 정체가 드러난 후 리즐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지점을 정반대 방향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즐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끔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자자 코다가 용서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진실을 고백한 것은 직전에 하늘나라에서 어린 리즐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리즐에게 매혹된 비욘은 자신이 했던 말이 첩보 활동의 일환이었느냐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저에게는 자자 코다가 자신의 종교적 깨달음을 원장수녀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직후가 무척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리즐은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이며 거짓말은 소용없다고 말하죠. 즉, 그녀는 직전에 자자 코다가 교황에게 갭을 메워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은 척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식사 장면에서 교황이 갭을 메워주길 거부했다는 대사가 나오는 걸 보면 리즐이 옳았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리즐은 정직한 사람이고 남들을 진실되게 만드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짓말을 간파해내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어와 모스 부호를 알아들음으로써 자자 코다가 마르세유 밥에게 거짓말을 하고 비욘이 본부와 교신하는 것을 꿰뚫었습니다. <페니키안 스킴>에서 거짓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의 사도와도 같은 리즐은 그 사실을 자자 코다에게 따끔하게 일러주죠.
자자 코다도 이 사실을 체감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자자 코다는 남을 한 번도 속이지 못했지만 정작 본인은 계속 남들에게 속아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했던 정보원 비욘에게 속았고, 누바에게서 자신이 만들어냈던 거짓말을 역으로 돌려받습니다. 누바는 리즐의 아버지가 자자 코다의 당시 비서였던 것 같다고 말하는데, 이게 사실인지 아니면 자자 코다가 꾸며낸 편지로부터 영감을 받은 거짓말인지 관객도 두 주인공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비서는 이미 죽고 없으니, 자자 코다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스스로 진실을 알 수 없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거죠.
거짓말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고, 아무튼 리즐도 감추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밝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도가 한 번도 신에게서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리즐의 종교적 여정에 집중해 재구성하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고 중요한 일일 겁니다. 사람을 죽일 무기를 파는 데에서 사람에게 먹일 음식을 파는 자자 코다의 영적 변화와 반대로 리즐의 변화는 그녀가 환속하게 된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사실상 이 순간이 자자 코다와 마침내 화해하는 여정의 종결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입니다. 그 근거는 리즐의 비밀이 드러나는 이 하늘나라 장면이 누바와의 대화 및 엘리베이터 장면 다음에 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리즐에게 응답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응답했거든요.
자자 코다의 변화를 가장 재치 있으면서도 뭉클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거짓말 탐지기입니다. 처음에는 남이 진실한지 증명하기 위해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했던 그는 끝에 이르러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비욘과 달리 거짓말 탐지기를 속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기계의 덕을 볼 수 있었죠. 그는 자신이 리즐의 엄마는 물론 다른 아내들도 죽이지 않았다고 맹세합니다. 거짓말쟁이 자자 코다는 '딸'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외적으로 확인시켜줍니다.
그가 리즐의 말에 응답한,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증명한 또 하나의 경우가 최후의 선택입니다. 그는 갭을 메우는 것뿐만 아니라 노예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고 자기가 곡물을 통제함으로써 초래한 기근을 끝내겠다고 선언합니다. 리즐은 자자 코다의 부도덕한 사업 계획을 브리핑받은 후 "노예도, 기근도, 기숙사도 안 돼요. 앞으로 지켜볼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자자 코다는 이 요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들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했죠. 에필로그에서 아홉 명의 아들들은 이제 누나와 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종교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옆길로 살짝 비껴 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자자 코다가 종교를 통해 진실함을 얻는 이야기도, 리즐이 종교에서 이탈하게 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종교는 경유지이며 아버지와 딸이 연결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말장난을 한 번 쳐보고 싶은데, 두 사람이 서로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 연결될 수 있었던 거라고 하면 저에게는 이 말이 꽤나 정확한 표현으로 느껴지는군요. 혹은 굳이 종교에 줄을 대어 말하자면, 두 사람이 긴 시간의 의문과 오해를 딛고 가족이 된 것 자체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요.
이제 웨스 앤더슨이 이런 식의 시각 스타일을 선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파격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이만큼 유일무이한 미장센이라면 질리기는커녕 이 맛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영화들을 계속해서 기다리게 될 것 같고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다양한 화면비를 활용한 프레이밍이든 작품마다 고유한 색감이든 이 감독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스펙터클이 쉽게 질릴 정도로 단일하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프렌치 디스패치>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그 매력을 상대적으로 덜 보여줬던 만큼 아기자기한 모험영화를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움도 큽니다. 너무 맹추 같아서 오히려 귀여운 데다 심지어 은근히 타격감까지 살아 있는 누바와의 액션씬이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웨스 앤더슨의 팬들이 그의 영화에서 정확히 어떤 것을 사랑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저에게 <페니키안 스킴>은 저에게는 통했던 그의 매력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웨스 앤더슨을 열광적으로 좋아해오지는 않았는데 최근 들어 점점 더 강하게 매혹되는 느낌입니다. 제가 특히 좋아하는 점은 웨스 앤더슨이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매번 다른 감정을 느끼며 극장에서 나가게끔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제가 본 영화들에 한해서, 즉 지난 10여 년 간의 작품들에만 해당되는 얘기지만요. IMDB의 여담 섹션에는 영화에서 다뤄진 부녀 관계가 감독이 딸과의 실제 관계에서 영감 받은 부분이라고 쓰여 있던데, 웨스 앤더슨은 벌써 3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온 거장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젊은 감독인 만큼 앞으로 얼마나 더 신선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지가 몹시 기대됩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저에게는 아직 그의 2-30대 시절 작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은 볼 기회가 있으면서도 손이 잘 가지 않았었는데, 의무감이 호기심으로 바뀐 상태로 그의 영화들을 챙겨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