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검사>, 구조와 이미지로 만들어낸 불의의 감옥

부패한 권력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개인에 대하여

by 헤이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검사>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입니다. 영화제의 프로그램 노트나 개봉 포스터의 문구를 통해 갖게 된 인상은, 마치 정치적인 암흑기에 신념이 다른 '두 검사'가 비극을 사이에 두고 충돌하는 휴먼 드라마,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영화는 훨씬 건조하고 차가울 뿐만 아니라 (영화는 전혀 코믹한 톤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웃기기까지 한 부조리극이더군요. 주인공 코르녜프가 검찰총장을 만나기 위해 대기실에서 또 한참을 기다리는 후반부의 장면을 보고 있으면 카프카의 소설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두 검사>가 <센티멘탈 밸류>와 함께 올해 본 개봉작들 중 가장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꽉 짜인 각본을 가진 지적이고 이성적인 영화인 듯 보이다가도 매 장면이 느릿느릿 흐르면서 부지불식간에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되는 전개는 뭔가에 홀린 듯 신비롭기도 합니다. 폭력적인 역사에 대해 우화로서 접근하기 때문에 감정의 파고가 크게 요동치는 작품은 아닌데 또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면 코르녜프에 대해 깊게 탄식하고 있고요. 주제, 시나리오 작법, 장르적 특성 등을 따로 떼어서 보면 유사한 작품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총체로서 <두 검사>에 대해 받은 인상은 다른 어떤 영화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고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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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구조는 두 가지 키워드로 축약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로드무비'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입니다. 코르녜프는 브랸스크 교도소에서 시작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뒤 브랸스크로 돌아옵니다. 이때 브랸스크/교도소에서의 일들과 모스크바/검찰청에서의 일들은 서로 반복되게끔 짜여 있고요. 이러한 구조를 가진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 똑같이 반복되는 요소들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이 영화의 핵심일 겁니다. 영화가 챕터를 따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편의상 명칭을 나눠보겠습니다. 노인이 검사 접견을 요청하는 쪽지를 발견하는 오프닝을 프롤로그, 브랸스크 교도소부터 모스크바행 열차 안까지의 시퀀스를 1부,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결말까지를 2부라고 해보죠.


코르녜프는 2부에서도 1부와 똑같이 계단을 타고 오르고, 교도소 복도와 유사하게 생긴 복도에도 들르며,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검찰총장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1부와 대비되는 상등칸에 타고 브랸스크로 돌아옵니다. 이 짧은 여정으로 인해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로 임명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드러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비범한 지점입니다.


제목이 '두 검사'인 이 영화에는 사실 '세 검사'가 등장합니다. 수감자 스테프냐크가 코르녜프의 재학 시절 그의 대학교에 와서 연설을 했던 전직 검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의 제목은 이 두 인물을 지칭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2부에 등장하는 검찰총장 비신스키 또한 검사입니다. 그렇다면 '두 검사'라는 제목은 세 가지의 조합을 모두 고려해보게끔 만듭니다. 코르녜프와 스테프냐크, 코르녜프와 비신스키, 그리고 코르녜프가 접견하는 대상들인 스테프냐크와 비신스키.


코르녜프의 이전 세대에 해당하는 스테프냐크는 NKVD가 득세한 현시대에 반체제 인사로 몰려 고문과 투옥을 당합니다(스테프냐크가 갇힌 5구역은 반혁명 혐의로 잡혀온 죄수만 수감되는 곳입니다). 감옥 안에서 스테프냐크가 이야기를 하고 코르녜프는 듣기만 하는 것과 달리 총장실에서 비신스키는 코르녜프의 말을 주로 들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떤 방식을 통해 현재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다는 사실 및 최후에 코르녜프가 당하는 일로 미루어보면 그는 NKVD의 편에 서서 권력을 나눠먹는 사람일 거라고 짐작 가능하죠(실존 인물인 비신스키는 물론 스탈린의 대숙청에 힘을 보탠 부패한 법조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1937년 스탈린 대숙청 시기', 독재자 아래에서 증식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해서 개인을 파괴하는지 그려낸 부조리극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로드무비로서 이 영화는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때 코르녜프의 처지는 시작과 아예 달라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전 세대와 젊은 세대는 대비됩니다. 스테프냐크는 충정했던 공산당 원로 당원들이 이제 입세에 미친 것들로 대체되었다고 한탄하는데, 이는 즉각적으로 교도소장이 말했던 "이제 소련 조직 전체에 젊은 피가 돌고 있죠."라는 대사를 연상시키는군요. 만약 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련의 관료 모두가 부패했다고 받아들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프롤로그를 돌이켜보면 새로 교도소에 들어온 작업반 8명이 모두 노인들이라는 점이 다시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젊은 세대'란 스탈린 숙청기에 체제에 동조하면서 권력을 얻거나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실제로 젊은 코르녜프는 대학에서 스테프냐크의 연설을 듣고 법적 진리를 추구할 것을 신념으로 새기면서 '이전 세대'에 속하게 되는 셈이고요. 그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피의자를 심문해야 하고, 고문을 당하지 않거나 검사를 접견할 수 있는 등 수감자의 권익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우회하는 스탈린 체제의 작동 방식과 배치됩니다.


교도소장이 코르녜프에게 했던 "비누로 손을 씻어도 어떤 병은 예방 못합니다."라는 말은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듯 보입니다. 그는 스테프냐크의 연설에 감화되었고, 또한 스탈린이나 정치국의 고위 관료들을 만나보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체제가 병이라고 규정한 사고방식을 따르는 개인은 체제의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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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한테는 코르녜프가 파괴되는 더 큰 이유가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적법한 권위보다 자신의 상관이 가진 힘을 더 신뢰하던 교도관들의 행위를 코르녜프 또한 반복하고 있다는 데에 존재합니다. 5사동의 교도관들은 코르녜프의 요청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상관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면 그제야 움직입니다. 첫 번째는 스테프냐크의 말에 따라 침대를 내려달라고 요청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접견을 마치고 5사동에서 나가려 할 때죠. 이곳에서 코르녜프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교도관들에 의해 포위된 듯 묘사되는데, 특히 두 번째 상황은 교도관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가 물리적으로 위해를 당할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긴장되기까지 합니다. 검사라는 직함은 그에게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권위를 부여해주지는 않습니다.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마 NKVD와의 결탁이나 협력일 테죠. 교도관들은 코르녜프가 나가고 나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음료를 마시는데, 이를 보면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이들의 행동은 마피아처럼 충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기계적인 복종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코르녜프가 2부에서 한 행동 또한 이와 메커니즘이 같습니다. 교도관들의 행동은 위압적이고 비겁해 보이는 반면 코르녜프의 행동은 정의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에요. 혹은 교도관들과 달리 코르녜프는 잘못된 쪽에 줄을 섰다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만약 교도관들과 코르녜프를 유사하게 볼 수 있다면, 그건 상관의 힘이 명목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도관들은 명령을 위해 무력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5사동의 관리인에게는 검사를 건드릴 만한 힘이 없고, 검찰총장은 NKVD와 결탁하고 있어서든 그의 말대로 NKVD의 자율권에 가로막혀 있어서든 코르녜프의 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코르녜프의 몰락은 두 가지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체제 안에서 무력한 개인으로서. 또 하나는, 바로 그가 잘못된 해결책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언뜻 주인공을 꼭두각시 희생양처럼 다루는 부조리극처럼 보이지만, 인물에게 정의감과 의지 못지않게 실책 또한 있다는 점에서 캐릭터를 잘 살려낸 서사로도 느껴집니다. 스테프냐크와 비신스키 모두 코르녜프의 어리숙함을 지적하죠. 스테프냐크는 그와 같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가 검사로 임명된 걸 보고 NKVD가 검찰청에까지 손을 뻗쳤으리라 짐작하고, 비신스키는 NKVD 내사에도 서면 증거가 필요할 줄 몰랐다고 코르녜프가 고백하자 "저런. 법률가로서 그건 경솔했군."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코르녜프의 이후 행적을 보면 그는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 셈이고, 또한 경솔하게 행동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권력을 쥔 자를 찾아가는 것 외에 민중들이 무슨 방법을 통해 정의를 이룰 수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죠. 다만 영화가 끝난 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권력은 민중의 편이 아니라는 간단한 사실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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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말은 열차에서 레닌을 찾아갔던 늙은 군인의 이야기에서 이미 예비되어 있었습니다(크레딧에는 '나무 의족을 한 남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1916년 코벨 전투에서 팔다리를 잃은 이 노인은 스몰니가 정의가 살아 있는 곳이니 찾아가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레닌을 만나러 갑니다.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은 1부와 2부만이 아닙니다. 이 군인이 겪은 일조차 반복되죠. 그는 사람들이 가득 찬 대기실에 4시간 동안 앉아 있던 끝에 레닌이 등장해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찬 대기실'은 코르녜프가 검찰총장을 만나기 위해 앉아 있었던 방을 연상시키고 '4시간'은 교도소장을 만나기 위해 부소장실에 앉아 있었던 10시 5분부터 2시 55분까지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레닌은 그의 말을 들어주려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몇 번 더 찾아가도 다시는 레닌을 볼 수 없었죠. 그는 "결국 레닌은 죽었소. 이제 스탈린을 찾아가요. 그분이 그렇게 인정이 많답디다."라고 말하는데, 스테프냐크 또한 스탈린을 찾아가라는 잘못된 조언을 한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권력의 최정점이 잘못을 바로잡아줄 거라는 착각은 이 영화에서 수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인 듯합니다.


늙은 군인은 전쟁에서 몸 바쳐 싸운 것을, 스테프냐크는 백군과 싸우고 혁명에 투신했던 것을 레닌이나 스탈린이 자신의 사연을 들어줄 이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프롤로그의 첫 번째 편지도 '친애하는 스탈린 동무'라는 인사로 시작하면서 자신이 혁명 전부터 볼셰비키 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밝혔네요. 늙은 군인의 이야기는 이 일이 비단 스탈린 대숙청 시대만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일은 레닌 때부터 있어왔던 일이기 때문입니다(검찰청의 계단에는 레닌의 흉상이, 비신스키의 테이블에는 레닌의 전신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영화가 한 명의 배우에게 스테프냐크와 늙은 군인 역 두 개를 맡긴 이유를 여기서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은 코르녜프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가 '청탁'이라는 방법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꼭 지적해야겠죠. 검찰청에서 코르녜프는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동창을 만납니다. 코르녜프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요. 이 동창은 옆에 서 있던 므라조비치에 대해 "거물이야. 뭐 필요하면 저 사람 잡아."라고 귀띔합니다. 아마 권력을 쥔 자를 찾아가는 방식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게 아니었을 겁니다. 코르녜프와 스테프냐크, 그리고 늙은 군인은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요구할지를 오판했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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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조 못지않게 영화에서 단단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일관되고 집요하게 사용되는 이미지들입니다. 이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전적으로 열광하긴 힘들었던 이유는, 이 영화의 구조와 이야기가 어쨌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굳이 카프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코르녜프의 최후는 예측 가능하고('이게 마지막 쇼트일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마지막 쇼트이기도 했습니다), 1부와 2부가 반복 및 대비되는 구조를 사용한 영화도 여럿 떠오릅니다. <두 검사>를 정말 '영화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각본이 아니라 연출입니다. 관객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는 이미지의 반복이 사실 이 영화의 진짜 미학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거기에 매혹되었고요.


이 영화는 잠긴 문을 여는 교도관의 손 클로즈업으로 시작합니다. 카메라가 롱쇼트로 빠지면 철문이 열리고, 프레임 오른쪽에서 새 작업반이 줄을 지어 안으로 들어가죠. 자물쇠와 철문의 이미지는 1부에서 계속 반복되면서 브랸스크 교도소가 어떤 공간인지를 제대로 설정합니다. 이곳의 핵심은 사람들을 겹겹이 쌓인 철창 안쪽에 가둔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테프냐크가 수감된 5사동뿐만 아니라 부소장실도, 소장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테프냐크와 같은 반체제 인사들은 그렇게 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던전'에 가두어져 있는 반면 권력을 쥔 자들은 그만큼 다다르기 어려운 곳에 위치합니다. 자물쇠 또한 양가적인 인상을 자아내는데, 하나는 체제에 반대하는 자를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하기 위한 장치라면 다른 하나는 권력을 민중들에게서 떨어뜨려놓기 위한 장치입니다. 처음 코르녜프가 부소장을 만나러 갈 때, 철창을 앞에 걸고 그 너머에 선 교도관들을 촬영한 쇼트가 총 세 번 반복됩니다. 이는 이 체제에 복무하는 개인들에 대한 코멘트로도 느껴집니다. 말하자면 힘없는 개인인 코르녜프가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의 선택지랄까요.


코르녜프가 2부에서 방문하는 검찰청 또한 브랸스크 교도소를 연상시키게끔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은 계단의 이미지입니다. 교도소에서 코르녜프는 어딘가에 가기 위해 계단을 타고 계속 위로 오르는데, 이는 검찰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두 공간은 마치 미로처럼 느껴집니다. 1부와 2부 사이 계단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검찰청에서 코르녜프는 길을 잃은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총장실이 있는 맨 위층에 도달하기 전까지 어디로 갈지 몰라 사람들을 따라가는데,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줄을 섰다가 사람들 틈에 섞여 회전문 안으로 들어가고, 또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뒤따라 복도에 들어갔다가 어느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홀로 복도에 남습니다(이 복도는 교도소의 복도와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어느 방에서 나온 여자는 검찰총장에게 용무가 있다는 코르녜프의 말에 "용건이 있으면 어디 계신지는 알아야지."라고만 말하고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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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검찰청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코르녜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계단참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가 코르녜프를 보더니 출구가 어딘지 물어본 바 있죠. 이 짤막한 비트는 코르녜프의 비극이 (스테프냐크나 늙은 군인뿐만이 아닌)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계단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사건은 여자가 쏟은 서류를 코르녜프만이 주워주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가만히 멈춰 서서 여자가 서류를 다 줍기를 기다리고, 코르녜프는 주변을 의식하다가 결국 끝까지 여자를 돕지 않고 쭈뼛쭈뼛 일어섭니다. 여자는 코르녜프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에도, 도와주다 마는 것에도 아무런 관흥이 없는 듯 홀로 종이를 다 주운 뒤 그냥 내려가버리고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코르녜프의 (불타는 정의감과 대조되는) 소시민적 소심함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각자도생이 원칙인 이 세계의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전자가 사소하지 않은 것은 계속 이야기했듯이 코르녜프가 권력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안위마저 보장할 수 없는 나약한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검찰청의 출구를 찾는 남자의 에피소드는 후자와 연결 지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자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이나 총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 여자와 달리 코르녜프는 서류를 주워주고 출구를 알려줍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 정의를 위해 움직이지만 이는 보답받지도, 그를 구해주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정의감을 강단 있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쭈뼛거립니다. 반면 교도소에서 그의 옆에는 항상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들이 동행했기에 그가 길을 잃을 위험이 없었습니다. <두 검사>의 세계 속에는 두 가지 길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요. 하나는 자신의 정의감에 반하는 방향을 향해 흔들림 없이 따라갈 수 있는 길, 다른 하나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비틀거리며 가야만 하는 길. 하다 못해 평범하게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혼자 힘만으로 살아가는 곳에서, 코르녜프는 정의를 선택한 이상 길을 잃을 수밖에 없죠.


브랸스크로 돌아온 코르녜프는 기술자로 위장한 경찰들에게 차를 얻어 탈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일반적인 경우 그를 유인해야 하는 경찰들이 먼저 할 법한 제안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안내인 없이는 길을 잃는 자'로서 코르녜프가 저지른 결정적인 실책으로 보입니다. 혹은 이전까지 그가 저질러온 실책들의 화룡점정으로 보입니다. 그는 결국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그가 탄 차는 직진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음으로써 그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영화 내내 그가 저지른 실수가 또 한 번 반복된 것이라고 보아야 맞습니다. 다시 한번, 로드무비로서 이 영화는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데, 어쩌면 이때 코르녜프의 처지는 체제 안에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점에서 사실 시작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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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랸스크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만난 페탸는 코르녜프에게 "적과 싸워야 할 텐데 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죠?", "범죄는 아직인데 적은 존재하면요?"라고 묻습니다. 코르녜프가 법의 근본에 의거해 무죄 추정의 원칙을 답으로 제시하자 그는 "그럼 범죄가 일어나길 기다려요?"라고 재차 질문합니다. 세 사람은 브랸스크의 공장에서 벌어지는 사보타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지만 사실 페탸의 질문들은 체제를 공격하는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적을 미리 적발하고 처벌하는 방법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코르녜프는 행위가 벌어지기 전에는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바샤가 소비에트의 법을 '응징'이라고 규정하자 "우리는 응징이 아니라 수사를 합니다."라고 정정합니다. 그는 원칙을 믿는 순수한 사람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페탸가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도 사보타주를 저지른다면서 "믿기 힘들겠지만 본인이 자백하는걸요."라고 한 말이 얼마나 부조리한지에 먼저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스테프냐크가 이미 어떻게 거짓 자백이 강요되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한 바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한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예방이라는 방법론입니다. 스테프냐크가 지적했듯이("날 만나겠다고 고집부린 이상 놈들이 자네를 가만 둘 리 없어."), 그리고 교도소장이 상급자에게 보고하며 덧붙였듯이("이런 일은 대체로 늦기 전에 처리해야죠.") 코르녜프가 체포당하는 것은 그가 법과 원칙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행위 중에 처벌을 받을 만한 일은 없습니다. 죄수와의 접견을 요청한 것도, 검찰총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도 모두 적법하게 받아들여졌죠. 그러나 그는 교도소장에게 정의롭다는 사실을 들키면서 '예방'되어야 할 대상으로 찍히고(다시 한 번, 전염병이라는 은유는 스테프냐크의 사상뿐만 아니라 이 체제의 작동 원리에까지 적용됩니다), 검찰총장에게 NKVD의 비위를 고발하려는 계획을 노출하면서 실제로 '예방'됩니다. 영화가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교도소장이 상급자에게 전화를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코르녜프가 나간 뒤의 총장실에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1937년 소련은 페탸가 주장하는 예방적 방법론을 따르는 사회이며, 코르녜프는 바로 그 방법론 때문에 파괴되고 맙니다.


세르히 로즈니차의 전작들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극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활발하게 러시아를 비판해온 우크라이나 감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현재와 관계 맺고 있는 양상을 짚어볼 수도 있겠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면 좋겠네요.


코르녜프는 스테프냐크에게 "소비에트 법을 지키려면 지금도 위험하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대사를 기점으로 스테프냐크가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서 카메라가 두 사람의 바스트샷으로 한층 타이트해집니다. 이 대사 속의 '지금'이라는 단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5년째 침공하고 있는 현시점과 공명합니다. 글로 적혀 있는 법과 실제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고, 원칙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은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검사>를 러우전쟁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비약이겠으나 이 영화에서 그 요소를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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