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베이비걸, 부고니아, 제이 켈리, 프랑켄슈타인, 세계의 주인
12월이 되면 한 해의 개봉작들 중 극장에서 놓쳤던 것들을 뒤늦게라도 챙겨보기 위해 분주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가을즈음에는 연말로 부담을 미루지 않기 위해 상대적으로 열심히 극장에 가게 되고요. 특히 올해 10월과 11월에는 궁금한 신작들이 너무 많이 개봉하고 공개돼서 신작들만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네요. 11월에는 총 8편의 신작들을 보았습니다. 개별적인 글로 다루기에는 감상이 조금 짧은 작품들도 있고, 글을 여럿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해서 제가 흥미롭게 보았던 작품들에 대해서는 단평들을 통해 감상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아래의 작품들은 모두 관람순입니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두 편은 리뷰에서 제외하였습니다.
*해당 영화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비에 르그랑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후계자>는 이야기 자체가 불가해한 마력을 머금은 작품입니다. 이건 긍정적인 의미이기도 하고 부정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엘리아스가 아버지의 지하실에서 '비밀의 방'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말 그대로 심장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불길함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도요. 혹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인 도미니크의 딸이 실종된 사건을 두고 엘리아스와 도미니크가 정반대의 이유로 울면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장례식 장면의 감정적 파고도 강력합니다. 엘리아스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실수로 죽게 한 여성이 도미니크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도미니크는 그 사실을 추호도 모른 채 자기 죄악의 실체를 깨닫고 오열하는 엘리아스를 따스하게 안아줍니다. 이 영화의 감정적 정점은 이 지옥 같은 아이러니에서 옵니다. 그리고 관객이 두 캐릭터 모두에게 미칠 것 같은 측은함을 느끼는 것은 죄인인 엘리아스조차 철저하게 운명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영화의 신비로움과 의아함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후계자>에서 주인공의 시련은 전적으로 영화 바깥에서, 혹은 영화로부터 직접 주어집니다. 엘리아스는 아버지의 사인인 심장마비를 연상시키는 가슴의 통증을 최근 들어 자주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에게는 아버지의 집을 처분해야 할 책무가 맡겨집니다. 아버지가 납치한 도미니크의 딸 자니는 아버지가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죽어버렸기에 엘리아스의 손에 떠넘겨지고, 사소한 일들이 차곡차곡 겹치더니 자니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하는 참극으로까지 비화합니다(이 사건은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찍은 쇼트로 명확한 액센트가 찍혀 있습니다). 엘리아스는 가혹할 정도로 '무의지'한 캐릭터이고, 영화는 이 비극과 전락에 (거칠게 말하자면) 논리를 전혀 예비해두지 않았기에 초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저로서는 캐릭터를 꽁꽁 묶어놓은 채 천천히 익사시키는 듯한 이런 구조가, 신비로운 한편으로 드라마로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아리송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엘리아스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가 다시 지하실로 돌아오는 장면의 카메라 포지션입니다. 처음 엘리아스가 잠긴 지하실 문을 열고 와인장 너머 숨겨진 문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의 뒤에서, 그와 함께 공간을 탐색하듯 움직이던 카메라는 그가 다시 용기를 내 지하실로 내려올 때 미리 그 방 안에 위치하고 있다가 그가 프레임 인 하도록 만듭니다. 저한테는 인물보다 앞선 이 카메라의 위치가, 인물에게 예비된 비극들을 하나씩 던지는 영화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읽혔습니다. 조금 더 객관적인 증거를 찾아볼까요. 도미니크는 아버지의 서류들을 세절기에 집어넣고 있는, 즉 그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고 있는 엘리아스를 안아주면서 (위로의 의미로) "자넨 그의 아들이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두 사람을 투샷으로 잡다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라는 대사에 맞춰 엘리아스의 단독샷으로 컷 합니다. 영화는 대사와 편집을 동원해 인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악랄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 하면 라스 폰 트리에와 요르고스 란티모스 두 명이 떠오르죠. 특히 저에게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킬링 디어>가 비교군으로 유효해 보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 모두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후계자>는 이 둘과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킬링 디어>와는 아예 다른 것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자기가 만든 인물들에 대해 일말의 연민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랍스터>나 <킬링 디어>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은 주인공들에 대해 처연한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이는 인물들이 처한 참혹한 상황 때문이지 감독이 그 감정을 부채질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후계자>에는 관객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장면이 있습니다. <킬링 디어>의 탄식이 영화가 부조리를 탐구하고 남은 결과물이라면, <후계자>는 탄식을 위해 부조리를 이용한 듯이 느껴지네요.
더 미묘하게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 여성수난극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브레이킹 더 웨이브>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주인공 베스를 시련 너머 시련으로 계속 몰아간 끝에, 그녀가 세상에게 속았다고 좌절하게끔 그녀를 속인 뒤 타이밍이 어긋나버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엔딩에는 베스를 숭고하게 드높이는 감상적인 터치까지 더해져 있습니다. 저한테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가치는 뻔뻔하고 부도덕할 정도로 캐릭터를 손 안에서 주무르는 창작자에 대한 탐구에, 그러니까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에 더 많이 숨겨져 있는 듯 보입니다. <후계자>에 이런 메타영화적인 속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네요. 물론 이야기로만 봐도 <킬링 디어>는 독창적이고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여성수난극이라는 피상적 얼개를 치워놓고 보면) 감정적으로 진합니다. <후계자>의 이야기는 요란하고 스타일리시한 오프닝이 이후의 전개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다는 인상을 개인적으로는 받았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보다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방식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이 갔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더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제외하고 본다면, <후계자>는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스릴러입니다. 악업의 대물림을 과연 '계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저는 좀 의아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자신의 가족, 핏줄, 출신, 그 뭐가 됐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의 비극이라는 테마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영화는 엘리아스가 그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캐릭터를 오프닝에 심어 두었습니다. 바로 디자이너인 얀올리비에입니다. 오프닝의 무대는 엘리아스의 첫 번째 쇼였고, 그의 첫 컬렉션을 두고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를 얀올리비에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한 디자이너의 죽음, 새 디자이너의 탄생'이라는 글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프란시스라는 본명을 버리고 고향인 퀘벡을 떠나 유럽까지 날아간 엘리아스는 끈질기게 역류한 핏줄에 발목이 잡혀 자신의 친아버지를 계승하고 맙니다. 영화는 그가 주인공인 잡지 커버의 시안을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이 커버의 타이틀은 '후계자 바르네스'입니다. 그의 퍼스트 네임은 지워지고, 그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성만이 (프레임 바깥에서 목숨을 끊는) 그에게 남은 모든 것이죠.
<베이비걸>은 11월에 본 신작들 중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입니다. 스타일에도 주목되는 구석이 있고, 두 인물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전개도 (모두의 취향에 맞지 않을 수는 있으나) 흥미진진합니다. 니콜 키드먼의 연기도 정말 좋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새로운 것은 페미니즘을 역방향으로 써내려간다는 점 때문입니다.
일과 가족 양쪽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여성 CEO 로미는 자기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은밀한 욕구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 욕구에 시달리며 상담 치료까지 받아보았다고 하는데, 그 욕구는 바로 성적으로 정복당하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영화는 로미와 남편 제이콥의 섹스로 시작하는데, 남편이 잠들자 그녀는 거실로 나가 포르노를 보면서 섹스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혼자 채웁니다. 이 포르노는 여성을 거칠게 '정복'하는 내용이죠. 로미가 신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달아오르고 남자 배우가 "이런 섹스 좋아, 베이비걸?"이라고 묻는 순간 영화는 타이틀을 띄웁니다. 그러니까 로미는 '베이비걸'로 격하되고 싶어 하는 여성인 거죠. 그녀의 욕망을 간파한 사무엘은 그녀를 안아주면서 "당신은 내 베이비걸이야."라고 속삭입니다. 두 사람의 위험한 관계가 가능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로미는 여성 상위로 제이콥과 섹스를 합니다. 이는 그녀가 남성을 지배하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카메라 또한 그녀의 눈높이에서 시작했다가 천천히 붐업하면서 정사가 끝날 때에는 정각의 부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나 카메라가 높아졌기 때문에 서로 끌어안은 로미와 제이콥의 머리는 아래쪽을 향하면서 마치 추락하듯 보입니다. 엔딩에 이르면 제이콥은 사무엘이 첫 정사에서 로미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침대에 엎드리게 만들고 격렬하게 핑거링을 해줍니다. 제이콥과의 섹스에서 단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던 그녀가 마침내 처음으로 만족한 듯 보이는 순간 영화는 암전되고요. 이 이야기는 제이콥의 시점에서 뒤집어 볼 수도 있을 텐데, 로미만큼 오프닝과 엔딩 사이에서 커다랗게 변화하는 캐릭터가 바로 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욕망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어 본 연적을 맞닥뜨린 다음에야 그녀에게 절정을 선사할 수 있는 남편으로 변모하는 것이죠.
로미에게 충실한 비서인 에스미가 후반부에 핵심적인 안타고니스트로 부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에스미는 로미 입장에서 불륜이기도 하고 위계에 입각한 관계이기도 한 사무엘과의 밀회를 알고 있으나 이를 연봉 협상을 위한 빌미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하죠. 그럼에도 그녀가 로미에게 '위기'인 이유는 그녀가 요구하는 바, 즉 로미가 계속 정상에 남아 회사 내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고 여직원들을 위해 힘써주는 존재로 남아달라는 것이 로미의 가장 깊은 욕망과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로미가 자기 욕구를 병적이라고 여겼던 이유는 명백해 보입니다. '남성에게 정복당하고 싶다'는 욕구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도 인정하기 힘들고 다른 여성들도 백안시하는 '틀린' 욕망이니까요.
그러니까 <베이비걸>은 여성을 남성에 종속적인 존재에서 해방하고 기존의 낮았던 지위를 높이는 데 주목해온 페미니즘의 흐름을 살짝 거슬러, 성적으로 낮은 위치에서 종속당하고자 하는 욕망을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설정만 앙상하게 떼어놓고 보면 이 이야기는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핼리너 레인은 설령 시대를 역행하는 욕망이라 하더라도 모두 여성의 욕망으로 포괄되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더더욱 여성의 영역을 넓히는 이야기를 만든 것입니다. 제이콥은 마조히즘이 여성의 판타지 아니냐고 반문하는데, '여자는 남자한테 지배당해야 좋아해'라고 말하는 것보다야 깨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대사는 여성에 대한 제이콥의 몰이해를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이 영화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에게 지배당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욕구는 실재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그 욕망을 소유하고 실현한다는 전제가 있겠지요. 로미는 사무엘과의 일을 가지고 자신을 희롱하는 중년의 임원 세바스찬에게 "나한테 그따위로 말하지 마요. 모욕을 당하고 싶으면 내 돈 주고 당할 테니까."라고 매섭게 응수합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인 취향에 잘 맞았던 것은 시각 스타일이었습니다. 야외 장면에서 도드라지는 하이라이트의 블루는 <베이비걸>을 여타 영화들보다 훨씬 차갑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또한 이 영화는 정교하게 오퍼레이팅 된 핸드헬드를 많이 활용하는데, 이때 포커스가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1-2초 정도 늦게 반응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포커스를 '흘린다'는 표현이 문득 떠올랐는데, 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이 작품에 은근히 잘 맞는 시각적 전략이라고 봅니다. 이 테크닉이 적용된 빈도나 포커스가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고려하면 이건 명백히 의도일 거예요. 마지막으로 남녀의 숨소리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삽입곡이 영화의 에로틱한 무드를 적재적소에서 잘 살려줍니다. 이 곡은 로미의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두 번, 로미와 사무엘의 관계가 변곡점을 맞는 순간에 두 번 총 네 번 사용되는데, 음악의 컨셉과 활용이 무척 뛰어나게 느껴지는군요.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의 이야기를 상당히 충실하게 따라간 리메이크작입니다. 오히려 초중반부의 전개에서는 원작과의 차이점이 더 도드라지더니, 뒤로 갈수록 점점 원작을 닮아가고 있죠. 개인적으로 스타일만 따지자면 <부고니아>가 <지구를 지켜라!>보다 더 좋았습니다. 요란하고 코믹한 원작의 무드보다는 차갑고 축축하게 젖은 리메이크의 정조가 제 취향에 더 맞아서요. 그러나 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지구를 지켜라!>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 측면에서의 압도적인 매력은 전적으로 원작의 공인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지켜라!>가 갑자기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지구를 지키는' 주체가 병구에서 안드로메다인 쪽으로 반전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는 상대적으로 병구라는 아웃사이더에 집중하는 대신 생태주의적 주제는 영화적 농담으로 넘겨버립니다. 그 영화의 결말은 '지구를 부수는 인간들이 사는 지구를 부순다!'처럼 다소 가볍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죠. 어쩌면 이 주제가 22년 전보다 훨씬 유효하고도 절박한 이슈로 다가온 지금,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염세주의까지 더해져 <부고니아>는 인간들을 철저하게 지구에서 발라내는 데 공을 들입니다(따라서 이 작품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마더!>와 근친 관계입니다). 저에게는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가 거의 동등하게 좋은데, <부고니아>를 그만큼 좋아하게 되는 데는 엔딩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미셸의 첫 대사는 기업의 CEO로서 인터뷰를 하면서 읽는 원고입니다. 직원이 써준 원고의 내용은 기업이란 무릇 다양성을 갖춘 조직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셸은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며 "우리 표현을 좀 다양화해보면 안 될까?"라고 말합니다. 표현을 다양화한 결과 원고에서 몇 개의 '다양성'들은 소거되고 말겠지요. 너무 협소한 지점에 언어유희적으로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저는 이 대사에 미셸이 하는 두 가지 행위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녀는 궁극적으로 지구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그 다양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류를 선택적으로 소거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원작의 안드로메다 왕자는 지구를 단 한 번의 빔만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러나 <부고니아>에서 엠마 스톤이 연기한 왕은 지구의 축도 위에 부풀어 오른 거품을 톡- 하고 터뜨려버리고, 사람들은 생명이 일순 빠져나가버린 듯 그 자리에서 죽은 채 널브러져 있습니다. 영화는 온 지구에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한 광경을 고정된 앵글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묘사합니다. 배경에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포크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이 목가적인 정취를 풍기며 깔리고 있고요. 이 시퀀스가 섬뜩한 것은 섹스하다 죽은 커플을 보여주는 것처럼 뒤틀린 유머가 포함되어 있어서도, 아이들이 떼로 죽어 있는 (금기를 건드리는 것 같은) 이미지들을 펼쳐놓아서도 아닙니다. 인간들이 모두 절멸한 자리는 기이할 정도로 정적이지만,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과 시체들 사이를 멀쩡히 돌아다니는 강아지 같은 동물들이 때때로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음을 증명합니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공룡 로봇이나 절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처럼 무생물조차도 인간과 달리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류가 없기에 지구는 오히려 더 고요하고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결국 우리는 인류가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내야만 하는 걸까요.
벌이라는 소재는 원작에도 있었지만 <부고니아>는 여기에 자신의 핵심을 제대로 담아냅니다('부고니아'는 소의 시체에서 벌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기원한 고대 지중해의 의식을 일컫는다고 하죠). 영화는 기나긴 시체들의 쇼트를 지난 끝에 주인공 테디의 양봉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꽃과 꿀벌들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이미지들을 여럿 보여준 후 암전됩니다. 이 이미지들은 영화의 오프닝에도 사용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의 구조는 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테디의 대사에서 시작해 인간들이 죽은 후 벌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혹은 돌아온) 이미지라고, 즉 순환론을 그리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의 가사도 사실 이와 똑같은 원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꽃이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물으며 시작하는 이 노래는 꽃을 따간 소녀들부터 그 소녀들을 데리고 간 남자들, 그 남자들이 끌려간 군대를 거쳐 군인들의 무덤까지 다다른 후 무덤 위에 꽃이 피는 것으로 마무리되죠.
저는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직접 각본까지 쓴 작품들, 그러니까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를 그가 다른 작가의 각본으로 연출한 작품들보다 더 좋아합니다(<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를 아직 못 봤습니다). <부고니아>는 란티모스로부터 착상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염세주의와 어울리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그 덕분에 엔딩도 이만큼 탁월하게 완성된 거겠죠. <부고니아>의 엔딩은 올해의 엔딩들 목록에 오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본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캐릭터와 관련해서 아쉬운 부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네요. 상대적으로 전개의 밀도가 높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광적인 납치 스릴러로서의 매력은 사실상 거의 없는 편입니다. 집에 보안관이 찾아왔을 때 지하실을 감시하는 모니터가 켜져 있는 것을 비춰줌으로써 서스펜스를 설정하더니 (심지어 원작과도 다르게) 아무런 위기 없이 테디가 모니터를 꺼버리는 대목이 이 약점을 대표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일 것 같습니다.
이 여섯 작품들 중 가장 재미있게 보고 제 취향에도 더 잘 맞았던 영화는 <베이비걸>이지만, 약간 고민한 끝에 완성도가 더 높은 쪽은 결국 <제이 켈리>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제이 켈리>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ljg3563/25
저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워낙 좋아합니다. 보리스 칼로프가 나왔던 1931년작은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고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한 1995년작은 아직 보지 못해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은 영화화된 작품들끼리 비교하기보다는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했는지에 집중하면서 보았습니다. 저로서는 원작의 음습하고 어두컴컴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유려한 비주얼로 포장해놓은 것이 온전히 좋지많은 않았어요. 특히 초반부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카메라워크들을 보면서 저의 기대와 기예르모 델 토로의 방향성은 다르다는 걸 일찌감치 확인했습니다. 물론 이건 취향의 문제일 테니 가볍게 받아들여주세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들이 항상 그렇듯 이 작품 또한 최고 수준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자랑하고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으니까요.
저에게 원작과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무엇을 정복하려고 했는지에 놓여 있는 듯 보입니다. 원작의 빅터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는 빅터에게 어머니의 상실과 아버지의 실패라는 원체험을 새롭게 부여하고,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없애려 분투하는 캐릭터로 빅터를 바꿔놓았죠. 그리고 그는 사형장과 전쟁터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로부터 절대 죽을 수 없는 피조물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원작의 빅터는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새 생명을 창조해내고 싶었으나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피조물을 빚어내고는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나 새 영화의 빅터는 실제로 죽지 않는 피조물을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오랜 이상을 실현합니다. 물론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지만요. 빅터에게 꿈에서 계시를 준 천사의 동상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반면 그의 작업실 벽면을 가득 채운 메두사 부조는 고통에 찬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극은 이 두 이미지의 대비에도 잘 함축되어 있죠.
소설에서 빅터와 피조물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합니다. 빅터는 탐험선에서 죽고, 피조물은 북극으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과 함께 퇴장하죠. 소설이 쓰일 당시 북극은 유럽인들이 그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탐험에 성공한 적은 없는 땅이었습니다. 소설의 바깥 액자를 담당하고 있는 탐험가 로버트 월턴은 북극에 도달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그러니까 빅터와 쌍을 이루는 캐릭터였죠. 그는 선상 반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배를 돌리지만 이를 못내 아쉬워합니다. 소설은 단순히 '창조주를 흉내 내는 피조물'이라는 테마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광기와 파멸을 다각도에서 다룹니다. 빅터와 피조물의 최후는 사실상 자연 앞에서 그들 모두 필패의 존재임을 확인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로버트 월턴은 만약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북극을 찾아 항해했을 테고, 그 끝은 빅터와 똑같은 죽음이었을 거예요.
영화에서는 빅터가 죽음을 정복했다는 설정으로부터 소설과 달리 창조자의 윤리가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원작에서 피조물은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고 자기가 요구했던 동반자를 만들다가 파괴한 빅터에게 분노해 그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빅터는 피조물을 끝장내려 하고요. 즉, 이 대결은 무책임한 창조주와 상처받은 피조물 간의 복수전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빅터가 피조물을 죽이려 하는 데에는 조금 더 윤리적인 느낌이 더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숙고 없이 초래한 영생을 자기 손으로 거둬들이려 하는 것입니다. 빅터는 총 두 사람을 살해하는데, 피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후원자인 하릴란드를 죽게 만들었고, 피조물에게 총을 쏘려다가 실수로 엘리자베스를 맞혀 쓰러뜨립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의 창조 행위를 그가 죽음으로써 속죄해야 하는 악행으로 규정하는 일이지만, 또 한편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음을 초래하는 아이러니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피조물이 살해한 동생 윌리엄까지 포함하면 빅터는 죽음과 맞서 싸우다가 주변 사람들 모두를 죽음에 빼앗기는 셈입니다.
빅터는 막상 죽은 사람의 신체로부터 새 생명을 만들어낸 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다고 실토합니다. 그에게 피조물은 '빅터'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골칫덩어리이지만, 엘리자베스만큼은 그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봐줍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빅터는 결국 피조물을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에게 죽을 수 없다면 계속 살아가라는 말을 남기는데, 기예르모 델 토로는 원작의 비관적 결말을 뒤집어 생의 의지로 새로 영화를 채워 넣습니다. 피조물은 얼음에 끼인 덴마크 탐험선을 괴력으로 밀어 바다로 돌려보내주고, 두 사람의 다툼과 화해를 지켜본 선장은 로버트 월턴과 달리 자기 의지로 귀향을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좌절 대신 환희가 자리합니다. 창조주가 뒤늦게나마, 상대를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게끔 생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책임을 지는 이 영화의 종결법은 어쩌면 메리 셸리가 살았던 19세기보다 현재에 더 중요한 테마일지 모릅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더 룸>의 한줄평에서 '이젠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위치에서 인류가 직면하게 된 딜레마'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200년이 더 된 고딕 소설에서 재발견한 것이 바로 창조주로서의 인류의 문제가 아닐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이제 비단 유기물에 국한되지 않는 무수한 종류의 생명체들을 숨 쉬듯 발명해내는 시대에 인류에게 필요한 건 자연을 거스르는 시도에 대한 교훈극도, 피조물을 자기 손으로 없앰으로써 책임을 다하겠다는 결기도 아니겠죠.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한 책임감과 피조물이 어떻게 하면 계속 살아가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일 겁니다. 게다가 절대 죽지 않는 이 영화 속 피조물처럼, 이제 우리에게 다가온 흐름은 우리가 만들었다고 해서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개봉 후 한 달이 더 지난 어제 드디어 챙겨본 <세계의 주인>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다루려면 아무래도 별도의 글이 필요하겠네요. 이미 개봉한 지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고, 저한테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실제로 글을 쓸 거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요. 그렇지만 생각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익은 단평을 쓰는 것보다는 잠깐 뒤로 물러서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는 영화의 장점보다 치명적 단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 대한 제 평가는 영화를 차분히 복기해본 뒤에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주인의 친구들이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주인이 당했던 일에 대해 쑥덕거리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미도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장면입니다. 윤리적으로 불편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윤가은 감독이 이들에 대한 최선의 관심을 기울여 영화를 만들었고,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성별에 대한 균형까지 맞추려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이 두 장면은 각본상의 결함으로 작용한다는 게 저의 견해입니다. 둘 모두 '기능'으로만 보이고, 그 안에 든 대사들은 지나치게 얄팍하고 (극 중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레파토리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단점이 다른 장점들을 압도할 만큼 또는 영화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들 만큼 극심한 것은 아닙니다(친구들 장면이 나오는 순간에 영화에 정이 떨어졌다고 말한 지인이 있기는 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이 리뷰에 포함시키지 않았겠죠. <세계의 주인>은 자기 스스로 피해자인 사람이 자기 상처를 재발견하고 이를 다시 극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세상의 관점에서 '너무 괜찮아 보이는' 이 인물이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숨어 있던 또 다른 피해자가 입을 열게 만드는 엔딩처럼 숭고하고 공익적이고 커다란 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은 자기의 '괜찮음'을 무기 삼아 자기가 살아가야 할 세계를 버겁고 날카로운 곳에서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듭니다. 편집에서 정리가 잘 된 편이긴 하지만 조연에 해당하는 캐릭터가 너무 많다고는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윤가은 감독으로서는 이 캐릭터들을 차마 삭제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고 추측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모두 '주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이죠.
주인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활력으로 가득 찬 캐릭터입니다. 여고생을 다룬 한국 독립영화에서도 이 정도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만나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오히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더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만약 상술한 대로 주인이 스스로 변화하는 동시에 주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물이라면, 영화적으로도 이 인물은 개성 있고 고유한 캐릭터일 겁니다. 경우가 아주 같지는 않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에 나오는 호시카와 요리가 얼핏 생각나기도 하네요. 저는 호시카와 요리를 중력을 일으킬 만큼 선한 나머지 그 주변 사람들을 일그러뜨리는 캐릭터라고 보았거든요.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이나 캐릭터 작명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결국 주인이 세계를 당혹하게 만들고 그 세계가 다시 주인에게 반작용을 일으키면서 서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영화의 핵심 모티브는 어쨌든 제목에 잘 반영되어 있다고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