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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켈리>, 영화-배우와 현실-인간의 차이

하지만 당신은 두 번째 기회가 올 때마다 번번이 걷어차버리고 말잖아요

by 헤이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생에 후회가 많은 사람이라면, 특히 그 후회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제이 켈리>의 엔딩은 분명 가슴이 무너지는 순간으로 다가올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소한 일로도 죄책감에 시달려온 사람이지만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실제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러다 보니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쉽게 슬퍼지고 맙니다. 어떻게 보면 <제이 켈리>는 한 달 전에 개봉했던 코고나다의 <빅 볼드 뷰티풀>과 유사한 정서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빅 볼드 뷰티풀>은, 제가 올해 유일하게 보면서 펑펑 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뒤흔들렸다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상념들이 마구 촉발되었다고 봐야 맞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이 켈리>의 엔딩을 보면서 차올랐던 눈물은 상대적으로 <빅 볼드 뷰티풀>을 보면서 쏟았던 눈물보다는 '맑다'고 표현하고 싶을 뿐이죠. 그 순간에만큼은 제이 켈리라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무엇보다 강했으니까요.


<제이 켈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스쳐가며 촬영장 곳곳을 누비는 롱테이크 쇼트로 시작합니다. 제이는 'Eight Men From Now'라는 작품의 엔딩 촬영에 들어가고, 매니저 론은 자기 딸과 테니스 시합에 대해 통화하는 중입니다. 제이가 맡은 캐릭터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시대의 끝을 볼 수 있어 운이 좋다는 독백을 강아지에게 건네며 죽어가고요. 제이는 감독에게 한 테이크를 더 갈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감독이 방금 테이크도 좋았고 이전에도 좋은 테이크들이 있었다고 답하자 제이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고, 제이의 마지막 촬영이 끝나면서 스태프들이 그를 축하해줍니다. 트레일러로 돌아가는 동안 론은 토스카나 영화제에서 제이에게 공로상을 줄 예정이라고 알려주지만 제이는 이를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제이가 자신을 설득하려는 론의 말을 끊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버리면, 카메라는 방 안과 밖에 각각 서 있는 제이와 론을 한 컷씩 비추면서 오프닝을 마무리짓습니다.


이 첫 장면은 이후의 전개와 연결되면서 영화의 핵심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하나씩 뜯어보기만 해도 <제이 켈리>에 대한 리뷰로 손색이 없을 거예요. 제이 켈리라는 배우가 바로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 사람인지, 반대로 배우로서 감독이나 스태프들은 얼마나 고분고분 따르는지, 론은 또 어떤 사람인지 등의 기본적인 캐릭터 설정은 굳이 자세히 다루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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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35년 간의 배우 생활 덕에 공로상을 받게 됩니다. 이는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큰 업적을 성취해왔는지를 드러내는 설정입니다. 그가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가 딸 데이지의 여행에 따라가겠다며 상을 받기로 마음을 바꾸는 것은, 이 영화의 로드무비적 플롯에 있어 중요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여러 가지 층위와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공로상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배우 인생을 되돌아보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삶이 배우로만 규정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프닝 직후에 오는 장면은 제이가 데이지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2주 간의 휴가 동안 딸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데이지는 유럽 여행을 떠나야 하죠. 즉, 제이는 그동안 그가 몰두해 있던 배우로서의 삶 대신 아버지로서의 삶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로상을 받기로 결정하면서, 제이는 다시금 배우로서의 정체성에 가까워지는 대신 자연인으로서 맺고 있는 관계들과 멀어지는 셈입니다. 그는 (실제 조지 클루니의 영화들을 이용해 만든 헌정 영상으로) 자신의 직업적 발자취를 모두 돌아본 후, 공허한 혼잣말로 "다시 가도 돼요? 다시 하고 싶어요."라고 읊조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기립박수 소리에 파묻혀 응답받지 못합니다.


영화에서 제이는 총 세 번 테이크를 다시 가자고 요청합니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각각 한 번씩, 그리고 젊었을 적에 다프네와 침대 위의 애정씬을 찍으면서 한 번이죠. 이때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가운데 한 번뿐입니다. 엔딩에서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수긍이 됩니다. 인생에는 두 번째 기회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첫 번째 장면에서도 감독은 그에게 테이크를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걸까요? 이때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프닝과 엔딩이 날카롭게 대비를 이룰 수 있을 텐데요. 지금 저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답은 제이의 나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젊었을 때의 제이에게는 잘못되거나 부족한 것을 바로잡고 다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지금은 그가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프네와 새로운 테이크에 들어가기 전에 제이는 촬영장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프네가 "당신을 정말 사랑해."라고 말하자 멈춰서서 침대 쪽을 돌아보고, 자신과 다프네가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에야 퇴장합니다. 젊은 시절의 제이는 (그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이 순간 자신에게 허락된 두 번째 기회를 아직 뱃속에 있는 첫째 딸 제스에게 사용하는 대신 다프네와 사랑을 나누는 데에 사용한 거죠. 제이와 다프네는 자신의 아이로 출연하는 아역배우를 반드시 가운데에 끼고 어울림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피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이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친딸 대신 다른 아이를, 가족 대신 배우를 선택한 겁니다.


혹은, 제이의 열망이 오프닝과 엔딩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즉, 영화 촬영과 관련해 제이는 좋은 테이크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한 번 더 가고 싶은 마음을 단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엔딩에서 다시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신의 인생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더군다나 감독처럼 그에게 '이전 테이크'가 좋았다고 말해주기는커녕 모두가 그의 과거를 탓하는 상황에서는, 제이는 어느 때보다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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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가 오프닝에서 촬영하는 작품의 제목 'Eight Men From Now'는 이 작품의 플롯을 그대로 지칭합니다. 외적인 로드무비 사이사이 제이는 자꾸만 과거로 들어갔다가 나오곤 하는데, 이때 제이가 플래시백 속에서 만나는 핵심적인 사람들이 총 여덟 명이기 때문입니다.


피터의 부고를 들은 제이는 6개월 전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날을 회상합니다. 제이는 오디션 자리에서 명단에도 없는 자신에게 리딩 기회를 주고 주인공으로 발탁해주기까지 한 피터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제이가 캐스팅에 응하지 않자 투자를 받기 위해 이름만이라도 빌려줄 수 없느냐고 물어봤었죠. 장례식장에서 제이는 이름이라도 빌려줄걸 그랬다고 후회하지만, 정작 피터가 자신에게 남긴 네커치프를 론이 마음에 들어하자 "가질래?"라고 하더니 냉큼 줘버립니다.


연기를 배울 당시 친한 친구였던 팀은 제이가 자기 인생을 빼앗아갔다고 그를 비난합니다. 어쩌면 제이는 부당한 분풀이에 당한 피해자로 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팀은 무대 위에서는 뛰어난 배우였지만 정작 카메라 앞에서는 손을 벌벌 떨 정도로 담력이 작았고, 팀이 통찰력과 즉흥성으로 재창조해낸 대사를 제이가 훔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사를 선보이기로 결단내린 건 제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이는 (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팀의 울분을 들어주는 대신 그 자리를 떠나기로 택했고, 그 결과 팀과 몸싸움을 하게 되었으며, 팀의 코를 부러뜨려 소송에 처하게 되죠. 론과 변호사 앨런은 이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팀의 90년대 미결 마약 혐의를 들춰냅니다. 결국 이로 인해 팀은 소송을 취하하지만, 정작 제이는 이 이야기를 듣자 "사과하고 싶어."라고 뒤늦게 말합니다. 물론 매니저와 변호사의 만류 때문에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도 못하고요.


만약 제이가 팀과 대화를 계속했다면, 기차에서 소송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로 숨는 대신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팀과의 관계는 이렇게 구렁텅이에 처박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이는 또 한 번 팀의 인생을 망쳐놓습니다. 론과 앨런은 과거의 일로 팀의 발목을 잡은 것에 대해 다행스러워하지만, 사실 과거의 일 때문에 현재의 발목이 잡힌 것은 제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팀에게 맞아 눈에 든 멍은 중요한 시각적 장치입니다. 오디션장에서 제이가 추가 리딩을 위해 다른 장면의 대본을 받는 동안 팀은 문 앞에서 그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이 플래시백은 멍에 메이크업을 받는 제이의 눈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연결됩니다. 이 사건이 준 여파는 현재의 제이에게까지 상흔을 남겼지만, 그는 이를 화장으로 가리려고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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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고소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에 숨더니 제스와의 사건을 떠올립니다. 팀이 제스에게 상담치료사를 소개시켜줬다는 말을 한 바 있고, 또한 팀 이전에 인생이 망가진 것에 대한 책임을 제이에게 캐물었던 사람이 바로 제스이기 때문이겠죠. 지난 번 제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빠를 따라 연기를 하다가 포기하고 유치원 일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연기를 하는 동안에는 자존감이 떨어지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말하죠. '연기를 하는 동안'은 '아빠와 연결되어 있는 동안'이라고 바꿔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제스가 데리고 간 동반 상담 자리에서, 제이는 10살의 제스가 쓴 편지를 견디지 못하고 상담실을 뛰쳐나옵니다. 그는 우는 척하면서 편지를 읽는 상담사의 연기를 탓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나쁜 아빠였다는 진실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겁니다. 제스는 바깥까지 따라나와 자기 속마음을 진지하게 들어줄 것을 요구하는 제스를 위층에 홀로 남겨둔 채 계단을 내려가버립니다.


그러니까 제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야 그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서, 더 애석하게도 그렇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조차 날려버리고 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가 고쳐살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기만 하는 '난폭한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이에게 캐스팅을 거절당하자 두 번째 부탁을 건넸던 피터처럼, 동반 상담으로 자기와 화해할 두 번째 자리를 만들었던 제스처럼 그에게 기회는 계속 주어졌습니다. 팀은 자기 원망을 두 번에 걸쳐 표현하는 셈입니다. 한 번은 바에서 얼굴을 맞대고, 또 한 번은 소송을 통해 법적으로. 그러나 그가 소송을 취하하는 것은 배우 제이 켈리에게는 다행인 일일지 모르나 인간 제이 켈리로서는 친구와 소통할 수 있는 다리를 아예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이의 마지막 대사 "다시 가도 돼요? 다시 하고 싶어요."가 처연한 것은 비단 삶을 다시 살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건 관객이 그가 새로 주어진 기회조차 소진시켜버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신이 아니라 그에게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직접 주었던 거고요.


저에게 데이지는 (너무 비인간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첫 번째 딸에 대한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두 번째 딸처럼, 바꿔 말해 제스에 대한 두 번째 기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걔랑은 답이 없어요."라고 말했던 제스와 달리 제이와 데이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습니다. 데이지는 자기 뒤를 밟고 새로 생긴 꿈을 가로막으려 하는 아빠에게 화를 내며 자리를 뜨긴 했지만 그래도 시상식 당일 날 제이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하고요. 만약 데이지가 실제로 제이에게 남은 두 번째 기회라면, 영화는 이에 대해서는 문을 완전히 닫아걸지 않고 가능성을 남겨둔 셈입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물론 한 가지 이유는 아직 데이지가 제이에게 한 번밖에 실망하지 않았다는 거겠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데이지의 새로 생긴 꿈, 그러니까 연기를 하겠다는 포부와 관련이 있으므로 뒤에서 론을 다룰 때 자세히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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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와 친구들이 떠난 후, 제이는 다프네와 함께 영화를 찍던 순간을 회상합니다. 다프네는 제이의 배우로서의 삶과 가족으로의 삶을 대비하는 캐릭터일 수 있습니다. 그는 임신한 아내를 두고 다프네와 불륜을 저질렀으니까요. 또한 그녀는 제이와 직접적으로 대비되기도 합니다. 다프네는 연기를 사랑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어 배우 일을 그만뒀다고 하죠. 반면 제이는 제스에게 고백했듯이 배우로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손에 쥐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던 사람입니다. 만약 다프네가 한때 제이에게 남아 있던 기회를 비추는 지점이 있다면, 하나는 방금 말했듯 그가 다프네 대신 아내와 제스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그가 다프네처럼 연기를 그만두었을 가능성일 겁니다. 팀은 연극 수업을 함께 들었던 친구들끼리 만나는 동창회가 있다면서 그 중 배우로 생활하는 건 제이뿐일 거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제이는 동창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요. 이는 그가 연기를 그만뒀다면 사람들과 관계가 계속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의미겠죠.


제이는 상담실에서 자신이 아버지와 닮았다는 비난을 극구 거부합니다. 제이는 아버지로부터 온전히 사랑받지는 않았다고 느끼는 듯하죠. 그가 선물하는 캐시미어 스웨터를, 두 번이나 건네는데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에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이가 얼마나 강하게 부정하든, 제스에게 그는 자기 아버지와 닮은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과음으로 몸이 좋지 않다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단순히 숙소로 가는 게 아니라 다음 날 오전 8시, 그러니까 시상식 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상의 한 마디 없이 이미 예약해놓은 상태고요. 제이는 자기가 공로상 받는 것을 보고 가라며 "부탁이에요, 아버지. 가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이도 아니고 그 옆에 서 있는 영화제 관계자에게 "내 가방 어디 있지?"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떠나버리는 사람을 바라보는 황망한 기분을, 제이는 데이지와의 다툼에 이어 또 한 번 느끼는 것이죠. 그가 열심히 택시를 뒤쫓아 달리다가 숲에서 제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이제서야 그녀의 입장에 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제스는 "나는 잘 살 거예요. 아빠랑 함께 하지 않을 뿐이죠."라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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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에게 유일하게 기회를 주고 또 주는 사람은 바로 동료인 론입니다. 론은 아버지와 똑같이 택시를 타고 떠나고, 제이는 아버지를 쫓아가던 것과 똑같이 뒤에서 론을 부르며 달려옵니다. 제이의 아버지와 달리 론은 차를 세우고, "너랑 더는 일 못하겠어. 나한테 안 좋은 일이야."라고 말했다가도 제이가 "네가 꼭 참석해줬으면 좋겠어."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여기 있는 건 나뿐이잖아."라며 남기로 선택합니다. 이미 제이가 론을 뒤에 남겨두고 가버리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오프닝의 트레일러에서도, 소송 소식을 들은 기차에서도, 심지어 이 일은 둘이 함께 이룬 거라고 론이 항변할 때도 제이는 "난 춤출 거야."라며 그와 멀어집니다. 론은 제이가 했던 행동을 그에게 똑같이 돌려주지 못합니다.


론은 자기 인생 전체를 제이에게 바친 매니저입니다. 그는 제이의 또다른 스태프인 리즈에게 청혼할 생각이었지만 그날의 저녁 식사는 리즈를 찾는 제이에 의해 망쳐졌습니다. 론은 레이의 성공에 자신이 기여한 몫을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제이는 그가 자기 모르게 하는 일들의 중요성을 하나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제이가 토스카나에 도착해 "내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라고 말하자 론은 "꼭 필요한 사람도 있잖아."라고 대꾸합니다. 이 대화는 론의 소망과 제이의 반응이 도치된 것처럼 보입니다. 론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확인받고 싶어 하지만, 상대방은 그 말을 해주지 않는 거죠. 토스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이렇게 짜여 있습니다. 벤 알콕은 론이 매니저로서 자신을 충분히 챙겨주지 않는 것 같다며 그를 해고하고, 아내 로이스는 론이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안 돼?"라고 두 번이나 부탁함에도 그 말은 끝끝내 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이는 그를 '내 수입의 15%를 가져가는 친구'라고, 그러니까 돈 때문에 자기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쏘아붙입니다. 이렇게 보면 론은 미련 없이 제이를 떠나야 할 것만 같습니다. 대체 왜 론은 제이에게 또 기회를 주는 걸까요?


저는 이에 대한 답이 '일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라는 두 사람의 공통점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다른 핵심적인 캐릭터들에게는 모두 각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터에게는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해주는 아들이 있고, 팀에게도 가족과 오랜 동창들이 있으며, 데이지에게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방금 만난 남자친구까지 있습니다. 제스는 제이와의 마지막 통화를 아들인 테오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이유로 끊어버립니다. 게다가 제이와 현재 시제의 여정을 함께 하는 스태프들도 하나씩하나씩 떠나는데, 이 이탈은 비단 제이뿐만 아니라 론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에게는 서로만이 남습니다. 둘의 사이는 일로 맺어진 한편 수십 년 동안 친구 같아지기도 한, 나쁘게 말하면 이도저도 아닌 관계죠. 론은 매니저로서 일해야 할 촬영장에서는 딸과 통화하고, 딸의 복식 파트너로서 테니스에 매진해야 할 때는 제이의 일을 처리하러 떠납니다. 가족과 일 사이에서 허둥대다가 결국 둘 다 놓치고 마는 론의 서브플롯은 사실상 제이의 메인플롯을 사이즈만 줄여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일과 가족 사이 그 어딘가에 끼어 있는 제이와 론의 관계와도 유사하게 보여요. 여기서 이 영화는 따스하기도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처연해집니다. 영화는 제이가 완전히 홀로 남지 않게끔 옆에 론을 남겨놓아주지만(자신을 떠나간 사람들을 객석 곳곳에서 발견하던 제이는 마침내 자기 옆에 앉은 론을 바라보고, 제이가 손을 잡자 론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결국 영화 또는 영화 산업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너도 제이 켈리지만 나도 제이 켈리야!"라는 론의 대사는 단순히 매니저의 설움만 드러내는 말은 아닌 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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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ght Men From Now'는 주인공이 자기 시대가 끝나는 것을 목격한 후 죽어가는 것으로 끝납니다(옆에서 이 캐릭터의 최후를 지켜주는 강아지가 아마 론이겠죠). 제이가 맞이하는 결말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죽지도 않고, 만족하며 최후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는 공로상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배우인지를 증명하는 것이고, 그는 소매치기범을 잡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셀럽으로서의 생명력을 더더욱 연장하고 있는 참입니다. 그러나 범인이 체포되고 사태가 마무리된 후, 카메라는 갑자기 위에서 제이를 내려찍음으로써 그가 홀로 서 있는 곳이 작은 묘지라는 것을 섬뜩하게 드러냅니다. 만약 제이가 극중극의 캐릭터처럼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그가 배우로서 얻은 생명력만큼 자연인으로서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일 겁니다.


팀은 제스로부터 제이가 '빈 그릇'이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네 안에 사람이 있어? 어쩌면 넌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몰라."라고 내쏩니다. 이 영화는 실비아 플라스의 인용문부터 극중 대사까지 여러 차례 '자기자신이 되는 일이 가장 어렵다'라는 주제를 드러냅니다(노골적이어도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는 직업인 배우로서 정점에 오르는 순간은, 뒤집어 말하면 자기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실패한 것과 같습니다. 영화 내내 제이는 곤란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문 뒤에 숨습니다. 아마 텍스트 바깥,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의 삶에서 그는 문 대신 자기가 맡은 배역 뒤에 숨어왔을 겁니다. 제스는 다프네와 함께 출연한 영화 속에서 제이가 '좋은 아빠'를 연기하고 있었다고 말하죠. 론이 제이의 시상식에 남기로 결정한 후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제이의 얼굴에 메이크업을 해주는 장면입니다. 다시 말해 론이 곁에 남아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의 우정은 영화라는 매개체 안에서만, 제이의 맨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이에게 데이지와의 관계에서만큼은 희망이 남아 있다면, 저는 그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데이지의 꿈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제스는 (다프네처럼) 배우 일을 그만둠으로써 아빠에게서 벗어난 반면, 데이지는 그 반대로 이제서야 배우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녀가 새로 사귄 남자친구 기욤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으려 하고 있고요. 데이지가 어떻게 될지는, 그리고 제이와 데이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만약 데이지가 배우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때는 부녀의 관계가 제이와 론의 관계처럼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예요. 그리고 만약 데이지가 배우와 관계없는 삶을 산다면, 제이는 그녀가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축하하며 주었던 기회를 또다시 발로 차고 두 번째 딸조차 곁에서 떨어뜨려놓고 말겠죠. 영화가 이 지점을 열어놓음으로써 생기는 가능성이 저에게는 결코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부녀 관계는 결국 '자기자신으로 살지 않는 삶'을 공유하는 데서 그 연을 이어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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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ght Men From Now'의 촬영이 끝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캔디가 "제이, 본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기분이 어때요?"라고 묻습니다. 제이는 이 말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오프닝에 미결된 채 남은 이 질문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 "다시 하고 싶어요(I'd like another one)."를 답변으로 삼기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저 또한 되돌아가서 고치고 싶은 일들이 참 많고, 딱 한 번만 새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고맙게도 여러 번 기회를 준 사람들도 있었고, 저에게 기회를 줬음에도 제가 시간만 날리고 있는 관계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요. 영화를 지렛대 삼아 삶을 바꾸려고 하는 일은 사실상 없는 편입니다. 특별히 영화에서 교훈을 길어올리려 애쓰지도 않고요. 그러나 <제이 켈리>는 뭐랄까, 인생에 대한 지침서라기보다는 지금 제가 기회를 날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문처럼 느껴지네요. 여태까지는 주로 상처를 줬던 일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 영화는 그보다도 기회가 새로 왔을 때 그 기회를 또 허비하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지를 상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에게 제이 켈리는 그 어떤 캐릭터보다 오래도록 떠오를 안타깝고도 슬픈 반면교사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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