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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미친 영화

신들린 연출, 주제마저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는 극강의 오락

by 헤이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해 가장 재미있게 본 개봉작이 <씨너스: 죄인들>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바뀌었습니다. <매그놀리아>나 <펀치 드렁크 러브>, <팬텀 스레드>를 떠올려보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왁자지껄하고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느낌의 재미를 주는 작품들도 곧잘 만들어왔습니다만,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오락영화'를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죠. 그런데 넘치는 개성과 날카로운 시각은 유지한 채로 순수하게 재미있는, 이토록 끝내주는 오락영화를 가지고 돌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이 영화에는 독창적인 캐릭터와 타율 높은 유머, 특히 사운드의 질감이 굉장한 액션씬과 평범하고 조용한데도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대화씬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회자될 클라이맥스의 카 체이스 씬이 있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가장 큰 스펙터클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연출력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어떻게 사운드트랙 앨범에서 3분이 채 되지 않는 곡('Ocean Waves')을 20분가량의 시퀀스 내내 그냥 이어 붙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차 한 대 또는 두 대가 조용히 앞차를 뒤쫓을 뿐인 심플한 상황을 이 길고도 요란한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삼을 수 있는지, 그러면서 도대체 어떻게 그것들이 완벽하게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면서 가장 경탄했던 것은 편집입니다. 아카데미 예측을 하기는 좀 그렇고, 다만 편집상에 노미네이트 되지 않을 리가 없는 상황에서 저라면 이 작품에 표를 던질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전체의 완급 조절도 더할 나위 없고, 세르지오 센세가 불법 이민자들을 지하 도주로로 대피시키는 시퀀스의 거시적 편집이나 카 체이스 씬의 세부적 쇼트들을 다듬는 미시적 편집까지 모든 순간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카 체이스 장면에서 언제 도로를 보여주고 언제 캐릭터를 보여줄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비중을 어떻게 조절할지, 개별 쇼트들을 얼마큼 지속할지 등의 판단은 정밀하고도 절묘합니다. 또 저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지하 회동 장면이 무척 좋은데, 특히나 말없이 앉아 있던 사령관이 툭툭 끼어드는 순간들은 5분도 채 나오지 않는 이 캐릭터를 절대 잊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때 대화를 불쑥 끊고 싸늘하게 말을 뱉는 사령관의 대사나 클로즈업 쇼트를 삽입하는 편집의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다고 생각합니다.


대피 작전 시퀀스는 사실상 모든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한 상태에서 새로운 사건이 본격적으로 발화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록조는 자기 딸을 잡기 위해 불법 이민자 핑계를 대며 박탄 크로스를 급습하고, 밥은 휴대폰을 충전하거나 집결지를 알아내려고 발버둥 치며, 세르지오는 이민자들을 지하 터널로 대피시킵니다. 그리고 윌라와 디안드라가 수녀원을 향하는 동안 윌라의 친구들은 심문을 당하고 있죠. 영화는 다른 인물을 언급하거나 연상시키는 사소한 큐들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장면을 전환하고, 장면들을 넘나들 때마다 고여 있지 않고 계속 위기감을 키워나갑니다. 영화에서 편집이 논리에 맞게 장면들을 연결하거나 혹은 장면 간에 논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이 시퀀스의 편집은 교과서적입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던 'Ocean Waves'가 밥이 캠핑장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깔리기 시작해 옥상에서 떨어지고 테이저건을 맞을 때까지 지속되는 걸 듣고 있으면, 이 연속되는 음악이 시퀀스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한편으로 별로 다이나믹하지 않은 노래가 15분 넘게 계속 나와도 거슬리지 않을 만큼 장면의 리듬이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구나, 하고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이 장면은 각본도 좋습니다. 제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특히 밥과 세르지오의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밥을 외따로 떨어뜨려놓았다면 이 장면은 몹시 심심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이란 고작 오랫동안 쓰지 않아 방전된 1G 휴대폰을 충전하고 디안드라가 윌라를 데리고 가고 있는 장소를 알아내는 것뿐이니까요. 폴 토마스 앤더슨은 여기에 세르지오를 투입함으로써 규모를 키우고 밥의 목표 달성을 자꾸 지연시킴으로써 장면을 쫀쫀하고도 코믹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여기에 세르지오가 들어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록조가 시꺼먼 속내와 그럴듯한 명분 두 가지를 가지고 박탄 크로스로 왔기 때문에, 밥과 세르지오는 같은 뿌리로부터 위기를 맞게 되는 셈이죠. 플롯 자체는 복잡하게 꼬으면서도 그러기 위해 불필요한 곁가지를 덧붙이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영화의 초점은 미국의 이민자 문제에 다시 한번 가닿을 수 있게 됩니다. 당연히도 이 작전은 오프닝의 이민자 탈출 작전을 떠올리게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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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각본이 훌륭하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작법의 정석을 충실히 따르는 면과 비껴나가는 면이 모두 있습니다. 후자의 예시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밥과 윌라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은 어쨌든 딸을 구하고 죽음의 위험에서 탈출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러나 둘 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반드시 조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잘 쓴 시나리오와 잘 만든 주인공의 조건이라는 게 있다면, 이 영화는 주인공의 사투 여부는 충족했으나 자율성은 충족하지 못한 셈이 되겠죠. 그러나 이를 통해 영화는 여러 인종들끼리의 연대를 함축할 수 있게 됩니다. 언제나 이들을 돕는 것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입장에서 척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히스패닉인 세르지오와 코만치족인 아반티 Q가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하워드 서머빌이 납치되었을 때 망을 보고 있다가 비상 무전을 치는 소년들, 디안드라와 용감한 비버 자매회의 수녀들 등등이 있죠.


게다가 밥이 끝까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윌라가 팀을 이미 해치운 후에 그녀에게 도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의 무능력함은 윌라가 마지막에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한 것과 대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윌라는 최후의 구원을 자기 손으로 일궈냅니다. 이들이 대비되는 양상은 현안에 대해 세대적으로 접근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시각을 엿보게 만들기 때문에 몹시 중요하죠. 그러니까 이 각본에서 유별난 지점들은 영화의 개성일 뿐만 아니라 핵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가장 악하다고 일컬을 수 있는 악당을 등장만 시켜놓고 마지막엔 그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다른 영화에서도 뿌리 뽑히지 않은 구조적 악을 남겨두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아예 괄호 쳐져 있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신기루처럼 흐지부지하게 만드는 걸 자주 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 물론 이것 역시 영화의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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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중반의 난민 물결과 두 번의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서구 사회는 점점 더 배타적으로 변해왔고 혐오를 표현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미투 운동을 필두로 2010년대 후반 전 세계를 달구었던 페미니즘이 어느새 사회적인 열기를 잃고 강력한 백래시를 맞으면서 그래도 그 안에서 가치를 찾고 남겨놔야 할 부분들에 대한 논의조차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주목하는 투쟁의 대립항은 인종과 성별입니다('성별' 대신 '젠더'라고 말하고 싶지만, 논바이너리 캐릭터인 보보를 배신자로 콕 집어 설정한 이 영화의 선택은 이를 주저하게 만드는군요). 이 부분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엔딩입니다. 영화는 이전까지 혁명이나 투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윌라가 차로 3시간 반이나 가야 하는 오클랜드의 이민자 진압 현장에, 심지어 비를 뚫으면서 가게끔 만들면서 암전됩니다. 반면 밥은 소파에 누워 드디어 처음 가져본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고요. 영화의 제목마따나 새로운 싸움이 이어지는데, 이 주체가 윌라라는 사실은 영화를 역으로 거슬러올라 왜 이렇게 귀결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만듭니다.


밥은 애초부터 혁명의 강경한 신봉자가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이 보는 것은 곧 벌어질 작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퍼피디아와의 관계 및 폭발물 전문가로서의 역할로 인해 프렌치 75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게토 팻의 모습입니다. 그는 퍼피디아의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혁명에 어울리지 않으며 퍼피디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이 태어난 후에는 테러 행위를 그만두고 가족에 집중하자고 퍼피디아를 설득합니다. "What time is it?"이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 오랫동안 고초를 겪어야 하는 그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박탄 크로스에서 16년 간 술과 마약에 찌든 채 혁명을 점차 기억에서 지워갔음을 암시하는 장치입니다. 사건이 본 궤도에 오르고 나면 밥의 유일한 목적은 딸을 구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스티븐 록조라는 과거의 악연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이제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연인과 딸을 두고 떠날 정도로 혁명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퍼피디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동료들을 배신했고,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실패했단다."라고 인정합니다. 제가 보기에 퍼피디아는 말로 내세우는 가치들보다 힘이나 권력에 더 매혹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만삭의 몸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이미지겠죠.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을 들이밀면서 정글푸시가 했던 말, "이게 권력의 모습이야."는 퍼피디아의 생각을 대신 표현하는 대사처럼도 느껴집니다. 퍼피디아가 어디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파악하고 나면 그가 록조와의 밀회를 즐겼던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습니다. 두 사람의 정사는 퍼피디아가 록조의 군모를 쓴 채 그를 거칠게 벽에 밀어붙이며 애무하는 식으로 묘사됩니다. 즉, 퍼피디아는 록조라는 사람보다도 이 백인 남성 대위를 자기 발아래에 무릎 꿇리는 것 자체에 더 큰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거죠. 입으로는 대의를 외쳤지만 사실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고 있었을 뿐인 그녀는 자기 안위를 위해 동료들을 밀고합니다. 딸이 태어날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체포된 퍼피디아를 찾아온 록조는 이제 역으로 그녀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그의 지위를 빌려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퍼피디아가 얼마나 힘을 탐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일지도 모르죠. 이 영화에서 프로타고니스트 쪽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딱 두 차례입니다. 그중에서 엄마는 다친 몸으로도 자기 임무를 다하려던 같은 인종의 경비원을 사살했고, 딸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악인을 사살합니다. 이전 세대 사람들의 총구는 엉뚱한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이 영화가 투쟁의 방법론으로서 테러리즘을 비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 가장 큰 논거는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윌라의 부모는 모두 혁명에 실패한 셈입니다. 아버지는 가족이 생기자 싸움터를 떠났고, 어머니는 불의에 대한 분노를 잘못된 방식으로 해소하려 했습니다. 용감한 비버 자매회의 원장수녀 또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디안드라에게 감탄하며 자신은 이제 너무 피로하다고 토로한 바 있죠. 이제 혁명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어갔습니다. 영화는 윌라의 싸움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철저하게 괄호 칩니다. 그건 유효한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폴 토마스 앤더슨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죠.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관객이 이어받을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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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윌라는 실패한 혁명을 이어받아 계속 싸워야 하는가? 이 영화에서 처벌받는 악당은 팀과 록조 둘뿐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아직 타파되지 않은 악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윌라를 행동하게 만드는 사건이 이민자 진압이니, 영화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에서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고 그 차별과 폭압의 시각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많다는 것을 짐작 가능하죠.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이자 남성우월주의자 집단이며 무엇보다 자기들끼리는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하지만 원 바깥의 사람들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거기다가 이들은 스스로를 '우월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는데, 이 표현은 우생학적으로까지 느껴집니다. 록조가 결국 주인공들이 아니라 이들의 손에 죽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니까 록조가 처벌받은 것은 이민자에 대한 과격한 정책을 집행한 군인이라거나 자기 딸을 죽이려 한 인간 말종이라서가 아니라, 인종 청소의 의무를 저버린 것도 모자라 우월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려고 한 '열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록조의 박탄 크로스 급습으로 치킨 릭킹 공장의 경영인은 실제로 손해를 보기도 했고요. 극단적으로 왜곡된 시각을 가진 채 미국의 최상층에 들어앉아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을 영화는 신랄하게 비웃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따스하고 사랑이나 가족이 연상되는 클럽의 이름, 회의를 마치면서 다 같이 "Hail, Saint Nick!"이라고 외치는 모습, 그리고 팀이 첫 등장할 때 깔리는 캐럴 음악 등이 그렇죠. 그러나 결국 이들이 록조를 살해한 투명한 가스처럼 관객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온몸을 보호구로 감싼 것처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찝찝하고도 섬뜩합니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해요. 엔딩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싸움은 감춰진 적을 모른 채 벌어진다는 점에서 결연함이나 희망의 뉘앙스 못지않게 불안함까지 자아내는 게 사실입니다.


팀이 지하 회동에 참석하는 장면에 잠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회원들은 팀에게 록조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면서 그를 '깔끔하게 처리하라'는 임무를 줍니다. 이 대화의 앞부분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서사적인 잉여일 수도 있습니다. 관객은 이미 록조와 퍼피디아의 관계를 보았고, 록조가 밥과 윌라를 찾으려 하는 이유도 편집의 논리를 통해 쉽게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죠(록조가 클럽의 제안을 받고 호텔에서 나오면 하워드 서머빌이 납치되고 '베이비 샬린'에 대해 심문을 받는 장면들이 뒤따릅니다). 저한테 이 장면은 이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중요해 보입니다. 팀이 록조의 딸이 어느 쪽 혼혈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입에 담기도 힘들지만' 흑인 쪽이라고 답하고, 팀은 아반티 Q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혈통 때문에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퍼피디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팀이 "모성애가 강한 타입은 아니군요."라고 말하자 사령관은 "그러면서 우리 보고는 야만적이라고 하지."라고 대꾸합니다.


앞에서 저는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이 가진 느낌이 우스꽝스럽다고 이야기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도 있을 겁니다. 하나는 이 클럽이 자신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는 기독교의 뉘앙스입니다. 구태의연한 종교적 가치 위에 들어앉아 종교와 정반대 방향의 악으로 내달리는 이들은 현실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지 한 번 더 되새겨보게 만듭니다(이와 반대되는 집단이 용감한 비버 자매회입니다). 또 다른 함의는 가족적이라는 느낌입니다. 이들이 퍼피디아를 도덕적으로 조소하고 힐난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족관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전통적인 가족관 자체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인 것처럼 모든 사람을 그 틀 안에 끼워넣으려고 하는 건 명백히 폭력입니다.


그리고 (일전에 록조를 호텔에 초대했던) 버질은 불법 이민자들이 대거로 체포되어 멈춰버린 치킨 릭킹 공장의 경영인이 직원들의 조속한 복귀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이민자들을 혐오하기 때문에 그들을 착취하는, 혹은 이민자들을 혐오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존하는 기업의 부도덕하거나 모순적인 행태가 이 한 마디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모순은 이민자 수용소를 관리하며 그들을 억압하던 록조가 성적으로는 흑인에게 매혹되는 상황과도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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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조는 욕망으로 들끓는 인물입니다. 16년 전에는 퍼피디아를 향한 욕정에 사로잡혔고 현재는 계급 이동의 야욕으로 눈이 멀어버렸죠. 이 영화는 밥과 록조 모두에게 과거의 망령이 찾아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특히나 록조의 발목을 잡는 이 망령은 그가 불쌍하게 여겨질 만큼 가혹하기도 합니다. 사랑 또는 성적 취향 단 하나만으로 진입이 좌절될 만큼 최상류층의 벽은 높은 걸까요(사령관은 흑인과 관계를 맺은 록조를 두고 '아랫도리를 더럽혔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이긴 했지만 군인으로서 그의 경력과 업적은 길고도 탄탄하데 말이죠. 결국 록조가 과거에 추구했던 성적 욕망과 현재 추구하는 계급적 욕망은 치열하게 맞붙고, 그 결과 세상에 혼란을 가져다 놓습니다.


욕망이 대치하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이 록조의 세계 안에서 가치관이 뒤틀리는 양상입니다. 록조 또한 미국의 가치를 직업적으로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인데, 이민자들을 가두고 관리하라는 국가의 요구는 그 억압받는 사람들 중 한 명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을 일탈로 만들어버립니다.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극단적 배타주의를 현시대 미국의 입장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심히 과격한 견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는, 군인인 록조에게 불법 이민자들을 잡아 가둬놓도록 지시하는 국가와 록조의 일이 자신들의 소명에 유익하다고 판단한 클럽 측이 맞닿아 있는 듯 보입니다. 만약 퍼피디아에 대한 록조의 감정을 사랑이나 애정으로 본다면, 그 또한 이 문제 있어서만큼은 피해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충성하는 조국이나 속하고 싶어 하는 최상류층은 그의 내밀한 욕망을 절대 눈감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적인 문제입니다. 록조는 퍼피디아를 풀어주는 대가로 그녀에게 안가를 제공하고 이제부터 조직과는 연을 끊은 채 직업도 구하고 세금도 내며 착실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류사회에 온 걸 환영한다."라고 덧붙이죠. 훈장을 받은 날 꽃을 들고 안가를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 록조는 그녀를 진지하게 아내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던 듯하죠. 그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퍼피디아를 (집으로 대변되는) 그 틀 안에 가두고 싶어 했지만, 퍼피디아는 그 안에 고분고분 머물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16년 후에 록조는 신분상승을 위해 자기 딸을 없애버리려 함으로써 스스로 이 가족적 가치를 찢어발겨버립니다. 이 위선은 그의 준거집단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것이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자기 안위를 입으로 내뱉은 가치보다 우선시한다는 면에서는 퍼피디아를 연상하게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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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부녀의 가족 드라마로 보았을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친부는 딸을 죽이려 하고 양부를 딸을 구하려 한다는 역설입니다. 윌라가 친자가 아니라면 풀려나겠지만 친자라면 곤경에 처할 거라는 대사는 정서적으로 꽤나 큰 충격을 줍니다. 친자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록조는 윌라에게 아빠로서 할 만한 진부한 질문들을 어색하게 물어보죠. 그리고 그에게도 마지막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직접 윌라를 죽이지 못해 용병들에게 그녀를 넘깁니다. 그가 즉각 처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윌라에게는 발버둥 치며 저항할 여지가 생기는데, 이때 록조는 이제라도 아빠랑 놀고 싶느냐고 비꼬며 그녀를 거칠게 제압합니다. 이 경직된 질답과 몸싸움으로 이루어진 장면은 만약 윌라가 록조와 한 집에서 살았다면 그 부녀의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해본 결과처럼도 느껴집니다.


윌라의 진짜 아버지가 밥이 아닌 록조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설정입니다. 이를 통해 (가족을 앞세우는) 허울뿐인 가치가 폭로되고 또한 타인 간의 연대가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상술했듯이 밥은 자기 손으로 윌라를 구하는 데 실패합니다. 그렇다고 밥이 무용한 아버지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딸을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 자체가 숭고한 것이니까요. 영화가 끝날 때 두 사람이 더 공고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윌라가 그 길고도 텅 빈 도로에 홀로 남겨졌을 때 정확하게 밥이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밥은 팀을 해치우는 데에는 조금 늦었지만 윌라가 혼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딱 맞게 도달했습니다. 언덕 너머 언덕이 무한할 듯 이어지는 도로가 끝없이 계속되는 싸움에 대한 시각적인 은유라면, 밥은 설령 윌라가 혼자 싸워야 하더라도 계속 그녀 옆에 있어줄 사람일 것입니다. 엔딩에서도, 오클랜드로 떠나는 건 윌라 혼자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언제나 밥이 죽치고 있겠죠.


그리고 윌라를 되찾기 위한 이 싸움이 유의미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건 이 일을 해치움으로써 밥이 비로소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세르지오는 밥에게 차에서 뛰어내리라면서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혁명 이론은 기억 저편으로 흐릿해지고 뚜렷한 직업도 없이 마약에 취해 헤롱거리며 사는 와중에도 언젠가 록조가 쳐들어올 거라는 두려움만큼은 밥에게 선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G 휴대폰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윌라에게도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으려 하며, '믿음의 장치'만큼은 한사코 지니고 외출하도록 고집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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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가지 방향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더 이상 스티븐 록조가 자기네를 잡으러 쳐들어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생처음 구매한 스마트폰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밥의 모습은 '두려움이 없는' 그의 상태를 정확하게 시각화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공포를 해소한 것 역시 밥 자신이 아니라 윌라입니다. 윌라가 팀을 죽인 것은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고 정확한 적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이지만, 동시에 더 이상 자신들을 쫓아오는 사람이 없게끔 확인사살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만약 록조가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이 지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윌라를 용병들에게 맡기고 떠나버린 그는 더 이상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할 테니까요. 또한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클럽에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일 테고, 그렇다면 그로서 밥이나 윌라를 구태여 추적할 필요가 없겠죠. 밥의 두려움을 해소한 주체가 추적자를 없애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자유는, 밥이 더 이상 퍼피디아의 편지를 감추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밥은 윌라가 엄마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감정을 두려움이라고 지칭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이 소동이 윌라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그녀가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히 자각하게 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투쟁에 뛰어들 것인지도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밥은 부녀 사이를 안개 낀 듯 뿌옇게 만들었던 그 모든 거짓말을 걷어버리고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밥의 말대로 '힘든 진실'이 주어졌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밥이 끝까지 윌라를 구하기 위해 뒤쫓아간 이후로, 이 관계는 과거의 망령 따위가 쉽사리 파탄낼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인물 초점은 참 이상합니다. 밥은 명백한 주인공인데도 어느 순간 흐리멍텅해지고 마지막 순간에는 액센트를 윌라에게 넘겨줍니다. 반대로 윌라는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듯 느껴지면서도 록조의 손에 넘겨지기 전까지는 (디안드라를 따라 수녀원에 머물 때까지 꽤 많은 장면이 할애되는데도 불구하고) 밍숭맹숭하게 다루어지고요. 두 인물의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만개하는 것은 퍼피디아의 편지가 등장할 때입니다. 다시 한번, 폴 토마스 앤더슨은 하나의 사건으로 두 캐릭터를 모두 아우르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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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게 썼음에도 이 리뷰는 영화의 반도 채 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네요. 주제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완결된 글을 여러 편 쓸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물 흐르듯 유려하게 한 편의 글에 담는 것은 미숙한 저로서는 도저히 시도해볼 엄두가 나지 않고요. 사실 네 명의 주요 캐릭터, 밥과 윌라, 록조와 퍼피디아는 각자를 독립적으로 다뤄도 될 만큼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죠. 게다가 록조를 다루면서 숀 펜의 연기를 논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겁니다. 생각보다 숀 펜의 대표작들 중 제가 보지 않은 것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록조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일 거라는 확신이 생기더군요.


딱히 평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 작품에 '미친 영화'라는 수사가 붙는 것을 숱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도저히 이 말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네요. 저 역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제일 먼저 '와, 진짜 미친 영화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솔직히 이런 구구절절한 분석 같은 걸 다 내팽개쳐도 이 영화는 그냥 감각 단계에서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밥 먹는 동안 잠깐 보려고 했다가 막상 틀면 끝까지 안 볼 수가 없는 영화들이 있죠. 저한테는 <다크 나이트>나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타짜> 같은 작품이 그렇습니다. 아마 <원 배틀 애프트 어나더>도 추후 이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펜하이머>가 180분을 한 호흡으로 구성함으로써 중간에 끊을 틈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또한 그냥 단숨에 후루룩 지나가버리니까요. 애초에 이 작품을 재미있게 즐기신 분이라면, 162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의식조차 안 되지 않으시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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