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핀처의 미스테리 스릴러 걸작영화 <세븐>(1995)-
1990년대말, 난 영화 <세븐>(1995, 127분)을 케이블 TV에서 처음 보았을 때 졸았다. 당시만 해도 데이비드 핀처란 감독 이름도 처음 들었고 헐리우드식의 상투적인 엽기 스릴러에 별 매력을 못느껴왔던 터라 그 영화로 그런 일종이거니 하며 보다, 졸다, 딴짓하다 스토리도 정확히 파악 못한 채 결국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나중에 평론가들이 그 영화를 자주 언급하고 감독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고도 단지 관점의 차이겠지 하고 여전히 무시하고 있다가, 우연히 <파이트 클럽>(1999)이란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저 그런 헐리우드식 액션 영화 아닌가 생각했는데, 후반의 반전을 통해 전해진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고, 핀처가 보통 감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작 <세븐>을 다시 빌려보게 되었는데, 아니 내가 어떻게 이토록 뛰어난 스릴러 영화를 보고 졸 수 있었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산만한 분위기에서 보느라, 스토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부분 부분만 보았기에 작품의 진가를 몰랐다. 특히 후반의 충격적인 반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난 다시 한번 영화 감상의 필수 요건은 그 스토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복잡한 심리 및 미스테리 스릴러는 스토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보면 그 진가를 놓치기 쉽다.
히치 콕 시대의 스릴러와 달리 현대 스릴러 영화는(물론 걸작 스릴러의 경우) 내레티브가 다소 복잡하고 그 주제가 무거운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세븐>, <원초적 본능>, <양들의 침묵>, <식스 센스>같은 영화들은 내레티브를 이해하지 못한 채 보면 재미가 반감된다. 그렇다고 그런 영화들이 어렵다는 건 아니다. 대부분 상업적인 대성공을 거둔 영화이다. 관객들은 스토리를 정확히 다 파악 못한다 해도 그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영화적인 볼거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그 영화를 비디오로도 다시 봤는데, 재미있는 것은 케이블 TV와 번역 자막이 틀리다는 것이었다. 오리지날 대사를 각자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도 있고 비디오에선 자막에 나오는 내용이 케이블에선 나오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종종 어느 한쪽이 중요한 대사를 빼먹고 번역하거나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살인마의 집을 수색하고 있던 밀즈 형사가 그 살인마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때 살인마 존 도우는 ‘살인 계획을 변경해서, 이후 희생자에 경찰을 한 사람 포함시키겠다’고 말하는데, 케이블 TV판에선 ‘경찰을 한 사람 포함시킨다’는 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 대사는 라스트 씬을 위한 중요한 복선 역할을 하는 중요한 대사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원문 대사를 확인해 볼려고 인터넷을 통해서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찾아서 보니, 그것은 영화를 찍기 이전의 시나리오라서 영화 그 자체와 다소 달랐다. (가령 원래 대본에는 난장이처럼 묘하게 생긴 여자 감식반원이 사건 현장마다 등장해서 걸핏하면 섬머셋과 밀즈 형사에게 욕을 해대는데, 이 부분은 전면 삭제되었다 한다.) 그러기에 좀더 정확히 <세븐>을 감상하려면 비디오로 케이블 TV로 더빙한 TV영화로 다양하게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영어를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어학실력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세븐>은 보면 볼수록 대단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스릴러로서의 대본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현대 사회에 대한 매서운 풍자가 담긴 주제의식과 살인마의 독창적인 캐릭터, 그리고 예기치 못한 뛰어난 반전으로 스릴러 영화의 격을 높였다. (참고로 이 영화는 imdb 8.6이라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고, 3,300만 달러로 제작해 3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결국 평론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세븐>은 앤드류 캐빈 워커라는 작가가 미국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1955년도에 실제로 있었던(하지만 미 해결된) ‘별자리 살인(Zodiac Killer)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시나리오라고 한다. 앤드류 케빈 워커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을 마치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나가면서 시나리오 집필에 매달리다 타워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일하던 3년 동안 밤마다 시립도서관을 찾아 자료조사와 집필을 반복하는 주경야독을 해서 <세븐>을 완성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그는 비록 작가 크레디트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핀처의 차기작들인 <게임>(1997)과 <파이트클럽>(1999)의 시나리오작업에 모두 참여한 바 있고, 조엘 슈마허의 <8미리>(1999)와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1999)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18살 때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제국의 역습>(1980)을 보고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다는 데이비드 핀처(1963년생) 감독은 나중에 루카스 밑에서 특수 촬영을 공부하다 CF와 뮤직 비디오 연출을 거쳐 유명세를 얻은 후, 서른 살에 <에일리언 3편>(1992년)으로 데뷔한 신세대 감독이다. 그는 <세븐>(1995년)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진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후에 <게임>(1997)과 <파이트 클럽>(1999)을 만들었다. 비록 <세븐>보다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여전히 핀처 나름의 시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볼만하다.
그가 만든 <세븐>은 개봉 당시 미국에서 4주간 1위, 미국 내에서만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한 영화로, 편집을 맡은 리처드 프랜시스 브루스가 이 영화로 1995년 아카데미 편집상 후보에 올랐었다. <양들의 침묵>처럼 아카데미 작품상은 못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영화인 것만은 사실이다.
영화역사 초기부터 연쇄 살인마를 다룬 영화는 항상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였다. 처음엔 단지 엽기적인 이야기로 단지 상업적인 장르의 틀 내에서만 머물던 살인마들 이야기는 프리츠 랑과 히치 콕 등과 같은 스릴러 대가들 덕분에 그러한 소재야말로 인간의 숨겨진 본성을 적나라하게 해부할 수 있고, 사회 제도를 날카롭게 풍자하기 좋은 소재로 등장하였다.
왜 사람들은 잔인하고 끔찍한 그런 살인마들 이야기를 재미있어 할까? 프로이드 식으로 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 깊은 의식 저변에 그런 살인 본능이 자리하고 있는데 도덕이나 윤리에 억눌려 있기에 실제로는 드러나지도 않고 행동화하지 못하지만, 그런 살인마 영화를 통해 간접적인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아뭏튼 살인마 이야기를 통한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미스테리적인 간접 경험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세븐>은 엽기적인 연쇄 살인을 통한 잔인성,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의 미스테리, 그리고 범인이 밝혀지고 난 후 범인과 두 형사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라스트의 예기치 못한 반전 등으로 최상의 재미를 준다.
<세븐>의 컨셉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서에 나오는 일곱 가지 죄악을 근거로 마치 천지창조의 스케줄을 모방하듯,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명씩 잔인하게 살인 행각을 벌이는 희대의 연쇄 살인범과, 그 죽음의 심판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두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다. 그 영화가 기존의 상식적인 미스테리 스릴러와 차별화 되는 가장 큰 장점은 캐릭터와 반전, 그리고 주제의식이다.
먼저 이 영화는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이 영화에선 은퇴를 앞둔 섬머셋 형사, 새로 들어온 밀즈 형사, 그의 아내 트레이시, 그리고 연쇄살인범인 존 도우, 이 네 사람이 대부분의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그 중에 가장 잘 그려진 캐릭터는 대부분의 걸작 스릴러가 그렇듯이 살인마 존 도우다. 그는 비록 후반부에서만 등장하지만 전반부에서 그가 저지르는 엽기 살인들로 인해 이미 상상으로 각인 되어온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의 캐릭터는 스토리는 처음부터 이끌어 온 형사 섬머셋과 밀즈 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새롭다.
미국에서 John Doe란 일종의 법률/경찰 용어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인물을 의미 한다. 특히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체에는 영락없이 "John Doe #1," "John Doe #2"라는 꼬리표가 붙는데, 남자는 John Doe, 여자는 Jane Doe로 표기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존 도우는 범인이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세븐>에서는 범인이 스스로 ‘존 도우’라는 가명을 쓴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분명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존 도우를 찾아서, Meet Jhon Doe>(1942년)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영화에서 ‘존 도우’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평범한 소시민인 주인공의 이름이고, 결국 그 소시민 존 도우가 소외계층과 사회제도에 불만을 가진 계층들을 대변하는 영웅이 되었다가 결국엔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간다. <세븐>에서 살인마 존 도우도 평범한 소시민을 대신해 7대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 자신도 희생양이 됨으로써 병든 세상에 일종의 교훈을 주고자 한다는 것을 나중에 스스로 밝힌다.
그는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처럼 수사관들을 가지고 놀 정도로 지적으로 우수하고 머리가 비상하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노트로 정리한 것이 수백 권이 될 정도로 자신의 살인 철학을 위해 고심하고, 참고자료로 수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렉터 박사가 사람을 죽이고 먹는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존 도우의 살인 이유는 분명하다. 우발적이거나 정신병적인 살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되어 이뤄진다. 그리고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오히려 당당한 합리화를 통해 마치 게임을 하듯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살인 행위를 한다. 비록 그 철학이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 극단적이고 궤변적인 면이 있을지라도 그 나름의 이유는 최소한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 자신까지도 희생자중 하나로 넣고 결국엔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서 자신의 철학을 몸으로 완성시킨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본능대로 병적인 살인을 해내는 기존의 연쇄 살인마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십자가를 지고 죽어간 예수처럼 생각하는 그런 철학적인 살인마이다. 그 정도 논리를 만들어 낼 정도로 뛰어난 두뇌이기에 살인도 치밀하게 해냈을 것이다.어쨌든 그는 잡혀서 자신의 논리에 대한 세속적인 재판도 받지 않고 순교자처럼 죽어간다. 그 자신이 아무리 합리화해도 일반적인 시각에선 그는 잔인 무도한 살인마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그의 연쇄살인 행위는 현대 사회의 죄악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한다. 감독 역시 그런 의도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존 도우는 은연중에 실존주의를 자신의 행위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엽기적인 방식으로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2000여권의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두었는데, 그 노트의 메모 중엔 ‘우리 모두 미쳐있고 사회는 병들어 있다. 우습고 기막힌 세상이다. 사랑도 없고 존재의 무기력함만 있을 뿐이다. 우린 버림받았다.’ ‘오늘 전철 안에서 한 남자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 사내는 건강에 관해서 작게 소곤 거리듯 말했다. 참으려 했지만 그의 진부한 얘기에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구토를 일으켰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등과 같은 글이 있다. 그런 내용은 마치 철학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형상화된 <구토>란 소설을 생각나게 한다. 그 소설은 로칼탱이라는 주인공이 한 도시에 머물며 바닷가 해변을 산책하던 중, 조약돌 하나를 주워 보면서 심리적 구토 증세를 느끼면서 자아에 대해 성찰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실존이란 ‘살아 있는 나’, ‘살아가고 있는 나’라고 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순간을 인식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리고 변화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할 때, 살인마 존 도우는 보기에 따라선 극단적인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항상 자신이 죽인 대상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대부분의 엽기 스릴러 영화들은 살인마가 살인을 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관객들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일반적인 영화와 달리 연쇄 살인마 존 도우가 막상 살인행위를 벌이는 구체적인 장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은 그가 살인한 이후 결과만 형사들의 시선을 통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형사들은 이미 벌어지고 난 살해 현장만을 찾아가지만 범인의 단서를 하나도 못찾고 단지 이후 벌어진 사건을 예상할 수 있는 단서 정도만 발견할 뿐이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살인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밀즈 형사가 살인마 존 도우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 장면뿐이다. 그로 인해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존 도우가 엽기적인 살인마임에도 그에게 동정적인(공감 어린) 시각을 약간 가지게 된다. 그걸로 봐서 이 영화는 감독이 살인마 존 도우의 입장에 어느 정도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의 살인 방식은 한마디로 엽기적이다. 그는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서사시’나 단테의 <신곡>등에 나오는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일곱 가지 죄악’인 탐식, 탐욕, 나태, 정욕, 교만, 시기, 분노 등과 같은 죄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골라 살해해 가는데, 단순하게 죽이는 게 아니라 비만한 남자는 억지로 먹여서(탐식), 탐욕스런 변호사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처럼 스스로 자기 허리살을 자르도록 해서(탐욕), 게으른 자는 오래도록 천천히 침대에 눕혀서 죽이고(나태), 난잡한 창녀는 날카로운 인공 성기를 이용해 국부를 찔러대서(정욕), 미모를 지닌 여인은 코를 잘라서(자만), 임신중인 형사의 아내는 머리를 잘라서(시기) 죽인다.
또한 그는 경찰과 게임 하듯이 살인하기 전에 항상 의도적으로 단서를 흘린다. 탐식한 자를 죽이고 그의 위 속에서 바닥장판 알미늄을 발견케 하여 형사로 하여금 냉장고 뒤에 쓰여진 글을 볼 수 있도록 한 뒤 밀턴의 <실락원>에서 인용한 글귀 ‘광명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니라’라는 메모지를 통해 이후 살인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탐욕스런 변호사를 죽이고 나서 거꾸로 된 액자 뒤에서 다음 희생자의 지문을 발견하도록 한다거나 자기 집에 침입해 수색하는 밀즈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희생자는 경찰이 포함되어 있다고 예고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살인에는 항상 사전에 단서가 주어지지만 경찰들은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하고 뒷북만 칠 뿐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마지막 희생자로 설정한 것도 사실 사전에 암시가 된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자신의 머리를 들고 서있는 죄인’의 모습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밀즈나 섬머셋 형사는 그런 그림을 보고도 결코 그 의미를 사전에 눈치채지 못한다.
5년간 경찰 생활을 하며 순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업무만 맡아오던 그는, 새로운 도시로 전입해 오면서 강력반으로 자원해 살인사건을 전담하는 형사가 된다.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오직 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소홀해져 임신한 사실도 알지 못한다.
베테랑 형사인 섬머셋과 한 조가 되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부딪히지만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나중에 살인마 존 도우의 타켓이 되어 아내를 잃게 되고, 그 자신은 살인마의 마지막 살인계획을 대리하는 자가 되고 만다. 아이가 없는 대신 집안에 개들을 키우고, 넥타이는 항상 미리 메어놓은 것만 찬다.
내레티브를 이끌어가는 중심 축 역할을 하면서 밀즈와 트레이시, 그리고 존 도우 캐릭터를 드러낸다. 그는 중년의 베테랑 강력계 형사로 아직도 독신으로 살고 있지만 항상 깔끔하게 생활한다. 범죄와 무관심으로 가득 찬 세상이 겁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생각을 못한다. 노련한 형사이고 삶의 깊이를 느낀 듯 하지만, 한편으론 겁쟁이인 셈이다. 그래서 은퇴 후, 살인과 범죄가 난무하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도피하듯 시골로 가서 살려고 계획하지만 퇴직 7일을 남겨놓고 연쇄살인범 존 도우 사건을 만나 다시 도시에 머무를 결심을 한다. 침착하며 절대 헛점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완벽주의 적인 면이 있다. 때론 적당한 불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최대한 원칙을 지키며 수사를 하려고 애쓴다. 냉소적이지만 내면엔 따뜻함이 있다. 그래서 그는 밀즈의 아내 트레이시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 나름대로 충고를 해준다.
미스테리 스릴러의 압권은 역시 반전이다. 특히 <세븐>의 라스트 대 반전은 존 도우라는 캐릭터 못지 않게 뛰어나다. 본격적인 반전은 시작은 살인마 존 도우가 단테의 <신곡>등의 책에 나온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7가지 죄악’을 저지른 자들을 한 사람씩 골라 처단해 가다가 마지막 ‘시기’와 ‘분노’라는 두가지 죄악을 저지른 살인 대상을 남겨놓고 갑자기 자수를 해버리는데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범죄 스릴러 영화에선 범인이 마지막에 밝혀지거나 결국엔 잡히는 데서 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중반까진 과연 그 엽기적이고 색다른 살인마는 누구일까 하는 식으로 미스테리를 강조하다가 그게 지겨워질 시점에서 예상 밖으로 살인마가 스스로 자수해 온다. 그리고 나머지 두 희생자를 보여주겠다며 두 형사를 데리고 사막으로 가면서 ‘서스펜스스릴러’를 강조한다. 물론 거기엔 존 도우가 왜 두 희생자를 보여주기 위해 두 형사만을 사막으로 데려가는 걸까 하는 미스테리도 계속 동반된다.
사실 영화 후반 95분경, 존 도우가 자수하기 전까지는 주로 엽기적인 살인 그 자체와 살인마에 대한 궁금증 만으로 관객을 붙들어 놓았기에 보기에 따라선 다소 지루해 질 수 있었다. 그런 정도는 이미 기존의 범죄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븐>의 진수와 기존 범죄 영화와 결정적인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영화적인 재미는 존 도우가 예기치 않게 자수하는 시점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왜 그가 갑자기 자수를 생각했을까? 그리고 나머지 두 희생자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주였다는 건가? 사막에서 그 살인마는 어떻게 행동하려는 걸까? 지금까지 경찰을 농락하듯이 완벽한 살인을 해온 뛰어난 두뇌의 살인자이기에 관객과 두 형사(밀즈와 섬머셋)은 이후 벌어질 상황에 대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미리 벌어질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 영화에선 복선을 통해 부분적인 예측을 할 수 있게 해놓았을 텐데... 반전이란 관객들의 예상을 뒤집으면서도 그럴듯한 상황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반전이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더라도 그것이 설득력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반전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대 반전은 사막에서 존도우가 이미 죽인 밀즈의 아내의 목이 배달되게 하고, 밀즈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해 자신을 7대 죄악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만들어 스스로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일어난다. 결국 범인인 존 도우 그 자신이 ‘시기’의 죄인이 되고, 형사인 밀즈가 ‘분노’의 죄인이 된 셈이다. 이 반전 상황을 위해 작가는 신중하게도 ‘극적인 아이러니’를 이용하고 있다. 즉 7가지 죄악을 바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 범죄를 수사하던 형사가 그 연쇄살인의 마지막 살인을 직접 하게 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형사가 범죄자가 되고, 살인마가 순교자가 되어버리는 역전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밀즈 형사는 아내를 잃은 희생자이자 동시에 마지막 7대 죄악을 이용한 범죄를 완성하는 살인자가 되고 만다.
그 상황 덕분에 살인마 존 도우와 밀즈 형사 캐릭터가 동시에 더욱 강화된다. 존 도우가 끝까지 그저 다른 대상을 통해 7가지 죄악을 이용한 살인을 하다 잡혔다면 그야말로 평범한 범죄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극적인 반전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복선이 동반된다. 복선이 없는 반전이란 억지일 뿐이다. 영화를 섬세하게 볼 줄 아는 극소수의 사람이라면 사막에서의 대 반전이 오기 직전 그 동안 주어진 단서들의 조합을 통해 다가 올 대략의 상황(대 반전)을 유추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작가 입장에선 시나리오를 쓸 때, 라스트 대 반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역으로 앞부분을 하나씩 복선을 깔면서 상황을 만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작가는 적어도 황당한 반전이 안되도록 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득력 있는 단서들을 여기저기 배치해 놓을 것이다.
라스트 반전에서 섬머셋 형사는 자동차 운전수가 배달해온 소포에서 트레이시의 목을 발견하고 존 도우가 그녀를 죽이고 밀즈로 하여금 분노를 이끌어 내려 한 것을 알게 된다. 그 상황을 위해선 섬머셋이 밀즈의 아내 트레이시의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 트레이시가 섬머셋을 집으로 초대하는 상황이 없었다면 서로가 얼굴도 모를 것이고, 섬머셋은 그 소포 속의 목이 밀즈의 아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섬머셋과 트레이시가 사전에 서로 익숙하게 알 수 있도록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물론 섬머셋이 밀즈의 집에 초대되는 상황은 여러 가지 극적 효과를 동반한다. 화목한 부부 관계를 통해 나중에 존 도우가 시기하도록 하고, 섬머셋 자신이 밀즈와 점점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밀즈 형사의 아내 트레이시는 반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중반까지만 해도 왜 그녀가 이 연쇄살인 사건 중간 중간에 꼭 나와야 하는지 다소 의아스럽게 한다. 그때까진 사실 밀즈의 캐릭터를 다소 강화시켜주고, 그녀로 인해 범죄로 가득 찬 도시 생활의 불안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를 앞에서 조금씩 보여주곤 하는 건(특히 바쁜 밀즈로 인해 외롭게 방치된 그녀의 모습을) 다 라스트 씬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반전이 일어난 후에야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섬머셋이 집으로 초대된 날 밤, 두 형사가 잠든 트레이시를 방치해 놓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 후, 침대에서 깨어난 그녀가 텅 빈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남편과 섬머셋이 안보이자 불안해하는 씬은 나중에 일어날 존 도우의 침입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그녀만의 단독 씬을 보여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존 도우는 밀즈가 범인을 잡으려고 가정(아내)에 소홀한 빈 틈을 놓치지 않고 활용한 것이다.
트레이시와 관련한 복선은 또 있다. 라스트 반전에서 밀즈는 존 도우의 고백을 통해 트레이시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되고 그것은 밀즈의 분노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분노로 인해 결국 존 도우와의 게임에서 지게 되는데, 그 상황을 위한 복선으로 작가는 트레이시가 남편 밀즈 몰래 섬머셋을 만나 임신 이야기를 하도록 만든다. 두렵지만 아이를 원하는 트레이시가 임신 사실을 남편에게 차마 고백 못하고 있는 심정을 카페 씬에서 보여주는데, 라스트 오기 전까지 그녀가 남편에게 그 고민을 상의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아직 그녀의 임신 관련한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결국 반전에서 밀즈가 존 도우의 입을 통해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전해 듣게 되는 것이다.
살인마 존 도우의 아파트를 수색하는 도중 밀즈 형사는 현상되어 있는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는데, 살인자는 줄곧 앞선 살인에서 희생자의 사진을 남겼었다. 이는 앞으로 밀즈가 존의 또다른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해준다. 비록 그가 그의 부인이 죽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희생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존 도우가 자기 집을 수색하는 밀즈에게 전화를 걸어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겠어. 이후 대상에는 경찰을 한 명 포함시킬 생각이야‘라고 하는 데서 밀즈가 희생자중 하나임을 암시한다. 그가 섬머셋이 아닌 밀즈를 대상으로 포함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존 도우가 밀즈를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있었음에도 살려주는 씬에서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밀즈와 게임을 하고싶다는 의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경찰에게 자수하러 온 존 도우의 손에서 두 가지의 혈액이 발견된다. 하나는 '교만'의 희생자라는 게 밝혀지지만 다른 하나는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존은 두 구의 시체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는 자수하기 직전에 살해한 희생자의 피 일 수 있다. 이전에 존 도우가 경찰 중 하나를 희생자로 만들겠다는 경고로 보아 시체 중 하나는 밀즈와 섬머셋 중 하나인데, 본인들이 아니라면 타켓은 가족이 없는 섬머셋이 아닌 밀즈의 아내 트레이시 밖에 없다. 그 피와 관련된 좀 더 강한 복선은 밀즈와 섬머셋이 존 도우가 요구한 대로 두 시체가 있는 장소로 따라가기 직전에 세면장에서 면도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때 밀즈는 섬머셋에게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아내가 의심하겠죠?’라고 한 뒤 뭔가를 더 말 할려다 만다. 결국 사막에서 그는 존 도우의 손에 묻은 제 3자의 피가 바로 자신의 아내였음을 알게 된다. 그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아내를 살해한 직후 피묻은 손 그대로 자수를 한 것이다.
두 형사는 존 도우가 보았던 책들을 보는데 그 중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자신의 머리를 들고 서있는 죄인’의 그림이 인서트 되어 보여진다. 그것은 존 도우가 자신을 스스로 희생양으로 삼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밀즈는 결국 7가지 죄악중 하나인 ‘분노’로 인해 존 도우를 죽이게 되는데, 그것은 철저히 존 도우의 계산에 의한 것이다. 존 도우 자신이 순교자가 되고 밀즈를 마지막 살인자로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은 그를 마지막에 ‘분노’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의 성격이 섬머셋처럼 침착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밀즈의 성격을 혈기 넘치고 흥분 잘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존 도우가 사진 기자로 변장해 사진을 찍을 때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내게 해서 밀즈의 급한 성격을 드러난다. 그 씬은 중요한 복선이기도 한데, 밀즈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씬이자 존 도우가 그의 급한 성격을 이용하게 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씬 이후 존 도우는 밀즈에게 계획을 바꿔 경찰을 한 명 희생 대상에 넣겠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밀즈는 급한 성격 때문에 결국 라스트 씬에서 결국 아내를 죽인 존 도우를 죽이면 자신이 게임에서 질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를 사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마지막 두 희생자가 있다는 사막으로 가는 차 안에서 존 도우와 밀즈는 논쟁하듯 대화를 하게 되는데, 그때 존은 계속 밀즈를 흥분하게 만들고, 섬머셋이 그들을 죽이면서 쾌감을 느꼈다면 그건 진정한 순교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존은 되려 밀즈에게 이런 상황이 그와 흡사하지 않느냐는 말로 밀즈가 자신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복선을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 스토리를 끌고 가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일곱(7)’이라는 숫자이다. 대개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제목으로 사용되곤 하듯이 이 영화도 그래서 <세븐>이라는 제목이 나왔다. 세븐(7)은 중세기의 카톨릭 적인 관점에서 나온 ‘인간을 파멸시키는 일곱가지 죄악’을 가리키고, 범인 존 도우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 외에 7이란 숫자는 섬머셋의 마지막 남은 일주일을 가리키기도 하고, 성서에 천지창조의 일주일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6일 동안 계속 비가 내린다. 일종의 ‘환경의 모티프’인 비는 음울하고 어두운 살인 사건의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비는 마지막 7일째 가서야 멈추고 맑은 날이지만 그날 사막에서 가장 끔찍한 살인이 일어난다.
범인은 항상 자신이 죽인 대상들을 다큐멘타리처럼 흑백사진으로 찍어 직접 집에서 현상하고 남긴다. 영화 중반에 사진 기자로 가장에 밀즈를 사진으로 찍어 중요한 복선을 남기기도 하고, 나중에 밀즈는 그의 집에서 발견된 자신의 사진을 보고 비로소 살인범을 눈앞에서 눟쳤음을 알게 된다. 욕정의 희생자 창녀는 사진을 단서로 찾게 되고, 두 형사는 존 도우의 집에 남겨진 희생자 사진의 기록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그들을 다루었나를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도입부는 부인이 아내를 살해한 한 불행한 가정에 섬머셋이 수사하러 간 데서부터 시작된다. 존 도우는 밀즈 부부의 행복한 가정을 시기하여 트레이시를 살해한다. 섬머셋은 가정을 갖고 싶어도 범죄로 가득 찬 도시가 두려워 결혼도 않고 아이도 갖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현장에서 아이가 그 장면을 목격 했을까에 관심을 갖는다. 밀즈는 참한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일 때문에 그녀에게 무관심함으로써 임신 사실도 모르게 되고, 나중에 살인마 존 도우의 범행 타켓이 되고 만다. 범죄와 죄악이 들끓는 도시에서 행복한 가정을 쉽게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영화에선 두 형사가 사건 현장에 가기 전에 넥타이를 매는 장면을 자주 보여진다. 섬머셋은 직접 손으로 매고, 밀즈는 항상 이미 매어진 넥타이를(아내가 매준 것인가?) 목에 건 뒤 잡아당기기만 해서 맨다.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작은 모티프이다.
섬머셋이 침대 머리맡에 놓여진 똑딱거리는 매트로놈은 그의 깔끔하면서도 자로 잰 듯한 생활을 상징한다. 나중에 퇴직 날짜만 기다리며 살인 사건에 소극적이던 섬머셋은 밀즈와 범죄와 죄악이 판치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문제로 논쟁하다 스스로 매크로놈을 깨버리고 연쇄살인사건 수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7가지 죄악’을 비롯해 범인이 연쇄살인에 대한 철학적 근거가 되는 책들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소도구 모티프이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단테의 <신곡>, 밀톤의 <실낙원>,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그리고 존 도우가 직접 기록한 2000권의 노트도 거기에 속한다.
이 영화의 어둡고 칙칙한 누와르 적인 분위기는 일종의 시각적인 모티프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상은 <델리카트슨>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쥐(Darius Khondji)의 덕분에 빛이 났다. <세븐>은 핀처와 콘쥐 두 사람이 완성해낸 비주얼하고 실험적인 이미지의 엽기 누와르이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황무지로 공간 이동을 하기까지 영화 내내 지배하는 것은 이름 모를 도시의 어둡고 음습한 공간이다. 감독인 데이비드 핀처는 자신의 특기 분야인 CF적 감각을 이용해서 시종일관 어두운 실내와 밤을 배경으로 해서 영화를 어둡게 만들며 독특한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특히 옵티칼 필름을 이용하여 ENR촬영(콘트라스트 증가 기법)으로 영화의 암울함을 더욱 돋보이게 강조했다. 처음 시작 장면부터 영화의 암울함은 더하기 위해 자연광을 배제한 조명으로 일관하고 연쇄살인범의 행각은 보여주지 않아도 살인 후 현장의 분위기만으로도 그 잔혹함을 관객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든다.
그밖에 시종일관 비가 내리는 어두컴컴한 화면은 세기말의 묵시록적 공포를 전달하고 있으며 브래드 피트가 살인범을 쫓아가는 씬에서의 카메라 동작은 마치 데이비드 핀처 자신의 첫 영화인 <에이리언3>에서 에이리언을 뒤에서 쫓아가던 카메라의 움직임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예상 밖의 충격적인 반전까지, 호러 스릴러물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번에는 연쇄살인극에 관한 추적극을 만들면서 명백히 리들리 스콧트의 <블레이드 러너>를 염두에 둔 스타일과 여전히 특수 필름을 사용한 어둠침침한 화면 속에서 90년대의 느와르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였다.
핀처 감독은 10대 시절에 이미 에니메이션 컴퍼니 로딩 카메라에 입사하여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18살에 조지 루카스가 이끄는 ILM으로 옮겨 4년 동안 그곳에서 영화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미래의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많은 비전들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그의 ILM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영화의 SFX특수효과에 대한 많은 관심을 이끌어지게 하였다. 특히 그는 <스타 워즈-제다이의 귀환>(1983)에서 미니어처와 시각 효과 부문의 촬영 조감독을 했으며. 조지 루카스가 기획한 텔리비전 연속물 (영 인디아나 존스)에 서 매트 특수촬영반을 담당했다. <세븐>은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미술을 맡은 Arthur Max, 의상 디자이너 Michael Kaplan, 촬영의 다리우스 콘쥐는 인위적으로 색상과 조명을 조작함으로써 효과를 냈는데, 세트는 주로 낡고 오래 됐으며 고장난 "목재 가구"만 사용했다고 한다.
(이 글은 2001년에 작성한 것을 약간 수정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