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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놀 이종원 Sep 17. 2016

12만 명의 혼령이 묻어 있는
교토 코무덤

일본 교토 코무덤

일본 교토에 가면 반드시 코무덤을 찾으라. 조선인 12만 6천 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한의 현장이다.  그 귀무덤 놓인 자리는 바로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가 놓인 곳에서 100미터 떨어져 있다. 전범은 신이 되어 추앙을 받고 있고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들은 몸뚱이는 고국에 둔 채 달랑 코만 현해탄을 건너 이 곳에 묻혔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먹먹해 한동안 마음을 진정해야만 했다. 

 

 


코무덤

이총(耳塚) 즉 귀무덤은 놀이터 앞에 방치되어 있다. 이 작은 묘역에 조선인 12만 6천 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고 하는데 말이 귀무덤이지 실은 코가 대부분이었다. 에도 시대 유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은 야만스럽고  잔인하기에 '귀무덤'으로 부르자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름을 바뀐 것이다.  마치 귀 잘린 고호를 생각하면 덜 잔인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이 자리에 소금에 절인 코가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몸뚱아리도 없이 코만 달랑 이 낯선 땅에 와서 구천을 헤매었을 영혼들을 생각하니 그저 목이 멘다.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켜 14만 대군이 조선땅을 다시 침탈한다. 이때  도요토미는 전과 보고용으로 조선 귀가 아닌 사람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보내라는 지령을 보낸다. 상부 명령을 받은 가토는 병사들에게 1인당 3개의 코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그때부터 전과에 눈이 먼 왜놈들은 조선의 병사뿐 아니라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코와 귀를 잘랐으니 그 절규는 삼천리를 흔들었고 강토는 피로 물들었을 게다. 병사보다 민간인의 숫자가 더 많았단다. 왜놈들이 잔인할수록 농민들은 저항의 기치를 높였다.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소금과 석회, 식초에 절인 코와 귀는 항아리에 담겨 오사카로 배로 실려 보냈고 다시 육로로 교토까지 오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코의 개수를 확인하고 무사들에게 상을 내렸으니 양민 살육을 많이 할수록 큰 상을 받은 것이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코와 귀를 담은 항아리가 무려 1,000여 개나 되었다고 하니 전쟁의 참혹함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도요토미는 종전 1년 전쯤 그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이 곳에 코무덤을 조성했다. 육중한 돌을 얹어 놓았다. 얼마 후 그도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아무래도 귀천을 떠돌았던 12만 혼령들이 도요토미에게 복수를 하지 않았나 싶다. 치욕의 현장이자 참혹한 상징물인 코무덤이 아직도 교토시 한복판 그것도 도요토미 신사 앞에 있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사천 선진리성의 이총

사천군 용현면에 가면 임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인 선진리 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이총, 즉 귀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왜  귀무덤인지 난 이해를 못하겠다. 정확하게  코무덤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  삼중스님이 교토 코무덤 봉본에서 채취한 일부 흙을 항아리에 담이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나머지 봉토도 전부 가져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의 한을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보통 위령탑이라면 봉분 앞에 세워야 하는데 봉분 꼭대기에 올려놓은 것은 조선의 기를 누른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귀가 아픈 환자들이 귓병을 낫게 해준다는 민간신앙처로 전락했다고 하니 분통이 터질 노릇.

 

 


원래 '귀무덤'이란 안내판이 있었는데 교토시에서 괄호를 열고 귀무덤(코무덤)으로 바꿨다고 한다.  

한글로 된 안내판을 보면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 왜는 조선 의병의 힘을 간과한 것이다. 일본은 적장이 죽으면 졸개들은 사기를 잃고 도망가지만, 조선의 장수를 쉽게 쓰러뜨릴 수 있지만 졸개는 굴하지 않을뿐더러 농민, 승려들의 불같은 항쟁은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귀무덤 앞에 이총놀이터. 귀무덤은 놀이터 부근에 방치되고 있다.


귀무덤을 가려면 교토박물관을 지나야 한다.  도쿄박물관, 나라박물관과 더불어 일본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입구 붉은색 벽돌이 유난히 눈에 띈다. 서양의 궁전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에도 시대의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복잡한 교토에서 조용하게  고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특히 한국 관련 불상과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교토 국립박물관 뒤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패를 모신 토요쿠니(豊國) 신사다.


1599년 8월 도요토미가 임란 실패로 인한 화병으로 사망하자 7년 전쟁은 종결을 고한다. 그의 시신은 호코지 근처 산자락에 묘소를 조성했기에 이곳에 신사가 들어선 이유다. 원래 '풍국대명신'으로 추앙받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자 도요토미 일가가 멸족을 당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1868년 메이지 천왕은 토요토미는 정권 장악시 막부를 열지 않았기에 이는 천왕을 받들줄 아는 공신이라 여겨 신사를 재건했다고 한다. 

  


 토요토미가 전쟁때 사용했던 표식인데 지금은 행운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되어 일본인들이 소원을 적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풍국대명신이 되어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토요토미 가문 멸문의 원인이 되는 종 


토요토미에게는 56세 낳은 아들 히데요리가 있었다.토요토미가 눈을 감기 전 5명의 측근들에게 6살 아이 히데요리를 부탁한다. 측근 중에 하나이자 야심가였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자 토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킬 흉계를 짠다. 히데요리에게 아버지의 묘를 지켰던 절인 호코지 절 재건을 제의했다. 사찰을 재건하면서 전국의 다이묘들을 다시 모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히데요리는 쾌히 승낙한다. 그러나 토쿠가와는 이는 히데요리의 재산 탕진의 목적도 가지고 있다.  재건한 호코지의 종에 새겨진 글자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 결국 멸문을 시켜 버린다. 

 


國家安康 君臣豊樂, 즉 '국가의 안녕과 군신의 평안을 기원한다'라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토쿠가와는 학자를 동원해 얼토당치않는 해석을 내린다. 家과 康 사이에 글자를 넣은 것은 도쿠가와 가문의 분열을 의미하며, 臣豊은 거꾸로 새겨 넣은 것은 모반을 일으킨다고 해석해 히데요리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결국 오사카 성에서 항전하다가 자결하면서 토요토미 가문은 멸족을 당하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략의 죄과를 자식들이 받은 것은 아닐까 싶다. 

  


자민당 아베 총리가 선거 포스트가 보인다. 독도에 대한 야심, 야스쿠니 신사참배, 위안부 부정, 군국주의 부활 등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잔영이 보인다. 


"역사를 잊으면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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