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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놀 이종원 Sep 18. 2016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다.

중국 대련 뤼순감옥



안의사의 순레의 길, 만주 철도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5미터 거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을 쐈다. 그는 탈출할 수 있음에도 러시안 헌병에게 총구를 거꾸로 한채 반납한 뒤 체포되었다. 그가 도망가지 않았던 과연 이유가 뭘까? 


바로 재판 과정 속에서 이토의 죄악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뜻이 숨어 있었다. 오전 9시 30분 거사를 마친 후 러시아 헌병대에 끌려갔고 8시 무렵 일본 측의 요구로 안중근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된다. 10월 30일 1차 신문을 받고. 11월 1일 오전 11시 헌병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하얼빈역을 출발해 대련을 거쳐 뤼순 감옥까지 가게 된다.


왜 거사가 이루어졌던 하얼빈이나 일본에서 재판을 하지 않고 하얼빈에서 1,000km가 넘는 뤼순으로 갔을까? 하얼빈은 러시안 관할지이기에 자칫 재판 과정상 외교문제를 초래할 수 있고 당시 일본 본토에는 파렴치범은 사형에 처하지만 사상범은 사형을 주지 않은 풍조가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에게 권리가 넘겨진 뤼순 법정에 서게 한 이유는 순전히 안중근에게 사형 구형을 위함이었다. 


11월 1일 출발해서 11월 2일 장춘에 도착해 헌병 소에서 1박을 한 뒤 다음날 뤼순감옥에 갇히게 된다. 

내가 탄 기차는 연길을 거쳐 장춘-선양-대련까지 간다. 장춘-선양-대련까지 이어진 기찻길은 바로 안의사가 뤼순 감옥으로 압송된 철로다.  100년 후 내가 그 길 위에 섰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안의사의 순국 현장인 뤼순 감옥

뤼순감옥. 칙칙한 회색이 을씨년스럽다. 입구에는 '여순 일본, 러시아 엣 감옥'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22만 평방미터로 동북지방 감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700여 명의 항일 지사들이 감금당하고 처형당한 곳이다. 


이곳은 자유관람이 아니라  09:00~15:00까지 30분에 한 번씩 인솔자를 따라가야 한다. 감옥-병원-사형장-안중근 의사 기념관-안중근 감옥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장료가 비싼 중국이지만 731부대, 하얼빈 박물관 등 교육 시설은 입장료가 없다. 


러시아 건물에 일본이 증축했음을 말해주듯 러시아가 지었던 건물 부분은 갈색, 일본이 증축했던 곳은 붉은색 벽돌이다.

동쪽 87칸 감방에는 주로 애국지사 등 정치범이 수감되었고 3층 감방은 독방으로 사형이 확정되었거나 판결을 기다리는 미결수들의 수감 장소다. 

  

 

감옥 내부에 들어서면 검신실이 나온다. 부역할 때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곳을 통과해 검문을 받았다. 먼저 옷을 모두 벗고  검사를 받고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엄동설한도 에외가 아니다. 잡범은 푸른 옷, 사상범은 붉은색 수의를 입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붉은 옷을 입었겠지. 

 

감방은 11미터 제곱. 이곳에 8명씩 수감되었는데 보통 10명이 넘어 제대로 눕지도 못했다고 한다. 식수통, 변기통, 식기들이 보였고 냉기가 도는 마룻바닥에 짚신이 놓여 있다. 벽에는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순으로 된 감옥 규칙이 붙어 있다.

 

감옥 옆 쪽문을 나서면 안중근 의사 감방이 나온다.  일본의 국사범에다 일본 최초 수상을 암살했기에 일반 잡범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특별 감호 대상으로 별도의 부속건물에 따로 수용했다. 안의사 방은 창문이 있는 방이다. 간수부장 방은 큰 문이 있는 곳. 바로 옆에서 특별 감시를 했다.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도 찾아와서 읽었으면 좋겠다.

 

안중근 의사 감방. 뤼순감옥으로 압송된 후 순국할 때까지 144일간 이곳에 머물며 일본의 침략자들과 격렬한 설전을 준비한 곳이다. 글씨를 부탁한 사람들에게 무려 200여 편의 붓글씨를 남겼다. 단순한 글이 아니라 해박한 지식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담고 있다. 

안중근 의사 감옥은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데 문이 잠겨있어 창살을 통해 내부를 봐야 한다. 냉기가 흐르는 방에는 딱딱한 목재 침대와 얇은 이불이 놓여 있다.

벽에는 이곳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투쟁을 했던 장소'라는 안내판과 '국가안위 노심초사'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라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오른쪽에는 투박한 책상과 걸상 그리고 지필묵이 놓여 있다. 작은 방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고, 유묵 200여 점을 남겼다. 

그는 판사에게 사형집행 연기를 요청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탈고하고 싶었지만 일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교사, 변호사, 간수 등 비단이나 종이를 한 아름 가져오면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침략국의 간수가 글을 요청했고 수상을 죽인 사형수는 그 사람을 위해 정성스레 글을 써주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한 장면 아닌가. 그만큼 안의사는 큰 그릇이었다. 

간수에게 '獨立', '군인본분신분'이란 글씨를 써주었다. 간수는 몰래 간직하고 고국에 가져갔다. 간수는 글씨를 오늘날까지 그의 후손들은 안의사를 위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하니 안의사의 인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해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의사의 글씨를 유심히 보라. 볼수록 글자에 힘이 서려 있다.  

.

다시 감옥으로 들어왔다. 감옥의 참상을 전시해 놓았다. 밥의 양을 7등급으로 나는 밥그릇.  밥에 양에 따른 죄수들의 갈등을 상상해 본다.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던 고문실. 애국지사를 칠성판에 큰 大자로 누이고 매질을 한다.  납으로 감싼 대나무로 내려치면 수형자의 피부가 찢어지고 살이 터졌다고 한다. 고통 속에 죽어간 영혼들을 위해 잠시 기도해본다. 


간수 자리에 서면 양쪽에 이어진 감방 복도가 보인다. 감방은 방사선으로 배치되었는데 중앙에 선 간수가 한눈에 감시하는 구조다. 적은 인원이 죄수를 감시하기도 하고 죄수들이 늘 간수를 바라보도록 하는 이중적 효과가 있다. 

지하 감방을 포함해 257개의 감방이 있어 2천 명을 한꺼번에 수감할 수 있는 거대 감옥이다. 


어둡고 침침한 복도. 붉은 벽돌은 애국지사의 핏빛처럼 보인다. 복도 바닥은 쇠창살로 꾸며져 1층이 훤히 보인다. 2층에서도 아래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35번 감방

감방 번호 35번.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순국한 감방이다.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문필가, 역사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생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살다 간 ‘지조의 상징’이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한 아니카스트로 무장봉기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27년 좌우합작의 신간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1928년 독립 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기륭항에서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이곳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차가운 감방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옥사하셨다.


죄수복을 입고 있는 신채호 선생 사진. 감옥살이에 지친 표정이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다. 한평생 일본에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며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세수를 한 일화는 유명하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선생의 말씀이 가슴을 파고든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순국한 36번 감방

바로 옆방인 36호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옥고를 치른 감방이다.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명망가의 집안이었다. 10대조 중에서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였다. 그러나 국권을 찬탈당하자 이회영 집안 7형제 중 6형제는 수 백억 원 재산을 팔아 중국으로 건너와 길림성 유하현에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개설했다. 1932년 만주에 지하 공작망을 조직해 주만 일본군 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으로 향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곳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1932년 11월 16일. 가혹한 고문으로 바로 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6형제 중에서 이시영만 살아 돌아와 총리를 지냈다.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과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 집안 출신. 

 


후대 수감자가 늘자 이렇게 감옥을 늘렸다.  


여순감옥 사형집행장

교형장.즉 사형집행장이다. 들어갈 때는 살아서 들어가지만 나갈 때는 죽어서 나가는 곳이다. 안의사가 순국한 뒤 1934년 지어졌는데 안의사도 이렇게 순국하지 않았나 싶다. 교형장은 이층으로 이루어졌다. 


사형수의 눈을 가리고 형구를 씌운 후 1미터 크기의 나무판 위에 세운다. 연결고리에 목을 단단히 묶고 경첩이 열리면 나무판 아래로 사형수가 떨어지고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밧줄을 풀면 나무통으로 구부러진 채로 떨어진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원통 항아리가 뚜껑을 닫고 뒷편 사형수 묘지에 매장하면 끝이다.


교형장에서는  매장한 시신을 볼 수 있다. 저승에서도 편히 눕지 못하고 구부린 채 죽어야 했다.

나무통에 넣어 매장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일본군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수형자들이 죽어서는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추악한 생각을 가진 자가 바로 야스쿠니에 합사된 일본인임을 알아야 한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여순감옥 내에는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그의 업적과 거사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다. 흉상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헌화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안의사의 글씨의 사본을 걸어 놓았다  대한국인 안중근 서와 손도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유언

'자세한 얘기는 천당에서 만나 기쁘게 얘기하자.'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자는 간곡함이 묻어 있다. 

 

안의사는 죽을 때까지 가족사진을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남긴 채 나라를 위해 한 목숨을 던진 애국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남은 자의 시련은 혹독했다. 안의사의 아내인 김아려와 첫째 분도 그리도 둘째 준생은 안의사 거사 덕에 고국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하고 러시아-길림-상해를 떠돌아다녔다. 

안의사는 유언에도 밝혔듯이 장남 분도가 신부가 되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안의사가 순국한 후 1년 뒤, 길림성 목릉에 살았을 때 분도는 낯선 낚시꾼이 준 과자를 먹고 죽고 만다. 훗날 일본 놈이 파견한 간첩임을 밝혀졌는데 일제는 후손까지 멸족시킬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둘째 준생은 친일행각을 하고 만다. 1939년 32세 때 상해에서 경성을 찾은 안준생은 이토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를 찾아 향을 피웠고 이토의 차남을 조선호텔에 만나 만나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아버지 죄를 아들이 대신 속죄하고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 내선일체의 상징이라며 언론의 대서특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죽했으면 백범은 해방 후 중국 관헌에게 왜놈 앞잡이인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부탁까지 했을까. 


사형집행을 앞두고  조선 가톨릭 교회에 평생 멘토인 빌렘 신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뮈텔 주교가 거절하자 빌렘 신부는 가지 말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3월 8일 뤼순에 면회를 와서 성사를 준다. 훗날 교구의 명령을 어기고 살인죄를 저지른 안의사에게 성사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빌렘 신부는 처벌당한다. 스승과 제자의 황홀한 만남이다. 

빌렘 신부는 의병활동을 하겠다는 안의사를 말린 적이 있었다. 독실한 신자인 안의사는 자신의 신념을 굽

히지 않았다. 

"신부님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습니다." 

일제의 눈치를 봤던 조선 천주교에게 던진 일갈이 아닐까. 


여러 발굴단이 여순의 공동묘지를 찾았지만 오늘날까지 유해를 찾지 못했다. 순국한 해는 경술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즉 국권 피탈을 당하고 만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 치욕적인 날을 모르고 천국에 가버렸으니 말이다. 


안의사는 철저한 항일운동가다. 죽어서도 침탈된 고국에 묻히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나마 마음 편한 곳이 자신이 거사를 벌였던 하얼빈이며 훗날 국권이 회복된 조국에 떳떳이 입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온다는 것을 확신했다. 


두 동생이 교도소 측에 시신 인도 요청을 했지만 일본인들은 거부했다. 고국으로 시신이 돌아가면 그곳이 성지가 되고 반일 정서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두 동생마저 국외로 추방시켜 버렸다. 

 

 

난 안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마지막 부탁을 잊을 수 없다. 과연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아들의 사형 소식이 전해지자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의사의 두 동생을 불러 안의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도록 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니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을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효도이다. 


세상에나 피붙이 아들에게 죽으라는 말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어머니의 놀라운 애국심에 눈물이 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효자 안의사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항소를 포기하고 어머니가 지어준 모시 한복을 입고 의연하게 순국한다. 

고등법원장 히라이시는 일부러 형무소까지 찾아와 항소할 것을 권했지만 안의사는 거부했다. 옳은 일을 했으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담겨 있다. 


처형장. 나중에 감옥 세탁장으로 사용되었다가 2010년 순국 100주년을 맞아 복원되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 위에는 안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그 위로 죽음으로 몰아넣을 올무가 매달려 있다. 

이것이야말로 거룩한 십자가가 아닐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의사는 바로 이 사형대 앞에 섰다.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대한민국이 독립해야 동양 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다. 

형 집행 간수는 백지를 접어 두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둘러맸다.
간수는 안중근을 부축해 일곱 계단을 올라 교수대 위에 세웠다.

 

이때 안중근은 집행관에게  부탁한다.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


안의사는 교수대에서 3분간 인생의 마지막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목을 건네 밧줄을 메도록 했다. 

오전 10시 4분.  바닥이 덜컹거리며 바닥의 문이 열렸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하늘로 올라갔다.
10시 15분 의사는 절명을 확인했고 절구통 같은 나무통에 담겼다. 사형수가 빠져나가는 문으로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파묻게 된다. 

이승을 마감하기 직전 과연 3분 동안 안의사는 무슨 기도를 했을까?  천국 문을 열게 해달라. 아니면  조국의 독립 아니면 남은 가족을 위해 기도했을까 

지금 나에겐 평생의 기도시간이 주어졌지만  단 1분도 이렇게 처절하게 기도한 적이 없었다. 내 인생이 딱  3분이 남았다고 가정하자. 난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을까?

 

마지막 수의

 


안의사가 법정투쟁을 했던 여순일본관동법원은 여순감옥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택시로 기본요금. 일제 패망 뒤 인민병원으로 사용되었다가 한국의 민간단체가 대련시에 건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는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여순감옥에서 관동법원 사이를 오갔던 죄수 마차. 교도원들의 삼엄한 경비를 볼 수 있다.

 


 법원에는 항일지사가 탔던 마치를 복원해 놓았다.


각종 고문기구와 일제의 만행 증언이 걸려 있다. 

 


쇄신구. 사람의 시체를 분해한 후 깔때기를 넣고 전동기로 연마시켜 시체의 흔적을 없앴다고 한다. 

 


포화로. 손과 발을 도르래에 매달고 뜨거운 난로에 몸을 붙여 타 죽게 한 고문기구.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오싹한 고문기구가 한숨을 쉬게 만든다. 


각종 고문기구

 


죽음을 구걸하지 않고 떳떳하게 자기 기개를 밝히는 안의사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법정에 울려 퍼졌다.

안의사는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 체결, 양 평화 교란 등 15가지로 제시해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이 조선을 부당하게 침략한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것이 하얼빈역에서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총을 건넨 이유이기도 하다. 


안의사의 재판을 지켜본 영국 '그래픽'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입을 통해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평가했다. 


바로 이것이 안중근이 노린 법정 투쟁이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총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나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이에 놀란 일본 판사는 방청객을 모두 내보내기도 했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여순도독부 지방법원 2층 형사 법정에서  안의사는 사형 언도를 받는다.

그는 미소 지으며 재판장에게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2014년 오늘. 또 다른 이토 히로부미 아베와 그 측근들이 매일 망발을 늘어놓고 있다.  그 입을 봉해 줄 안의사 필요하지 않을까. 안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앉았다. 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과연 내가 국가를 위해  원수를 처형할 기회 온다면 안의사처럼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소식을 들은 주은래의 말씀


안중근이 테러리스트임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이 제작한 안중근 엽서. 일부러 처참한 사진을 고른 것 같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암살의 맹약을 할 때 무명지를 절단하는 구관이 있다."라는 글씨까지 써 놓았다. 엽서가 너무나 잘 팔린 데다가 조선인들이 가슴에 품고 다녀 놀란 나머지 판매금지시켰다.

안의사의 거사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에게도 인재가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고 그 후 무장독립운동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중국에서도 신해혁명의 영향을 주고 오늘날까지 역사 전쟁이 이어오고 있으니 

8일 동안 안의사의 행적을 더듬어 보았다. 단순히 일본 수장을 저격한 순국 열사가 아니었다. 위대한 정치사상가이자 몸으로 실천한 종교인이자 대 서예가였다. 남북 분단, 일본의 우경화, 중국의 역사 편입 등 오늘날 역사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아시아의 EU를 만들겠다는 동양평화론. 그것은 바로 리 후손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위대한 장군께 고개를 숙인다. 

"안중근 장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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