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솔 Jun 04. 2022

우울증 일기 68. 노는 삶


평일 낮에 나올 수 있는 것은 나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을 직장인들을 한껏 비웃어주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원래는 카페에 가서 글을 쓸 생각이었지만 버스를 타면서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버스의 에어컨을 더 쐬고 싶었고 이 버스를 타고 있을 이유를 찾다가, 이 버스가 영화관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기도 했다. 닥터 스트레인지2를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금요일 한낮. 오후 1시에 나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겨우 20명 될 정도였다. 영화가 개봉한지 꽤 오래된 탓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루종일 혼자 지내면서도 또 다시 사람 많은 곳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이유는 뭔가 싶다. 나는 콜라 라지 사이즈 하나를 끌어 안고서 영화를 봤다. 


영화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는 멋진 그래픽을 보고 싶었기 떄문에 그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 마블 세계관이나 영웅 스토리는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렇게 감명 깊지는 않았다. 그래픽이랑 액션이 끝내줬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오자 오후 3시였다. 햇볕은 뜨거웠다. 나는 왠지 모르게 묘하게 흥분했다. 보통 이런 시간대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늘상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놀고 있다니. 퇴사 초반에는 노는 것이 불안했다. 놀면 안될 것 같고 뭔가를 해야할 것 같고 미래를 준비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무언가에 시달리면서 불안에 떨지 않기로 마음 먹었고 그냥 놀 때는 놀기로 했다. 그런 마음을 먹자 나는 이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뭐든지 어디로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순간이 재밌었다. 이게 사는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오로지 나로 가득한 시간. 길거리에 있어도 누가 나를 보는지 말던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삶. 너무나 행복했다. 


놀 수 있는 시간을 즐겨야지. 생각해보면 나는 이 황금같은 시간에 불안에 떨려고, 불행해지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가진게 없다. 흙수저로 태어났고 집은 가난했다. 뭘 해보려고 노력해보긴 했는데 방향이 맞았는지 의문이 든다. 아, 어쩌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삶을 추구했던 내 자신이 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난에서 벗어나기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즐거운 삶을 목표로 삼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삶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난 대체 언제부터 노는 것을 죄악시 여겨 왔던 것일까. 스스로 '노는 것은 금물', '노는 것은 사치' 라고 외쳐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초등학교때까지는 나는 정말 잘 놀았다. 맘편히 노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먼저 스스로 숙제를 다 끝냈다. 그리고 나서 놀이터에 나가 친구들이랑 놀든, TV를 보든 책을 보든 그렇게 놀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놀고 있는 내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때부터 였던 것 같다. 일할 때도 그랬다. 5일은 회사 나가고 겨우 주어진, 자유로운 주말. 그 주말에도 나는 뭔가를 해야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아서였다. 현재 연봉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현재의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주말을 바쳐서 뭔가를 바꾸려고 했다. 


그냥 열심히 하면, 놀지 않으면, 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열심히 하면, 뭔가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후에 햇빛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 그냥 노는게 좋은거구나.  난 노는 걸 하고 싶었던 거구나.



작가의 이전글 우울증 일기 67. 회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